국내여행과 풍경

겨울 채비에 들어간 진주성4(2020.11.23. 월요일)

큰집사람 2020. 11. 24. 14:25

 

 

 

 

 

진주성 임진대첩 계사순의단(晉州城 壬辰大捷 癸巳殉義壇)

 

 

 

 

진주성 임진대첩 계사순의단(晋州城 壬辰大捷 癸巳殉義壇)

이 단은 진주성의 임진대첩과 계사순의 때에 순절한 호국영령을 기리기 위하여

진주 시민의 소망을 담아 문화공보부와 진주시가 세운 제단이다.

198612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98712월에 마쳤다.

단의 크기는 가로 18m, 세로 24m, 높이 3.6m이고,

3단으로 이루어진 네모난 단 위에 가로 9.7m, 높이 3.5m의 대첩비를 세웠다.

단의 왼쪽과 오른쪽 옆면에는 돋을새김으로 당시의 역사적 장면을 표현하였고,

앞뒤면에는 임진대첩과 계사순의의 역사적 기록을 새겼다.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킨 호국영령들을 기리고,

그들의 역사정신을 가슴 깊이 이어받고자 이 단을 세운다.>

1987년 12월

 

 

 

 

 

 

 

진주성 임진대첩 계사순의단(晋州城 壬辰大捷 癸巳殉義壇)

임진왜란(壬辰倭亂)은 우리가 패(敗)한 전쟁이 아니다.

 

 

 

 

 

 

 

 

 

 

 

 

 

 

 

 

 

 

 

 

 

 

 

 

 

 

 

 

 

 

 

KBS진주중계소 옛터

이곳은 1962년 12월 23일

KBS라디오(HLCJ) 전파가 진주에서 첫 발사된 중계소 자리다.

진주성에 우뚝 솟은 중계탑의 불빛은

밤하늘의 등대처럼 반짝여 진주의 파수꾼이라 했다.

그 불빛이 지금까지 시민의 눈과 귀와 입이 되어 반짝이고 있다.

이 불빛이 서부 경남 곳곳에 비추어 희망의 전령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개국 30주년을 맞이하여 이곳에 초심을 담아 기념비를 세운다.

2006년 4월 1일

KBS진주방송국 직원 일동

 

 

 

호국(護國)의 종(鐘)

종(鐘)의 높이는 2.7m, 지름은 1.7m이며, 무게는 500kg이다.

종신(鐘身)에는 문양(文樣)이 부조(浮彫)되어 있는데,

종두(鐘頭)에는 호국(護國)을 상징(象徵)하는 용(龍)을 주조(鑄造)하고,

상하대(上下臺)와 유곽에는 진주시의 상징인 석류꽃과 석류(石榴)를 연속적으로 새기고,

유두에는 무궁화(無窮花)를 장식했다.

전체적인 모습은 상원사종(上院寺鐘)과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을 본뜬 것으로,

종신에는 논개 부인상과 촉석루 그리고 대나무가 조각되어 있다.

 

호국(護國)의 종(鐘)

이 호국(護國)의 종(鐘)은 서기(西紀) 196012

진주시민(晋州市民)의 뜻을 모아 선조(先祖)들의 거룩한 호국(護國)의

얼을 계승선양(繼承宣揚)하기 위(爲)하여 주조(鑄造)된 것이다.

 

당초(當初) 촉석문루(矗石門樓)에 걸려 있었으나,

문루(門樓)가 종(鐘)의 무게를 지탱(支撑)하지 못하여

이전(移轉)을 추진(推進)하던 중(中),

일본국(日本國) 장기현(長岐縣) 대촌시(大村市)에 거주(居住)하는

재일동포(在日同胞) 최복순(崔福順) 여사(女史가)

많은 사람들에게 애국애족(愛國愛族)의 정신(精神)을 일깨워 주고,

아름답고 가치(價値) 있는 삶의 자세(姿勢)를 행동(行動)으로 보여주기 위(爲)하여,

현해탄(玄海灘) 건너 이국(異國)에서 각고성실(刻苦誠實)로

모아온 거액(巨額)의 사재(私財)를 희사(喜捨),

이곳에 종각(鐘閣)을 건립(建立)하고 이전(移轉)하게 된 것이다.

 

유서(由緖) 깊은 이곳 성(城)터에 뜨거운 애국(愛國)의

충정(衷情)으로 호국(護國)의 종각(鐘閣)을 높이 세우니

꺼지지 않는 민족(民族)의 기상(氣象)이

영원무궁(永遠無窮)토록 소리 높이 울려 퍼질 것이다.

1987년 12월

진주시장(晋州市長) 문백(文伯)

 

호국종

진주성 엣 성안에 울려 퍼지는 호국 종소리

대처럼 푸른 절개 석류꽃보다 붉은 충성

빛나는 역사전통을 잊지 말라 울리네

가슴을 파고드는 은은한 호국 종소리

내 고장 내 나라 사랑 우리 소원 번영과 통일

겨레의 자랑과 영광 이룩하라 울리네

호국종 치는 소리 이 종소리 들리거든

몸을 바로 하고 옷깃 여미시고

가슴에 두 손을 얹고 다시 다짐하시오.

1980년 3월 1일

노산 이은상 씀

 

 

 

 

 

 

 

 

 

 

 

김시민장군전공비(金時敏將軍戰功碑)와 촉석정충단비(矗石旌忠壇碑)

 

 

 

 

 

 

* 김시민장군전공비(金時敏將軍戰功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호)

이 비는 임진왜란(壬辰倭亂) 3대첩(大捷)의 하나인

진주성 싸움을 승리로 이끈 주장(主將) 김시민 장군의 전공을 새긴 비이다.

당시 김시민 장군은 진주목사(晋州牧使)로서 판관 성수경(判官 成守慶),

곤양군수 이광악(昆陽郡守 李光岳) 등과 함께

주도면밀(周到綿密)한 작전을 펼쳐 왜적을 격퇴(擊退)하였다.

 

비문(碑文)에는 1천 명 되지 않는 병력으로

10만 명의 군대를 물리쳤다고 했으나,

다른 기록에는 3,800명의 적은 병력으로 2만여 명의

왜적을 격퇴하고 진주성을 지킨 것으로 나타난다.

김시민 장군은 적은 군사로서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몰려오던 왜적의 예기(銳氣)를 꺾고 승리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영남에서 호남으로 나아가는 길목인 이곳 진주성을 사수(死守)함으로써

왜병의 호남 진출을 봉쇄하여 임진왜란 초기에 우리측에

불리했던 전세를 뒤집고 전열을 가다듬은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 비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진주고을 백성들의 열망에 의해

광해군(光海君) 11(1619) 7월에 세워졌는데,

성균관 진사 성여신(成汝信)이 글을 짓고,

성균관 생원 한몽인(韓夢寅)이 글씨를 썼다.

 

* 촉석정충단비(矗石旌忠壇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호)

이 비(碑)는 조선 선조(朝鮮 宣祖) 26(1593) 61929일 사이에

있었던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장렬하게 순국한 삼장사(三壯士)

​김천일(金千鎰), 황진(黃進), 최경회(崔慶會) 및

군관민의 영령을 제사하기 위하여 세운 정충단의 비석이다.

 

임진왜란 초기에 왜적의 기습적 공격에 미처 전열을 정비하지 못한

우리는 한동안 육지의 전투에서 곤경에 처했다.

그러나 우리 군대가 흐트러진 대오를 가다듬기 시작하면서 왜적을 제압하자,

수세에 몰린 적들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

아군의 10배에 가까운 병력으로 일대 반격을 펼쳤으나,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하여 물러갈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제1차 진주성 싸움(159210510)이다.

 

그들은 이에 대한 보복전을 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특명에 의해 가토 키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이끄는 왜군 최정예(最精銳)의 대군을 편성하여 2차로 진주성을 공격해 왔다.

이때 삼장사를 중심으로 뭉친 진주성의 군관민은 압도적인 적세에

두려움 없이 맞서 전원이 순국하는 장렬한 최후를 맞았던 것이다.

숙종(肅宗) 12(1686)나라를 위해

충절을 다한 이들을 위해 촉석루 동쪽에 정충단을 세운 것이다.

 

 

 

 

 

 

 

 

 

공북문(拱北門)

 

 

 

 

 

 

 

 

충무공 김시민 장군상(忠武公 金時敏 將軍像)

 

 

 

 

진주성 중영(中營)터 정밀발굴조사

 

 

 

 

 

 

영남포정사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호)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는 조선조 말

경상남도관찰사(慶尙南道觀察使)의 선화당 관문(宣化堂 關門)으로서,

일명 망미루(望美樓)라고도 불렀다.

처음 창건은 조선조 광해군(光海君) 10(1618) 병사 남이흥(南以興, 1576 - 1627)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 집무청인

관덕당 내동문(觀德堂 內東門)으로 건립한 이래

경상도우병영(慶尙道右兵營)의 관문(關門)으로도 활용되었다.

 

고종(高宗) 32(1895)8도제(道制)를 폐지(廢止)하고

전국(全國)을 23부제(府制)로 시행함에 따라

이곳에는 진주부(晋州府)가 설영(設營)되어

진주관찰부의 선화당 관문(宣化堂 關門)이 되었다.

 

다음해인 건양원년(建陽元年, 1896)다시 전국을

13도로 개편(改編)함에 따라 경상남도가 설영(設營)되어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의 선화당 관문이 된 이래,

1925년 도청이 부산부(釜山府)로 옮겨갈 때까지

그 문루(門樓)로서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라 이름하였다.

이 건물을 본따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가

창원시 용지공원(昌原市 龍池公園)에 세워져 있다.

 

 

 

하마비(下馬碑)

수령(守令) 이하(以下) 모두 말에서 내려 들어가라는 표석(標石)이다.

조선조 선조 37년(1604) 이래로는 경상도우병영(慶尙道右兵營),

고종 32년(1895)에는 진주관찰부(晋州觀察府), 건양원년(建陽元年, 1896)

이래로는 경상남도관찰부(慶尙南道觀察府)가 있던 곳으로,

우병영(右兵營)의 정문인 망미루(望美樓),

관찰부의 정문인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 입구에 세워진 것이다.

병사(兵使) 및 관찰사(觀察使) 이외의 모든 사람은 말에서 내려 가라는 뜻이다.

 

망미루(望美樓)

 

 

 

 

문충공호정하륜선생태지(文忠公浩亭河崙先生胎地)

 

 

문충공호정하륜선생태지(文忠公浩亭河崙先生胎地)

이곳은 진주(晋州)가 낳은 태종조(太宗朝)의 영의정(領議政)

문충공(文忠公) 호정(浩亭) 하륜(河崙) 선생(先生)의 태지(胎地)이다.

선생(先生)은 高麗(고려) 忠節臣(충절신) 문하시랑(門下侍郞) 공진(控辰)의 후손(後孫)으로,

1347년(충목왕, 忠穆王 3년) 정해(丁亥)에 태어나

1416년(태종, 太宗 16년) 병신(丙申)에 70세로 몰(歿)하였고,

묘(墓)는 진양군(晋陽郡) 미천면(美川面)의 오방동(梧坊洞)에 위치(位置)한다.

 

19세에 등과(登科)하여 이목은(李牧隱) 선생(先生)을 사사(師事)하였고,

그 천부(天賦)의 재지(才智)와 탁월(卓越)한 학문(學問)과 절세(絶世)의 경륜(經綸)은

마침내 조선조(朝鮮朝)의 기틀을 정립(定立)하였으니,

문한(文翰)에 간(干)한 일체(一切)의 정사(政事)는 물론(勿論)하고

법령(法令)과 제도(制度)의 완성(完成), 토지제도(土地制度)의 혁신(革新),

국가재정(國家財政)의 정비(整備), 대명외교(對明外交)와 인재등용(人材登用)에

심혈(心血)을 쏟아 국정(國政)을 가꾼 위대(偉大)한 정치가(政治家)로

그 충의(忠義)와 정성(精誠)은 일월(日月)을 꿰뚫었다.

 

그러므로 나라에서는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을 봉(封)하고,

문충(文忠)의 시호(諡號)를 내려 대종묘(大宗廟)에 배향(配享)하였으며,

후세(後世)의 사가(史家)는

그 기미(機微)를 명찰(明察)한 응변(應變)의 지모(智謀)를 장자방(張子旁)에 비(比)하고,

혜택(惠澤)을 베풀고 도학(道學)을 제창(提唱)한 공(功)을 한창려(韓昌黎)에게 비(比)한다.

 

<이곳은 진주가 낳은, 태종 임금 때 영의정을 지낸

문충공(文忠公) 호정(浩亭) 하륜(河崙) 선생(先生)이 태어난 곳이다.

선생은 고려충절신(高麗忠節臣) 문하시랑(門下侍郞) 하공진(河控辰)의 후손으로,

1347년 정해(丁亥)에 태어나 1416년 병신(丙申)70세로 세상을 떠났고,

묘는 진양군 미천면(美川面) 오방동(梧坊洞)에 위치한다.

 

19세에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이목은(李牧隱) 선생을 스승으로 섬겼고,

그 타고난 재주며 슬기와 남보다 훨씬 나은 학문과

세상에 보기 드문 큰 뜻을 품고 나라를 다스리는 일의 이모저모에 따른

그의 계획은 마침내 조선조의 기틀을 정하고 세웠으니,

글을 짓거나 쓰는 일에 관계되는 모든 정사는 말할 것도 없고,

법령과 제도의 완성, 토지제도를 새로 고침,

나라에 필요한 경비를 모으고 관리하고 이용하는 일의 운영,

명나라에 대한 외교와 인재를 뽑아 쓰는 일에 최대의 정성과 노력을 쏟아,

나라 다스림을 가꾼 자리에 있었던 정치가로 그 충의와 정성은 일월을 꿰뚫었다.

 

그러므로 나라에서는 진산부원군을 봉하고

문충(文忠)의 시호를 내려 태종사당에 공신으로서의 신주를 모시었고,

후세의 역사가는 그 낌새나 눈치를 밝게 살핀

그의 슬기로운 꾀를 장자방(張子房)에 비교하였고,

혜택을 베풀고 도학을 제창한 공을 한창려(韓昌黎)에게 견준다.>

1990년 12월

진주시

 

 

 

진주성 비석군

 

 

진주성 비석군

조선조 선조 37(1604) 합포(마산)에 있던 경상도 우병영을

진주성으로 옮긴 병사 겸 목사 이수일의 유애비를 비롯,

효종 10(1656) 목사 성이성의 청덕 유애비 등

조선시대에 세워진 30여 기의 비석군이다.

이 비석들은 진주성 또는 시내 각처에 있던 것을

1973년 문화재보호협회 진주지부에서 모은 것이다.

 

비석보호

이곳의 비석은 진주 시내에 흩어져 있던

연고자가 없거나 관리가 소홀한 비석들을 길이 보호할 목적으로

우리 회원들이 손수 옮겨 세운 것입니다.

1973.11.30

사단법인 한국문화재보호협회 진주지부

지부장 성환길

 

 

 

 

 

 

 

 

 

용다리 전설

 

 

용다리 전설

지금의 동성동 212 - 1번지(삼성화재) 부근에는

예전에 용머리가 양쪽으로 붙어 있는 돌다리가 하나 있었는데,

이 용다리에는 슬픈 사랑의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때는 고려 초 진주의 한 마을 군수 이씨에게 딸이 셋 있었다.

그 중 둘째 딸은 불행히도 출가하자마자

남편이 죽어 친정으로 돌아와 지내고 있었다.

군수의 집 머슴 돌쇠는 이때부터 아씨를 사모하게 되었고,

아씨 역시 돌쇠의 성실하고 충직한 모습에 마음이 끌리게 되었다.

그러나 신분상의 차이로 인해 서로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했으며,

둘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그러다 이씨는 상사병으로 그만 목숨을 잃게 되었고,

돌쇠는 아씨를 장사지내러 가는 도중

용다리 위에서 무심결에 도랑물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마치 죽은 아씨처럼 보여

<아씨> 하고 소리치다 그만 미쳐버리고 말았다.

이후 군수는 딸을 잃은 이곳을 떠나려고 막 용다리를 건너가고 있는데,

뒤따라 오던 돌쇠가 보이지 않아 주변을 찾아보니

이미 돌쇠는 다리 옆 고목에서 목을 맨 상태였다.

그런데 그 때 갑자기 조용하던 용다리 밑 개천에서

수천 마리나 될 듯한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려 왔는데,

이는 마치 죽은 돌쇠가 우는 소리와 같았다.

그 뒤부터 용다리 밑에는 진주에서 개구리가 가장 많이 모여 울게 되었다.

짝을 지은 남녀나 부부가 지나가면 울음이 끊겼으며,

상사병에 걸린 사람이 용다리를 두 번 왔다갔다하면

씻은 듯이 병이 나았다고 한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돌쇠가 이루지 못한 사랑을

남에게라도 이루게 하려는 돌쇠의 지성이라고들 말하고 있다.

6 ·25 까지 돌쇠가 목매어 죽은 고목에

아들을 원하던 사람들은 한식에 한번씩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지금은 용다리의 흔적만이 진주성 안에 남아 있다.

 

 

 

 

 

해체 보수공사가 진행 중인 북장대

 

 

북장대(北將臺,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호)

북장대(北將臺)는 조선(朝鮮) 중기(中期)에 건축된

3, 측면 2칸의 팔작(八作)지붕 다락집형 건물(建物)로서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에 포진한

성(城)의 병력(兵力)을 지휘(指揮)하던 곳이다.

일명 진남루(鎭南樓)라 부르며,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불타 없어진 것을 1618

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 15761627)중건(重建)하였고,

현재의 건물은 1964년에 중수(重修)한 것이다.

 

진주성 북장대 보수공사 중 발견된 상량문

진주성 북장대 해체 보수공사 중 1864년(고종 1년)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지붕에 숨겨져 있던 상량문이 2020년 6월 10일 발견됐다.

상량문은 새로 짓거나 고친 집의 내력, 공역 일시 등을 적어둔 건물 기록서로

건립연대, 공사참여자 등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료로 평가 받으며,

목조건물 건축과정에서 최상부 부재인 종도리를 올리는 상량제 때 사용하는 축문으로 쓰인다.

보통은 종도리에 붓글씨로 간략하게 쓰지만

기록할 내용이 많은 관아, 학교, 사원 등은

별지에 상량문을 적어 종도리에 홈을 파 그 속에 보관한다.

상량문은 1864년 제작된 것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당시 경상우병사이던 이교준이 쓴 걸로 파악됐다.

 

이와 함께 1971년 북장대 중수 시 문화재청 신영훈 위원이 쓴 중수기도 함께 발견됐다.

두 문헌은 현재 국립진주박물관에 임시 보관 중이다.

진주시는 상량문을 근거로 북장대 문화재 승격 신청을 검토할 계획이다.

상량문이 발견된 북장대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호로,

진주성 북쪽의 지휘소 역할을 했다.

진남루 혹은 공북루라고도 불린다.

북장대는 임진왜란 때 손상돼 광해군 10년(1618년) 병마절도사 남이흥이 중건했다.

조선 중기에 속하는 다락집 형 군사건물로,

후대에 세워진 군사시설의 모범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운주헌터

 

 

운주헌터(運籌軒址)

운주(運籌)는 군막 속에서 전략을 세운다는 뜻으로,

운주헌은 조선시대 통제사(統制使)와 병사(兵使)의 집무실 명칭이다.

이곳은 경상우병영의 수장인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의 집무실이 있었던 곳이다.
경상우병영은 원래 창원 합포에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분탕되면서 1603년(선조 36년) 체찰사 이덕형(李德馨)의 청에 의해 진주성으로 이전했다.

경상우병영이 진주성에 설치되자 종2품 무관인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진주목사를 겸임하게 되었다.

초대 경상우도병마절도사인 이수일(李守一)이 진주목사를 겸임하고 있었는데,

<진주에 군인이 와서 고을을 다스리게 되니 인재가 나오지 않고 풍습이 잘 교화되지 못한다.>는 주장이 나와,

1635년(인조 13년)에 병마절도사가 목사를 겸직하는 조치를 폐지하였다.
병사와 목사가 분리된 후에도 우병영은 진주성 내에 있으면서

경상우도 병무 중심지와 영남 서부의 방어기지로서 조선 말까지 존속했다.

우병영에는 병사의 집무관아인 운주헌 외에 관덕당(觀德堂), 공진당(拱振堂)이 있었고,

주변에는 군기고 화약고가 있었다.1894년 7월 15일 각 도의 병영혁파와 함께 폐지되었다.

1896년 지방제도 개혁으로 경상도가 남북으로 분리되었을 때,

관찰사 집무처인 선화당(宣化堂)으로 바뀌어 경상남도 청사로 사용되었다.

 

경절사(擎節祠)

이곳은 고려조(高麗朝) 충절신(忠節臣) 하공진(河拱辰) 장군(將軍)의

영정(影幀)과 위패(位牌) 봉안(奉安)하고 향례(享禮)를 받드는 곳이다.

공(公)은 현종원년(顯宗元年, 1010),

안으로는 왕실(王室)의 위난(危難)을 수호(守護)한 공(功)을 세웠고,

밖으로는 거란(契丹)의 40만 대군(大軍)을

삼촌설(三寸舌)로 퇴각(退却)케 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가(國家)를 위하여 적국(敵國)의 볼모가 되어 절개(節槪)를 굽히지 않고

의(義)를 좇아 신명(身命)을 홍모(鴻毛)와 같이 버리신 분이다.

그러므로 나라에서는 문하시랑동평장사(門下侍郞同平章事)를

추증(追贈)하고 영정(影幀)을 기린각(麒麟閣)에 모시었다.

공(公)의 죽음은 곧 위국충절(爲國忠節)의 상징(象徵)이 되어,

이곳 진주(晋州)를 충절(忠節)의 고장이라 일컫는 효시(嚆矢)가 되었다.

 

 

 

 

 

아시고려인 불감유이심(我是高麗人 不敢有二心)

나는 고려인이다.

감히 두 마음을 품지 않는다.

 

*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기록된 사실(史實)

충절신 하공진(河拱辰)은

서기 1010년에 좌사낭중으로 강화 교섭사로 적진에 들어가,

고려에 침입한 거란의 40만 대군을 준열한 능변으로 막아내 고려를 누란의 위기에서 구하고,

자신은 볼모가 되었다.

요나라(거란) 성종의 직접 신문을 받게된 하공진은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나는 고려인이다. 고려의 신하로서 어찌 두 마음을 품을 수 있느냐?"며,

"너희들을 섬겨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일갈했다.

요나라 성종은 하공진의 기개를 가상히 여겨 온갖 방법으로 마음을 돌리려 했으나,

하공진은 성종을 모욕하는 말까지 서슴치 않았다.

급기야 간을 꺼내어 씹히는 충렬의 죽음을 당하고 말았는데,

이때가 서기 1011년(고려 현종 2년) 12월 이었다.

고려 조정에서는 하공진의 순국에 대하여 교지를 내려 그 공훈을 찬양하고,

아들 하칙충(河則忠)에게 녹(祿)과 5품의 관작을 내렸다.

이어 서기 1052년(제11대 문종 6년)에는 왕이 친히

"거란군 침입 때 하공진은 일신을 나라에 바치기로 작정하고

적진에 들어가 세치혀로 대군을 물리쳤다." 고 현창하고,

공신각(功臣閣)에 하공진의 영정을 모시도록 했다.

그의 장렬한 최후는 오래도록 살신보국의 표상이었고,

1,000년의 세월 동안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하공진은 2007년10월 경기도 파주시 고려통일대전에 배향되었다. 

 

 

 

 

 

 

 

 

 

 

 

 

 

청계서원(淸溪書院)

 

 

 

 

청계서원(淸溪書院)

이곳은 고려병부상서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진양부원군 은열공 관정 정신열 선생과,

고려 공민왕 13(1364, 갑진년) 봄 이 땅에 목면 씨앗을 처음 심어

그 중 오직 한 알을 살려 크게 번연시키고, 씨아와 물레 그리고 베틀을 창제하여

[고려사, 태조실록에 기록] 온 백성들에게 따뜻한 목면 베옷을 입힌,

고려 공민왕 때 전객령 판부사로 치사(致仕)하신

진양군 문충공 퇴헌 정천익 선생을 모신 곳이다.

 

조선 순조 33년에 영호남 유림들이 선생에 대한 보은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진주의 서쪽 대평면 마동 남강변에 청계서원을 세웠더니,

예조에서 해마다 춘추로 관원을 보내 생폐와 향촉을 봉진 사림 봉사해 오던 중,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후 1961년 후손들이

이곳에 복원사업을 시작하여 경덕사와 정교당을 건립하고,

봉남서당이란 이름으로 그 맥을 이어오다가

1986년부터 1993년까지 정부의 도움과 후손들의 정성으로

숭은사와 전사청을 재건하고, 청계서원으로 복원하여

매년 음력 315일 두 사당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진주성 사랑나무(연리근, 연리목)

 

 

진주성 사랑나무(연리근, 연리목)

가까이 자라는 두 나무가 서로 만나 합쳐지는 현상을 연리라고 합니다.

오랜 세월을 함께하며 서로 부대끼고 겹쳐져 하나가 되는 것

(뿌리가 만나면 연리근, 나무의 몸통이 만나면 연리목)이라 하며,

두 몸이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 각각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연인의 사랑에 비유되어 일명 <사랑나무>로도 불립니다.

연리나무 앞에서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사랑의 소원이 성취되고,

마음속의 바라는(사랑, 소원, 희망, 승진, 건강, 화합, 우정, 합격, 성공 등)

소망이 이루어 진다고 합니다.

팽나무와 느릅나무가 서로 합쳐져 있는

진주성 사랑나무에서 꼭 소원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진주성 포루

 

 

진주성 포루(砲樓)

진주성을 방어하는 포진지이다.

선조 40(1607) 병사 김태허(1555 - 1620)에 의해

진주성 내, 외성에 포루 12좌가 설치되었는데,

<여지도서>의 <경상우도병마절도영>조에 의하면,

<내성의 포루는 3곳이니 삼가, 의령, 곤양 등 3읍의 소속>이고,

<외성의 포루는 9곳이니 진주, 단성, 초계, 거창,

사천, 함양, 남해, 합천 등 8읍 소속>이라고 하였다.

1969년부터 진주성을 복원하면서 상징적으로 1개소만 복원하였다.

 

 

 

 

 

진주성 포루에서 바라본 천왕봉과 중봉을 비롯한 지리산 일대

 

 

 

 

 

 

창렬사(彰烈祠,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

창렬사(彰烈祠)는 임진왜란 당시인 1593년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장렬히 순국한 분들의 신위를 모시기 위해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정사호(鄭賜湖, 1553 - 1616)가 건립하여

선조 40(1607) 임금의 사액(賜額)을 받았다.

1차 진주성 싸움에서 대승리를 거둔 김시민 장군(金時敏 將軍)을

모신 충민사(忠愍祠)가 고종 5(1868년)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령으로

헐어지게 되자 장군의 신위를 이곳으로 옮겨와 함께 모셨다.

 

지금 이 사당에는 충무공 김시민 장군(忠武公 金時敏 將軍)의 신위를 맨 윗자리에 모시고,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충청도(忠淸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황진(黃進),

경상우도(慶尙右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최경회(崔慶會) 등

임진왜란 때 순국한 39분의 신위를 모시고 있으며,

모두 목숨을 아까워 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장렬히 싸우다

순국한 분들로서 이름이 천추에 빛나고 있다.

 

 

 

 

 

 

 

 

 

 

 

 

 

 

 

 

 

진주성 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