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과 풍경

겨울 채비에 들어간 진주성2(2020.11.23. 월요일)

큰집사람 2020. 11. 23. 20:11

 

 

 

 

 

 

 

 

 

천자총통(天字銃筒)

 

 

천자총통(天字銃筒)

천자총통(天字銃筒)은 조선 태종 때부터 제작되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사용된 화포 중에서 가장 큰 화포(火砲)이다.

이 포는 성(城) 안에 설치되어 적의 진영을 격파하고,

을 공격할 때에는 성벽을 무너뜨리는데 사용하였다.

또한 수군(水軍)의 거북선, 판옥선에 장착되어

적선을 격파하는데도 큰 성능을 발휘하였다.

특히 진주성 전투에서 사용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 포는 동차(童車)에 장착하여 사용하였는데,

길이 2.3m의 대장군전과 새알처럼 생긴 철환 100개를 발사할 수 있으며,

포의 사정거리는 900(1,136m)이다.

현재 두 점의 천자총통이 전해 오고 있는데,

그 중 한 점이 보물(寶物) 647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자총통(地字銃筒)

 

 

지자총통(地字銃筒)

지자총통(地字銃筒)은 조선 태종때부터 제작되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사용된 화포(火砲) 중에서 천자총통 다음으로 큰 화포이다.

이 포는 성(城) 안에 설치되어 적의 진영을 격파하고,

성을 공격할 때에는 성벽을 무너뜨리는데 사용하였다.

또한 수군(水軍)의 거북선, 판옥선에 장착되어

적선을 격파하는데도 큰 성능을 발휘하였다.

특히 진주성 전투에서 사용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 포는 동차(童車)에 장착하여 사용하였는데,

길이 1.8m의 장군전과 새알처럼 생긴 철환 200개를 발사할 수 있으며,

포의 사정거리는 800(1,009m)이.

현재 세 점의 지자총통이 전해오고 있는데,

두 점은 보물(寶物) 862 · 863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자총통(玄字銃筒)

 

 

현자총통(玄字銃筒)

현자총통(玄字銃筒)은 조선 태종 때부터 제작되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사용된 화포(火砲) 중에서 천자총통, 지자총통

다음으로 큰 화포이나 지자총통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이 포는 성(城) 안에 설치되어 적의 진영(陣營)을 격파하고,

성을 공격할 때에는 성벽을 무너뜨리는데 사용하였다.

또한 수군(水軍)의 거북선, 판옥선에 장착되어

적선을 격파하는데도 큰 성능을 발휘하였다.

특히 진주성 전투에서 사용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 포는 동차(童車)에 장착하여 사용하였는데,

길이 1.5m의 차대전과 새알처럼 생긴 철환 100개를 발사할 수 있으며,

포의 사정거리는 800(1,009m)이.

현재 다섯 점의 현자총통이 전해오고 있는데,

두 점은 보물(寶物) 885 · 1233호로 지정되어 있다.

 

 

 

 

 

 

 

 

 

 

 

 

 

 

 

 

 

 

 

 

 

 

 

 

 

 

 

 

 

 

 

공북문(拱北門)

공북문은 17세기 이후에 그려진 진주성도와 진주지도에 북쪽으로 나 있는 문입니다.

공북문의 공은 <손을 모아 가슴까지 들어 올려 공경한다.>는 뜻이고,

북은 <임금이 계시는 북쪽인 북두>를 뜻합니다.

따라서 공북문은 <북쪽에 계시는 임금님을 향해 두 손을 모아 공경의 뜻을 표한다.>

라는 의미를 가진 문입니다.

공북문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진주성의 실질적인 정문이며 주 출입문으로,

도청 격인 관찰사영과 경상도 우병영이 소재했던 진주성의 주된 문으로,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향해 절을 하고

고유(告由)하던 자리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충무공김시민장군상(忠武公金時敏將軍像)

 

 

 

 

충무공 김시민 장군(忠武公 金時敏 將軍)

청사에 빛나는 진주대첩을 쓰고 간 충무공 김시민 장군은

1554년 충남 천안 병천에서 지평(持平) 충갑(忠甲)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 1578년 무과에 급제,

훈련원 · 군기사(軍器寺) 판관(判官)을 거쳐 1591년 진주판관이 되었다.

 

1592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목사(牧使)가 병으로 죽자,

그 직을 대신하여 민심을 다독이고 성과 못을 수축하는 한편

무기를 정비하고 군사체제를 갖추어 사천 ·고성 · 진해 · 지례 ·

금산(金山) 등지에서 승전고(勝戰鼓)를 울리며 목사로 승진되었다.

 

그리하여 같은 해 105일 침공한 적의 2만 대군을

불과 3,800여 병력으로 6일 간의 공방전 끝에

크게 무찔러 이기니 곧 진주대첩이다.

그러나 이마에 적탄을 맞았다.

이어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상에서 나랏일을 근심하며 눈물짓다가

10월 18일 39세를 일기로 이곳 진주성에서 순절(殉節)하였다.

 

슬프다 !

군의 천수(天壽)가 꺾이지 않았던들

이듬해(계사, 癸巳) 6월 진주가 적의 손에 떨어졌을까.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추록된

영의정에 추증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 이에 만 사람의 뜻을 모아 장군상을 세움은 나라와

겨레를 있게 한 그 매운 충절을 만세에 전해 우러르고자 함이다.

20001 1

 

 

 

 

 

 

 

 

 

 

 

 

 

 

 

 

 

 

 

 

 

 

 

 

 

 

 

진주성 우물

이 우물은 진주성 내 우물 복원을 위한 발굴 조사에서 확인된 우물로서,

20139월에 복원되었다.

우물의 너비는 1.5m쯤이고 깊이는 8.4m인데,

더러운 물이 들어가지 못하게 둥근 모양의 둘레돌을 주변에 놓았다.

조선 후기 진주성도(晋州城圖, 국립진주박물관 간직)에는

지금 위치에 관청과 함께 세 곳에 우물() 표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진주성을 쌓은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우물로,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 때에는

식수 공급원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