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과 풍경

겨울 채비에 들어간 진주성3(2020.11.23. 월요일)

큰집사람 2020. 11. 23. 20:11

 

 

 

 

 

 

 

쌍충각

 

 

 

 

 

 

쌍충사적비(雙忠事跡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호)

이 비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義兵)을 모아 싸우다가 전사한

제말(諸沫) 장군과 그의 조카 제홍록(諸弘祿)의 공을 새겼다.

제말 장군은 징비록(懲毖錄)에 경상도(慶尙道) 고성(古城) 사람으로,

의병을 모아 싸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웅천(熊川) · 김해(金海) · 의령(宜寧) 등지에서 왜적과 세워서

전공을 세워 곽재우(郭再祐) 장군과 함께 그 공적이 조정에 알려져

성주목사(星州牧使)에 임명되었으나 성주싸움에서 전사했다.

 

조카 제홍록은 숙부를 따라 공을 세운 후

이순신(李舜臣) 장군(將軍) 휘하에서 있다가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전사하였다.

정조 16(1792) 왕은 이들의 충의(忠義)를 기리어

이조판서(吏曹判書) 서유린(徐有隣)에 명하여

비문(碑文)을 지어 쌍충각(雙忠閣)을 촉석루 옆에 세웠다.

일제(日帝) 때 일본 관헌들에 의해 비각이 헐리고 비가 방치되었던 것을

1961년 지금 자리에 다시 옮겨 세웠다.

 

 

 

 

 

 

 

 

 

 

 

 

 

 

 

 

 

 

 

 

 

 

 

 

 

 

 

 

 

 

 

 

 

 

 

진주성 성도(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 소장) 

 

 

 

 

 

 

 

 

 

 

 

 

 

 

촉석문(矗石門)

 

 

 

 

 

 

촉석루(矗石樓)

 

 

촉석루(矗石樓,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호)

촉석루는 진주의 상징으로 영남 제일의 명승으로 꼽힌다.

이곳은 고려 고종 28(1241) 진주 목사 김지대(金之岱, 1190 ~ 1266)

창건한 이후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고쳐 지었다.

전쟁 때는 장수의 지휘소로 쓰였고,

평상 시에는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명소였다.

촉석루는 강가에 바위가 우뚝우뚝 솟아 있다고 하는 데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으며,

일명 남장대(南將臺) 또는 장원루(壯元樓)라 부르기도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10(1618) 병사 남이홍(南以烘, 1576 ~ 1627)

전보다 웅장한 건물로 고쳐 지어 1948년에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1950년에 6 ·25전쟁으로 불탔다.

 

지금의 건물은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가

국비, 도비, 시비와 시민의 성금으로 고쳐 지은 것으로,

건물의 구조는 정면 5, 측면 4칸의 팔작지붕 형태로 되어 있다.

예로부터 남()으로는 진주 촉석루,

()으로는 평양 부벽루(浮壁樓)라 할 만큼 풍광이 아름다워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글과 그림이 전해져 오고 있다.

현재 촉석루에는 하륜(河崙, 1347 ~ 1416)

촉석루기(矗石樓記)를 비롯한 많은 글이 걸려 있다.

 

 

 

 

 

진주에서 지어진 최초의 시

尙州牧伯崔學士滋(金之岱)

去歲江樓餞我行 今年公亦到黃堂 曾爲管記顔如玉 復作遨頭鬂未霜

洛邑溪山雖洞府 晉陽風月亦仙鄕 兩州歸路閒何許 一寸離懷久已傷

欲把琴書尋舊要 况看簾幙報新涼 嗟公虛負中秋約 更約重陽飮菊香

 

이 시는 고려조 고종 28(1241)에 진주목사 김지대(金之岱 : 1190 - 1266)

상주목사 최자(崔滋 : 1188 - 1260)에게 보낸 우정 어린 통신문이다.

그는 이 시에서

<작년에는 강루(江樓)에서 진주로 떠나는 나를 배웅하더니,

금년에는 그대도 목사(牧使)가 되었구려.

전에는 그대의 얼굴이 옥같이 고왔지.

우리 더 늙기 전에 다시 한 번 놀아 봄세.

낙읍(상주의 옛 이름)의 계산(溪山 : 지명)이 비록 좋기는 하나,

그래도 진양의 풍월이 선향(仙鄕)이라네.

두 고을은 길이 멀어 만나기 어려우니,

잠시 한 번 헤어지면 이별의 아쉬움이 오래 가지.

거문고 책 뒤져 좋은 옛 노래 찾아,

가을에 염막(簾幕)에서 놀아 봄이 어떠랴.

추석에 만나자는 약속은 어겨졌으니,

이번 중양절에 국향주(菊香酒)를 마시려 다시 약속함세.>라고 하여,

상주와 진주를 <신선의 고을>이라고 함께 예찬하였다.

이것이 진주에서 지어진 최초의 시이다.

이 시는 <동문선, 東文選>에 실려 있다.

 

 

 

진주를 예찬한 최초의 시문

진주의 아름다운 산천은 영남에서 제일이다.

(진양계산승치 영남제일, 晋陽溪山勝致 嶺南第一)

 

이 글은 고려조 명종 때의 문신 이인로(李仁老 : 1152 - 1220)가

그의 <파한집>에서 한 말이다.

그는 명종 10년(1180)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무신정권의 횡포가 심해지자 뜻을 버리고 문학으로써 생을 찾으러 했던 분이다.

고려조 죽고칠현(竹高七賢)의 한 분으로 불린다.

 

촉석루 북쪽 현판

송하(松下) 조윤형(曺允亨, 1725 - 1799) 선생의 작품이고

 

남장대(南將臺) 현판

은초 정명수(隱樵 鄭命壽, 1909 - 2001) 선생이 1960년에 쓴 작품이고

 

영남제일형승(嶺南第一形勝)

영남에서 제일가는 경관을 자랑한다는 뜻으로,

청남 오제봉(菁南 吳濟峯, 1908 - 1991) 선생의 작품이고

 

촉석루 남쪽 현판

원래는 이승만(李承晩, 1875 - 1965) 대통령(大統領)의 것이었으나,

민주당이 집권하면서 그 판을 깎아 유당(惟堂) 정현복(鄭鉉福, 1909 - 1973) 선생의 글씨로 바뀌었고

 

 

 

 

 

 

 

 

 

 

 

 

 

 

 

 

 

 

 

 

 

 

 

 

 

 

 

 

 

 

 

 

 

의랑 논개의 비

하나인 것이 동시에 둘일 수 없는 것이면서

민족의 가슴팍에 살아 있는 논개의 이름은 백도 천도 만도 넘는다.

마지막 그 시간까지 원수와 더불어 노래하며 춤추었고

그를 껴안고 죽어 간 입술은 앵두보다 붉고

서리 맺힌 눈썹이 반달보다 고왔던 것은

한갓 기생으로서가 아니라

민족의 가슴에 영원토록 남을 처녀의 자태였으며

만 사람의 노래와 춤으로 보답 받을 위대한 여왕으로서다.

 

민족 역사의 산과 들에 높고 낮은 권세의 왕들 무덤이

오늘날 우리와 상관이 없으면서

한 줄기 푸른 물과 한 덩이 하얀 바위가

삼백 예순 해를 지날수록

민족의 가슴 깊이 한결 푸르고 고운 까닭이란

그를 사랑하고 숭모하는 뜻이다.

 

썩은 벼슬아치들이 외람되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민족을 고달피고 나라를 망친 허물과

표독한 오랑캐의 무리가 어진 민족을 노략하므로

식어진 어미의 젖꼭지에 매달려 애기들을 울린 저주를 넘어

죽어서 오히려 사는 이치와

하나를 바쳐 모두를 얻는 도리를 증명한 그를 보면 그만이다.

 

피란 매양 물보다 진한 것이 아니어

무고히 흘려진 그 옛날 민족의 피는

어즈버 진양성 터에 풀거름이 되고 말아도

불로한 처녀 논개의 푸른 머리카락을 빗겨

남가람이 천추로 푸르러 굽이치며 흐름을 보라.

 

애오라지 민족의 처녀에게 드리고 싶은

민족의 사랑만은 강물따라 흐르는 것이 아니기에,

아아 어느 날 조국의 다사로운 금잔디 밭으로

물옷 벗어 들고 거닐어 오실 당신을 위하여

여기에 비를 하나 세운다.

* 파성 설창수(巴城 薛昌洙, 1916 - 1998) 선생의 글이고

 

의기사(義妓祠,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호)

의기사는 임진왜란 당시(1593)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의 영정과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논개는 진주성이 함락되자 성민과 나라의 원한을 갚기 위하여

왜장(倭將)을 촉석루 아래 의암(義巖)으로 유인한 후

함께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다.

의기사는 그 의로운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영조(英祖) 16(1740)에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 1688 - 1742)

창건한 아래 두차례에 걸쳐 중건하였으며,

지금의 건물은 1956년 의기창열회(義妓彰烈會)가 시민의 성금을 모아 중건한 것이다.

건물구조는 정면 3, 측면 2, 맞배 지붕의 기와집이다.

 

지수문(指水門)

 

 

 

 

의기사(義妓祠)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1593년)에서 진주성이 함락되자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한 의기(義妓) 논개(論介)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으로,

1740년(영조 16년)에 경사우병사 남덕하(南德夏)가 건립하였으며,

1779년(정조 3년) 우병사 홍화보(洪和輔)는 의기사를 보수하였다.

1823년(순조 23년)에 목사 홍백순(洪百淳)이 새로 세우고,

경상도관찰사 이지연(李止淵)의 글씨로 <의기사, 義妓祠>라는 현판을 게시하였다.

1868년(고종 5년) 목사 정현석(鄭顯奭)은 의기사를 보수하였으며,

1956년 진주의기창열회(晋州義妓彰烈會)에서 진주 시민의 성금으로 재건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기와집이다.

 

 

 

 

 

 

 

 

 

윤여환 논개 영정

문화체육관광부는 충남대학교 윤여환 교수의

논개 그림을 국가표준영정 제79호로 지정하였다.

진주시는 표준영정 원본을 진주박물관에 보관하고,

사본을 의기사에 봉안해 일반인들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원래 의기사에는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 - 1979)

그린 <미인도 논개>의 복사본이 걸려 있었으나,

고증이 잘못된 데다 김은호가 대표적인 친일화가라는 점이 지적되었다.

2005510일 진주 지역 시민단체가 의기사에 봉안되어 있던

김은호의 논개 그림을 강제로 뜯어내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따라 논개의 출생지인 전북 장수군과 순국지인 경남 진주시가

공동으로 표준영정 제작에 합의해 전국에 걸쳐 공모를 하였으며,

윤여환(尹汝煥, 1953.7.7. - ) 교수의 그림이 표준영정으로 채택되었고,

2008년 5월 23일 의기사에서 논개 영정 봉안식을 가졌다.

 

이당 김은호 논개 영정(2005.5.10 철거)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

 

 

의암사적비(義巖事蹟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53)

 

의암사적비는 선조 26(1593) 629

임진왜란(壬辰倭亂) 2차 진주성(晉州城)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어 7만 민 · · ( · · )이 순절(殉節)하자

왜장을 끌어 안고 순국한 의기 논개(義妓 論介)의 사적(事蹟)을 기록한 비석이다.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의해 논개(論介)의 순국 사실이 널리 알려지자,

진주의 사민(士民)들은 정식(鄭拭, 1683 - 1746)이 지은 비문(碑文)으로 비를 세웠고,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남덕하(南德夏, 1688 - 1742)가 비각을 세워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이 비()는 아래의 의암(義巖)과 마주하고 있어

의기 논개(義妓 論介)의 순국정신을 한층 더 흠모(欽慕)하게 하고 있으며,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새겨져 있다.

 

<그 바위 홀로 서 있고 그 여인 우뚝 서 있네.

이 바위 아닌들 그 여인 어찌 죽을 곳을 찾았겠으며,

이 여인 아닌들 그 바위 어찌 의롭다는 소리 들었으리요.

남강의 높은 바위 꽃다운 그 이름 만고에 전하리.>

 

 

 

義巖(의암)

義巖(의암)은 논개(論介)가 왜장(倭將)을 끌어안고 순국(殉國)한 바위다.
조선(朝鮮) 선조(宣祖) 26년(1593) 6월 29일 임진왜란(壬辰倭亂)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진주성(晋州城)이 함락(陷落)되고 7만 민(民) · 관(官) · 군(軍)이 순절(殉節)하자,

논개(論介)는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장을 의암(義巖)으로 유인하여 이 바위에서 순국하였다.

 

이에 논개(論介)의 순국정신(殉國精神)을 기리기 위해 영남(嶺南)사람들은
이 바위를 의암(義巖)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인조 7년(1629) 진주의 선비 鄭大隆(정대륭, 1599 - 1661)은

바위의 서쪽 벽면(壁面)에는 전서체로 義巖(의암)이라는 글을 새겼고,

남쪽 벽면(壁面)에는 韓夢參(한몽삼, 1598 - 1662)이 쓴 것으로 전하는

해서체로 된 義巖(의암)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義巖(의암) 바닥 넓이는 3.5m X 3.3m이다.

 

 

 

 

 

 

 

 

 

 

 

 

 

 

 

 

 

 

 

 

 

 

 

 

 

 

 

 

 

 

 

 

 

 

 

촉석루중삼장사기실비(矗石樓中三壯士記實碑)

선조 임진년 5월에 문충공 학봉 김성일은 영남초유사로 진양성에

다다라 충의공 대소헌 조종도와 정의공 송암 이로와 함께 촉석루에 오르다.

때는 왜란으로 강토에 선지피 낭자하니

벼슬아치는 모두 달아나고 군사와 백성은 흩어졌다.

성안은 비어 괴괴하고 강물만 예대로 아득히 흐르는데

멀리 눈을 들어 조국의 산하를 바라보니 오직 슬프고 분함에 마음 저려

조공과 이공은 초유사 김공의 손을 잡고 삶이 차라리 욕되도다.

강물에 몸을 던져 한을 씻자 하였으나,

학봉은 짐짓 잠시의 괴롬을 잊을 뿐이라며 한은 천추에 씻지 못하리니

오직 한 번 뿐인 장부의 죽음을 허술히 하랴.

여기 푸른 물굽이 상기 뜻있어 흐르거늘 남은 목숨은 더욱 원수 앞에 질기리니,

이 유서 있는 터전을 지켜 나라에 갚으리라.

분연히 맹세하여 술 한잔 높이 들고 시 한 수를 읊으니

<촉석루 삼장사는 잔을 들고 굽어볼 제 뜻있어 흐르는 물 웃는 가슴 미어지다.

세월도 강물이거니 넋은 길이 남으리라.>

이 시는 뒤에 순찰사로 부임한 오공숙이 현판에 새겨 높이 달으니,

이로써 이 사실이 세상에 널리 알린 바 되어 후인들이 일컬어 촉석루 삼장사라 하였다.

세 현자의 자세한 내력은 각기 그 문집과 사승(私乘 : 개인적인 기록)에 남았으니,

여기 다만 이 한 가지 사실만을 돌에 새겨서 촉석루 곁에 세우고

지나는 나그네로 하여금 발을 멈추게 하니,

이는 지금을 거슬러 삼백 예순 아홉 해인 임진년의 일이니다.
최재호 새기고, 허민 씀

 

 

 

*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판서에 추증된 김성일(金誠一, 1538 - 1593)

조종도(趙宗道, 1537 - 1597), 이조판서에 추증된 이로(李魯, 1544 - 1598)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로,

삼장사에 대한 기록이 문헌마다 달라 국사편찬위원회의

유권해석과 경상남도지사의 허가를 받아 1963년에 세웠으며,

비문은 중재(重齋) 김황(金榥, 1896 - 1978)이 1960년에

찬(撰 : 시가나 문장 중에서 잘된 것을 골라 모아 엮다)하였다.

 

 

 

 

* 촉석루(矗石樓) 삼장사(三壯士) 시(詩)

 

矗石樓中三壯士(촉석루중삼장사)
촉석루 위 마주앉은 세 장사들은

一杯笑指長江水(일배소지장강수)
한잔 술로 웃으면서 남강물을 가리키네

長江之水流滔滔(장강지수유도도)
남강물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흘러가니
波不渴兮魂不死(파불갈해혼불사)
강물이 마르지 않는 한 넋도 없어지지 않으리

 

촉석문

 

 

 

 

진주성(晋州城, 사적 제118호)

진주성은 외적을 막기 위하여 삼국시대부터 조성한 성으로,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깃든 유서 깊은 곳이다.

고려 말 우왕 5(1379)에 목사 김중광이 왜구의 잦은

침범에 대비하여 본래의 토성이었던 것을 석성으로 고쳐 쌓았으며,

임진왜란 직후에는 성의 중앙에 남북으로 내성을 쌓았다.

 

선조 25(1592) 10월 왜군 2만여 명이 침략해 오자 ,

김시민(金時敏) 장군이 이끄는 38백여 명의 군사와 성민이 힘을 합쳐 물리쳤으니,

이것이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이다.

이듬해 6월에는 왜군 10만여 명이 다시 침략했고,

민간인과 관료, 군인 등 7만여 명이 이에 맞서 싸우다

모두 순절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1972년에는 촉석문을 복원하였고,

1975년에는 일제 강점기에 허물어졌던 서쪽 외성의 일부와 내성의 성곽을 복원하였다.

1979년부터는 성 안팎의 민가를 모두 철거하는 등 진주성 정화사업을 시작하여,

2002년에 공북문 복원공사를 마지막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성곽의 둘레는 1,760m이고 높이는 5 ~ 8m이며,

성 안에는 촉석루, 의기사, 영남포정사, 북장대, 창렬사,

호국사, 서장대, 임진대첩계사순의단, 국립진주박물관 등이 있다.

 

 

 

 

 

 

 

논개(論介) - 수주 변영로(樹州 卞榮魯)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石榴)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공북문

 

 

 

 

김해김씨비각(金海金氏碑閣)

 

 

김해김씨비각(金海金氏碑閣,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5호),

비각이 있는 이곳은 하동(河東)으로 가는 길목으로 <빗집거리>라고 부른다.

그것은 이곳에 서 있는 비각(碑閣)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다.

비각에는 고종 때에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김상현(金尙鉉, 1811 - 1890)의

정부인(貞夫人) 연안(延安) 차씨(車氏)와 그의 아들인 김정식(金正植)의

은혜를 추모하여 세운 <시혜불망비, 施惠不忘碑> 2기가 가지런히 서 있다.

<시혜불망비>란 누군가가 베푼 은혜를 잊지 않고자 세운 일종의 송덕비(頌德碑)이다.

이 비는 당시 진주성 안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질병(疾病) 등의 재난을 당했을 때

위의 두 사람이 자신들의 재산을 털어 지극한 정성으로 사람들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지역민들이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오래도록 기리기 위해 1905년과 1907년에 세웠다고 한다.

이 비각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다포계(多包系) 팔작(八作) 지붕의 건물이다.

또 작은 비각임에도 처마를 이중으로 연출하여 처마를 길게 받치도록 했고,

네 모퉁이에 8각의 처마 받침기둥(활주, 活柱)을 세우는 등,

전체적으로 화려하게 조성되어 비석보다 오히려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