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권 산행기

산청 왕산

큰집사람 2021. 9. 12. 20:37

 

 

 

 

* 날     짜 : 2021년 9월 12일(일요일)

* 날     씨 : 구름 많음

* 산  행 지 : 구형왕릉주차장 - 구형왕릉 - 류의태약수터 - 평전샘 - 왕산 - 소왕산 - 망바위 - 망경대 - 구형왕릉주차장

* 산행시간 : 4시간 50분(운행시간 2시간 42분 + 휴식시간 2시간 08분)

* 산행속도 : 보통 걸음 

* 산행인원 : 1명(나 홀로)

 

 

 

 

 

* 산행일정

10:10           구형왕릉주차장(240m)

10:14           구형왕릉

10:17           망경대 - 류의태약수터 갈림길

10:24 - 10:29  구형왕릉주차장 - 쌍재 임도와 만나는 사거리

10:30           동의보감 둘레길 만나는 임도 삼거리

10:31           구형왕릉 갈림길(지능선)

10:41 - 10:50  류의태약수터 입구(왕산사 부도탑 연기비)

10:52 - 11:00  산청 왕산사지(수정궁터)

11:04 - 11:11  류의태약수터

11:18           쉼터

11:41 - 12:05  평전샘 사거리

12:21           주능선 삼거리(평전샘 갈림길)      

12:24 - 12:50  왕산(925.6m)

12:53           주능선 삼거리(평전샘 갈림길)    

12:58           바람재 삼거리

12:59 - 13:10  소나무 쉼터(909.5m)

13:13 - 13:19  소왕산(905.8m)

13:25 - 13:40  망바위(905.3m)

13:46           망바위 갈림길(동의보감촌 갈림길)

14:02 - 14:15  망경대

14:22           류의태약수터 갈림길

14:40 - 14:44  동의보감촌 둘레길과 만나는 사거리

14:45           구형왕릉주차장 - 쌍재 임도와 만나는 사거리

15:00           구형왕릉주차장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구형왕릉주차장

 

 

 

 

 

 

 

 

 

 

 

 

 

 

가락국구형왕신도비(駕洛國仇衡王神道碑)

 

 

신라태대각간순충장열 흥무왕김유신사대비(新羅太大角干純忠壯烈 與武王金庾信射臺碑)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구형왕릉주차장에서 구형왕릉으로 올라가는 길가에 있으며,

김유신이 어린 시절 자신의 증조부인 가락국 구형왕의 무덤 앞에서

수 년 간 시묘살이를 하며 활쏘기를 연마했던 곳이라 한다.

 

 

 

삼거리,

콘크리트 포장임도는 내려올 때의 몫으로 돌리고 구형왕릉으로 올라가고 

 

 

 

류의태약수터

류의태약수터에 얽힌 전설이나 설화로는

류의태 자신이 고치지 못하는 불치의 난치병도

"천인수(千蚓水)" (만인수, 萬蚓水)라고도 함)를 먹어 고쳤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신의 류의태의 가르침 속에 무릇 물에는 서른세 가지 종류가 있고 그 약효가 달라,

의원은 약효를 내는데 물을 가려 써야 한다며 물 중에 정화수(井華水)에 이어 두 번째로 치는

여름에 차고 겨울에 온(溫)한 "한천수(寒天水)"로 장복하면 반위(反胃:胃癌)를

다스린다는 물로 왕산의 약수가 이에 해당한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눈이 내린 한겨울에도 왕산의 약수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맛이 참으로 좋은 것을 느낄수 있다.

류의태 선생 활동 시 한약 제조에 사용되었던 샘터(일명:약물통)의 약수는

돌너덜 아래 자리 잡은 서출동류수(西出東流水)로,

위장병과 피부병 등 불치병 치료에 효험이 있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즐겨 애용하는 곳이다.

 

류의태 선생은 경남 산청군 신안면 하정리 상정(옛지명:産陰縣 丁台)

마을에서 출생하여 당대 제일의 하늘이 내린 신의(神醫)로 칭송 받았다.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편술하여 의성(醫聖)으로 칭송 받은 허준의 의학적 재질과 지식을 키워준 스승이며,

특히 의술의 발전을 취해 허준에게 자신의 몸을 해부용으로 제공하여

해부학의 효시를 이룬 살신 성인의 위대한 의학자로 전해진다.

 

* "천년 두골에 천인수(千年 頭骨에 千蚓水)"는 천년 묵은 사람의 해골에 담긴 천년된 물을 이르며,

                만년된 물을 만인수(萬蚓水)라 함 

 

 

 

 

 

산청(山淸)의 왕산(王山)

산청 방장산(지리산) 중 왕산은 장대한 지리산 자락의 동북쪽 끝으로,

가락국 시조대왕 김수로(駕洛國 始祖大王 金首露)의 태왕궁지(太王宮址)이다.

서기 162년 김수로대왕은 첫 번째 왕자인 거등(居登)에게 나라를 양위하고,

가락지품천 방장산 자락에 별궁을 짓고 태후와 함께 이거하여 왕의 호를 보주황태왕(普州皇太王),

왕후를 보주황태후(普州皇太后)로, 궁은 태왕궁(太王宮)으로, 산은 태왕산(太王山)으로 명명하셨다.

대왕께서는 태양원군으로 38년 간 계시다가 기묘년 3월 23일에 서거하셨다.

330여 년이 흐른 후 서기 532년 가락국의 마지막 10대 양왕(구형왕)께서 시조대왕의 태왕산으로 들어오셨다.

가락 지품천 태왕산은 구형왕(仇衡王)께서 이거한 당시에도

수정같이 맑은 물이 샘솟고 있어 궁궐 이름을 수정궁(水晶宮)이라 편액하고

수년 간 은거하다가 붕어하시니 존호를 양(讓)이라 하였다.

훗날 흥무대왕김유신대장군은 이곳에 사당을 지어 7년 동안 시능을 하였으며,

활쏘기와 무예를 연마하여 삼국통일의 바탕을 이루는 호연지기의 기상을 닦았고,

왕의 5대 외손 신라 제30대 문무대왕(휘: 법민)은 제향을 받드는 비용으로 왕산 일대 토지를 하사하셨다.

왕산심릉기(王山尋陵記)에 의하면 "산양현 서쪽 모퉁이 방장산 동쪽 기슭에 산이 있고 절이 있는데,

위에는 왕대가 있고 아래에는 왕릉이 있다.

무릇 릉은 가락국 10대 구형왕의 능침이고,

태자 대각간 서현(舒玄)과 증손 대장군 유신(庾信)이 왕대에 시조대왕의 묘우(廟宇)를 추봉하고,

이 절에 구형왕사를 세워 왕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삼았다.

왕산이라 지명한 것은 이 사적에서 비롯되었다." 라고 기록 되어 있다.

가락국 태왕산에서 유래가 되어 '왕산'으로 불리어지고 있는 산청의 왕산은,

가락국 시조(김수로대왕)의 사적이 있고,

양왕(구형왕)과 흥무대왕(김유신대장군)의 역사가 깃든 "가락국 삼왕의 고적지" 이다.

 

*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한 가락국의 영토는 "동으로 황산강이요,

서남으로 창해에 이르고, 서북으로 지리산 끝까지를,

동북으로 가야산을 경계로 두고 국호를 대가락이라 하였다." 라고 되어 있다.

 

* 현치연혁(縣治沿革)에서 "산청은 옛 변한(弁韓) 땅 가락지품천(駕洛知品川)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산양현(山陽縣)으로 고치고,

고려 말에 산음현(山陰縣), 조선시대 영조는 산청현(山淸縣)으로 바꾸었는데,

날엔 왕산(王山) 아래 금계(錦溪)의 위에 있었고,

조선시대에 와서 회계(會稽) 아래 경호(鏡湖) 위로 옮겼다." 하고,

 "왕산의 옛 이름은 방장산(方丈山) 중 가락(駕洛) 태왕산(太王山)으로 고려시대에는 모락산(帽落山),

조선시대에는 왕산(王山)으로 불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구형왕릉

 

 

 

 

자료사진

 

 

자료사진,

지금은 사라지고 없고 

 

 

 

 

 

개울가 삼거리,

망경대와 류의태약수터로 길이 나뉘는 곳인데,

개울을 건너 지능선으로 붙어 오르는 게 류의태약수터로 이어지는 길이지만,

망경대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임도로 올라서서 류의태약수터로 가기로 하고  

 

 

 

 

 

구형왕릉주차장과 쌍재로 이어지는 임도와 만나는 사거리 이정표,

구형왕릉주차장 1.10km·구형왕릉 0.49km·망경대 1.07km·왕산 정상 3.06km·필봉산 정상 4.21km요,

동의보감 둘레길을 따라가는 류의태약수터는 0.93km를 가리키는데,

망경대로 이어지는 길은 내려올 때의 몫으로 돌리고,

류의태약수터와 평전샘을 경유하여 왕산 정상으로 올라가기로 하고  

 

동의보감 둘레길 합류 삼거리 이정표,

구형왕릉 0.54km·동의보감촌 4.60km·류의태약수터 0.94km·쌍재 5.67km를 가리키고

 

 

 

 

 

아래쪽은 구형왕릉주차장으로 이어지는 포장임도요,

위쪽은 동의보감촌으로 이어지는 포장임도이고 

 

지능선 갈림길 이정표,

아까 지나온 개울가 이정표로 이어지는 길이고 

 

류의태약수터로 이어지는 계곡이고

 

 

류의태약수터 입구,

잠깐이나마 함께한 동의보감 둘레길과 헤어지게 되는데,

바로 위엔 왕산사 부도탑 연기비가 자리 잡고 있으며,

구형왕릉 1.18km·쌍재 5.03km·산청 왕산사지 120m·류의태약수터 0.30km·

왕산 정상 2.38km·필봉산 정상 3.23km를 가리키고 

 

 

 

 

 

왕산사 부도탑 연기비

 

 

 

 

왕산사 부도탑 연기비(王山寺 浮圖塔 緣起碑)

석실 명안대사(石室 明眼大師, 1646~1719)

조선 후기 승려(僧侶), 호(號) 석실(石室) 또는 설암(雪巖), 자(字) 백우(百愚), 속성(俗姓)은 장씨(張氏),

진주 출생, 1657년(효종 8년) 12세 지리산 덕산사(德山寺) 성각(性覺)에게 출가(出家),

1690년(숙종 16년) 가을 지리산 대원사(大源寺)에서 화엄경(華嚴經) 입법계품(入法界品) 판각하였고,

1705년(숙종 31년) 가을 심경약소연주기(心經略疏連珠記)를 감로암(甘露庵) 약사전(藥師殿)에서 편찬함.

그리고 교를 4교로 나누어 소승교(小乘敎), 통교(通敎), 별교(別敎), 원교(圓敎)를 교판했다.

문집 백우집(百愚集)에 염불가(念佛歌)가 전해지고 있으며, 

문인들이 유고집(遺稿集)을 모아 편찬한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백우수필(百愚隨筆),

동사열전(東師列傳) 등이 있다.

1709년(숙종 35년) 지리산 칠불사(七佛寺)에서 주석(駐錫) 70여 명의 승려를 모아 서방도량(西方道場)을 결성,

이 해 겨울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왕산사(王山寺)로 옮겨 이듬해 1710년 4월 13일 세수(世壽) 64세,

법랍(法臘) 52년으로 입적(入寂)하였다.

2004년 12월부터 2005년 5월까지 김해인제대학교 가야문화연구소에서 왕산사지 자료조사를 의뢰,

유물과 함께 설암당 명안대사 부도와 왕산사계곡으로 유출되었던 선사스님들의 부도를 발견하여

왕산사지의 실체를 입증하게 되어 옛터에 이운(移運)하게 되었다.

 

왕산사(王山寺) 내력

왕산사는 가락국 시조 김수로대왕의 옛 궁터로,

왕께서 등극한 지 121년에 태자 거등에게 양위하시고,

지품천 방장산 별궁으로 이거하여 자호를 '보주황태왕' 왕후를 '보주황태후'라 하고,

산을 '태왕산'이라 궁을 '태왕궁'이라 하였다.

이곳에서 수정 샘물을 마시며 휴양을 했으며,

가뭄에도 맑은 샘물이 변함이 없으니 훗날 수정궁으로 편액하였다.

 

10대 구형왕(신라 법흥왕 19년)에 이르러

'백성을 기르는 토지로서 백성을 해함은 인자로서 할 일이 아니다.'

하시며 양민지도의 덕성으로써 나라를 양위하고,

계화왕후와 함께 지품천 방장산 동쪽 건좌의 유허 수정궁에 은거하시다 승하하시니,

관민이 석릉으로 모셨다.

구형왕(시호 양)은 가락국 시조 김수로대왕의 9세손으로 노종, 무력, 무득 세 아드님을 두셨다. 

훗날 왕손 신라 각간 서현이 수정궁을 왕산사로 삼고, 왕증손 흥무대왕 김유신이 수로왕묘를 왕대에 추봉하고,

구형왕사를 건립하여 선대의 명로를 빌고 향화를 받드는 원찰로 삼았으며,

외증손 법민(문무왕, 661~681)은 납전 30결을 내려 향사를 지내게 하였다.

또한 대장군 김유신이 7년 동안 시능하면서 대를 삼아 무예를 익혔던 까닭에 태각간 김유신 시사대가 있다.

살펴보건대, 왕산사의 전기는 신증동국여지승람(1539년) 등에 구형왕릉과 왕대암이 함께 기록되어 있고,

조선 후기의 승려 탄영(1857~1929년)이 찬한 왕산사기에서 그 사실이 있다.

천여 년의 긴 역사를 잠신했던 구형왕과 왕산사의 황금빛 잔해는 용솟음치고,

서광서린 방광은 천만리를 비추고 훈훈한 동풍이 삼라만상을 침묵 속에서 깨어나게 하니,

연기의 법이 더욱 숭고하고 아름답게 승화할 것이다.

아울러 예와 덕을 숭상하는 군자들에는 참고하는 바를 두고자

연기비를 세움으로 영원히 꺼지지 않을 진여의 불씨를 남긴다.

 

서기2016년(가락기원 1975년) 1월

가락국양왕릉 덕양전 참봉 김태훈

 

 

 

산청 왕산사지 갈림길,

왕산사지는 등산로와 가까이 붙어 있고 

 

 

 

산청 왕산사(山淸 王山寺址)

구형왕릉(仇衡王陵)에서 약1㎞ 떨어진 산중턱에 왕산사라고 전하는 절터가 있다.

왕산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하는 것이 없어 그 연혁을 알 수 없다.

다만 탄영(坦瑛)이라는 스님이 쓴 「왕산사기」(王山寺記)에 의하면

이 절터가 가락국의 구형왕(521~532 재위)과 관계가 있는 듯하다.

 

기록에 따르면 “산양현(山陽縣)의 서쪽 모퉁이,

방문산(方文山)의 동쪽 산록에 산이 있는데, 왕산이라고 부른다.

산 위에 왕대(王臺)가 있고, 아래에 왕릉이 있기 때문에 왕산이라고 한다.

 

능묘를 수호하였기 때문에 왕사(王寺)라고 하였는데, 절은 원래 왕산의 정궁이었다.

능은 곧 가락국 10대왕인 구형왕이 자리 잡았던 현궁(玄宮)이었다.”라고 한다.

절터 안에는 현재 4개소 건물터를 확인할 수 있는데,

초석을 비롯하여 돌담, 축대, 우물, 비를 세웠던 받침돌, 부도 등이 남아 있다.

많은 양의 기와 조각 및 그릇 조각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절의 규모가 상당히 컸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류의태약수터 삼거리,

119 왕산 1지점(류의태약수터 입구)이기도 하며,

바로 위에 자리 잡은 약수터를 지나 망경대와 망바위로 올라가도 되지만,

약수터를 둘러보고 돌아나와 쉼터와 평전샘을 경유하여 왕산 정상으로 올라가기로 하는데, 

약수터 0.02km·망경대 1.1km·구형왕릉 1.4km·쉼터 0.3km·왕산 정상 2.9km를 가리키고 

 

 

 

 

 

류의태약수터

 

 

 

 

류의태약수터 유래(자료사진)

류의태 선생은 1516년(중종 11년) 산청군 신안면 상정마을에서 출생하여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저자 허준 선생의 스승으로,

당대(조선 중기) 최고의 신의(神醫)로 알려져 있으며,

선생의 몸을 제자 허준에게 시술토록 하여 해부의학(解部醫學)의 효시를 이룬

살신성인의 의술가(醫術家)이시다.

류의태 선생은 산청군(당시 산음현) 금서면 화계지구에서 의술활동(醫術活動)을 하였으며,

왕산의 자생약초에 본 약수터의 물로 탕액(湯液)을 조제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본 약수는 돌너덜 아래의 서출동류수(西出東流水)

위장병과 피부병 등 불치병 치료에 효험이 있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즐겨 마시고 있다

 

 

 

망경대로 이어지는 길이고

 

 

다시 돌아온 류의태약수터 삼거리,

이제 쉼터와 평전샘을 경유하여 왕산 정상으로 올라가고

 

쉼터,

평전샘 1.6km·왕산 정상 2.6km·약수터 0.32km·구형왕릉 1.7km를 가리키는데,

곳곳에 설치된 이정표끼리 서로 거리가 맞지 않은 걸?  

 

 

 

 

 

평전샘 사거리,

119 왕산 2지점이요,

상사폭포 및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 갈림길이기도 한데,

평전샘은 왕산 지름길 쪽으로 30m 남짓 떨어져 있으며,

바람재를 경유하는 우회로 아닌 지름길을 따라 왕산으로 올라가기로,

(바람재 경유) 왕산 정상 0.98km·필봉산 정상 2.13km·(평전샘 경유) 왕산 정상 0.72km·필봉산 정상 1.87km·

류의태약수터 1.10km·구형왕릉 2.62km를 가리키고 

 

 

 

 

 

 

 

 

 

 

 

 

 

자료사진(바람재 경유)

 

 

자료사진(평전샘 경유)

 

 

평전샘,

토마토와 우유로 요기를 하고 왕산으로 올라가고

 

덩그러니 기둥만 서 있고

 

 

왕산과 소왕산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으로 올라선 삼거리,

평전샘 갈림길이라고나 할까,

왕산 정상 0.15km·필봉산 정상 1.3km·(지름길) 평전샘 0.67km·류의태약수터 1.78km·

(바람재 경유) 평전샘 0.83km·망바위 0.86km를 가리키고 

 

 

 

왕산 정상,

삼각점(산청 21)이 자리 잡고 있으며,

필봉산 정상 1.15km·쌍재(큰재) 1.50km·(바람재 경유) 류의태약수터 2.08km·

구형왕릉 3.60km·망경대 1.99km를 가리키는데,

오늘은 왕산 일대 탐방이 목적이기에 필봉산은 가지 않기로 하고선,

소왕산과 망바위로 가고자 왕산에서 되돌아서고

 

 

 

 

 

 

 

왕산 정상석,

산청군에서 기존에 있던 정상석(923.2m)의 높이를 수정하여

2020년 11월 15일  필봉산(858.2m) 및 황매산(1113.1m)과 함께 다시 세웠다 하고 

 

함양 독바위

 

 

천왕봉과 중봉을 비롯한 지리산 일대

 

 

 

 

달뜨기능선과 동부능선

 

 

동왕등재(깃대봉)

 

 

 

 

웅석봉과 도토리봉

 

 

 

 

십자봉과 웅석봉

 

 

 

 

 

 

필봉산,

그 뒤엔 정수산과 둔철산이고 

 

황매산 일대

 

 

 

 

 

 

아까 평전샘에서 지름길로 올라선 주능선 삼거리,

평전샘 갈림길이라고나 할까?

 

바람재 이정표,

30m쯤 떨어진 곳에 소나무 쉼터가 마련되어 있으며,

왕산 정상 0.48km·필봉산 정상 1.63km·(망바위 경유) 망경대 1.51km·구형왕릉 2.77km·

동의보감촌(불로문) 2.90km·(평전샘 경유) 류의태약수터 1.60km·구형왕릉 3.12km를 가리키고

 

소나무 쉼터,

한 무리의 산꾼들이 점심을 먹고 있기에,

사진 촬영을 포기하고 자료사진으로 대신하고 

 

 

 

 

 

웅석봉과 도토리봉,

그 앞 오른쪽 봉우리가 왕산 정상이고 

 

 

 

산청읍과 필봉산,

그 뒤엔 정수산과 둔철산이고 

 

황매산과 정수산

 

 

황매산

 

 

 

 

 

 

 

 

 

 

 

 

소왕산,

오랫동안 왕산 정상 행세를 하다가 어느샌가 가짜 왕산으로 전락하더니,

그나마 소왕산이란 그럴싸한 명칭을 꿰차 천만다행이라고나 할까,

그전엔 조망이 아주 훌륭한 봉우리였는데,

세월 따라 훌쩍 자라는 나무에 가려 이젠 시원찮아 아쉽다고나?

 

 

 

자료사진

 

 

소왕산에서 바라본 망바위

 

 

법화산과 삼봉산

 

 

 

 

망바위,

119 왕산 4지점이요,

그 이름 그대로 멋진 전망대이기도 한데,

왕산 정상 1.01km·필봉산 정상 2.16km·동의보감촌 2.30km·구형왕릉 2.49km를 가리키고

 

 

 

맨 뒤에 보이는 거창 감악산

 

 

동의보감촌,

그 뒤엔 황매산, 정수산, 둔철산이고 

 

 

 

황매산

 

 

정수산과 둔철산

 

 

필봉산,

그 뒤엔 웅석봉과 도토리봉이고 

 

동왕등재(깃대봉)와 왕산 정상

 

 

망바위 갈림길,

망경대에서 망바위로 오르내리면 동의보감촌 갈림길이기도 하며,

왕산 정상 1.01km·필봉산 정상 2.16km·동의보감촌(불로문) 2.37km·망경대 0.98km·구형왕릉 2.49km를 가리키는데,

동의보감촌은 망바위의 2.30km에서 2.37km로 오히려 더 늘어났으며,

그 나머진 왜 지나온 망바위와 거리가 같은 걸까?

 

 

 

 

 

망경대,

왕산 정상 1.99km·필봉산 정상 3.14km·구형왕릉 1.51km를 가리키고

 

농은 민안부(農隱 閔安富) 선생과 망경대(望京臺)

고려 공양왕 때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낸 농은(農隱) 민안부(閔安富) 선생은

태조 이성계의 조선 건국 역성혁명(易姓革命)에 반대한 두문동 72현의 유신(儒臣) 가운데 한 분으로,

고려조에 끝까지 충절을 지키기 위해 지리산 기슭인 산청군 생초면 대포리에 남하하여 은둔(隱遁)생활을 하였다.

 

선생은 " 옳지 못한 부귀는 오히려 나에게는 뜬구름과 같다."

(불의지부귀 어아여부운, 不義之富貴 於我如浮雲)는 말씀을 생활신조로 삼아

근검절약하는 검소한 삶과 만고충절을 실천함으로써 선비들의 귀감이 되어

후세의 유림과 후손들이 매년 춘추계의 분향을 이어가고 있다.

 

선생은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이곳 왕산 중턱 바위에 올라

송경(松京, 고려의 수도)을 향해 절을 하며 고려와 임금을 그리워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선생의 충절과 의리를 기리기 위하여 이 바위를 망경대(望京臺)라 부르게 되었다.

 

 

 

농은민선생장구지소(農隱閔先生杖屨之所)

단기 4294년(1961년) 4월 8일 세움  

 

황매산

 

 

감악산

 

 

화장산과 대봉산(괘방산, 갓걸이산)

 

 

고려예의판서농은민선생장구지소(高麗禮儀判書農隱閔先生杖屨之所)

 

 

 

 

류의태약수터 갈림길,

류의태약수터는 아까 왕산으로 올라가면서 들렀기에 못 본 척하기로,

왕산 정상 2.24km·필봉산 정상 3.39km·구형왕릉 1.26km·류의태약수터 0.95km를 가리키고

 

 

 

 

 

동의보감 둘레길로 내려선 사거리,

동의보감 둘레길인 임도를 가로질러 내려가는데,

망경대 1.01km·왕산 정상 3.00km·필봉산 정상 4.15km·구형왕릉 0.55km요,

동의복감 둘레길은 동의보감촌 4.52km·류의태약수터 1.02km·쌍재 5.75km를 가리키고

 

 

 

 

 

 

 

동의보감 둘레길을 가로질러 30m 정도 내려섰을까,

아까 지난 구형왕릉주차장과 쌍재로 이어지는 임도와 다시 만나는데,

   등산로는 임도를 건너 구형왕릉과 구형왕릉주차장으로 이어지지만,

구형왕릉에서 올라온 등산로가 아닌 임도를 따라 구형왕릉주차장으로 내려가고 

 

 

 

 

 

 

 

 

 

구형왕릉주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