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현종부자상봉길

고려현종부자상봉길 왕복(1)

큰집사람 2021. 5. 14. 17:54

 

 

* 날      짜 : 2021년 5월 14일(금요일)

* 날      씨 : 구름 조금

* 산  행 지 : 고려현종부자상봉길

* 산행시간 : 6시간 45분(운행시간 5시간 10분 + 휴식시간 1시간 35분)

* 산행속도 : 보통 걸음

* 산행인원 : 1명(나 홀로)

 

 

 

 

 

* 산행일정

09:30            사천시 사남면 우천리 능화마을 표지석 

09:39            능화마을 버스정류소

09:47            능화저수지

09:57            고려현종부자상봉길 - 안종능지 입구 갈림길

10:09 - 10:14  고자치(고자정)

10:21            안종능지 입구(날머리)

10:31 - 10:44  안종능지

10:53 - 11:07  안종능지 입구(들머리, 귀룡정)

11:08            안종능지 입구(날머리)

11:15 - 11:24  고자치(고자정)

11:45 - 11:52  학촌마을회관

12:01 - 12:05  학촌교

12:31            복상마을 표지석

12:42 - 12:45  대산마을 표지석

12:47 - 12:52  대산마을회관

13:10            외딴집

13:18 - 13:21  배방사

13:27 - 13:38  배방사지

13:44            배방사

14:06 - 14:09  대산마을회관

14:11            대산마을 표지석

14:33            만마마을 버스정류소

14:45 - 14:48  학촌교

14:56            학촌마을회관

15:22 - 15:29  고자치(고자정)

15:36            안종능지 입구(날머리)

15:37 - 15:45  안종능지 입구(들머리, 귀룡정)

15:51            고려현종부자상봉길 - 안종능지 입구 갈림길

16:00            능화저수지

16:07            능화마을 버스정류소

16:15            능화마을 표지석

 

 

 

 

 

* 사천시는 사남면 능화마을에서 정동면 학촌마을을 지나

정동면 대산마을 배방사지를 연결하는

'고려현종 부자상봉길 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2015년 10월 30일 밝혔다.

이번 사업은 고려 제8대 임금 현종의 유년시절 수학(修學) 장소인 배방사지를 바탕으로

부자간 비운의 상봉 고갯길인 고자봉과 안종능지, 배방사지를 잇는 총 10km 구간의

역사적 발자취를 스토리텔링하여 역사를 재조명하고 관광 자원화하기 위해 추진된다.

 

시는 올해 사업비 2억 원으로 스토리 안내판, 마을 표지석,

고자봉 정자, 포토존, 벽화 등 기본적인 시설설치를 완료했으며,

내년에 사업비 2억 원을 투입하여 능화 · 학촌 마을 벽화,

부자상봉 조형물길, 고자봉 꽃동산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시 관계자는 "고려현종 부자상봉길 조성사업과 함께 배방사지 복원사업을 추진 중에 있으며,

향후 도로정비사업이 함께 진행될 계획이다."며,

"이러한 연계 사업들이 완료되면 사천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역사적 발자취를 찾는 관광객이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방도 1001호선(사남로)이 지나는 사천시 사남면 우천리 능화마을 입구 삼거리,

 배방사지까지 8.3km에 이르는 고려현종부자상봉길이 시작되는 곳이고

 

능화마을 표지석,

능화마을은 고려 제8대 임금 현종의 부자 상봉 애환과 그리움이 서린 마을이라 하고

 

 

 

능화마을 유래

고려 태조 왕건의 8번째 아들인 욱(郁)은

992년(성종 11년) 7월 사수현(泗水縣, 지금의 사천)에 귀양을 와 살다가,

4년 뒤인 996년 7월에 어린 아들 순(詢)을 홀로 정동 배방사(排房寺)에 남기고 죽게 된다.


죽으면서 아들에게 유언으로 “이곳 마을 뒷산에 시신을 엎어서 묻어라.(伏屍而葬, 복시이장)”고 했다.
이 묘터가 장차 임금이 날 자리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아들 순(詢)은 1009년 고려 제8대 임금 현종이 된다.


왕위에 오른 현종은 아버지 욱(郁)을 효목대왕(孝穆大王)이라 높이고,

묘호(廟號)를 안종(安宗)이라 하였다.

그때부터 장지가 있는 봉을 능화봉이라 하고,

그 아래 마을을 능화촌(陵下마을, 陵花마을)이라 부르고 있다.

이는 능이 있는 아래 마을이고, 꽃밭등이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992년 7월 태조 왕건(太祖 王建)의

8번째 아들인 욱(郁)이 사수현(지금의 사천 사남면)으로 귀양을 와 살았다.

당시 욱(郁)은 고려 5대왕 경종(景宗)의 왕비(王妃) 황보(皇甫)씨와 정을 통해 아들을 낳았는데,

어미는 아들을 낳고는 바로 숨을 거두었고 아비인 욱(郁)은 사남으로 귀양을 온 것이다.

왕족인 아이는 보모의 손에 키워졌는데,

어느 날 6대 임금 성종(成宗)이 아이를 찾아보았는데,

당시 두 살이었던 아이는 성종을 보더니 “아버지”라고 계속해서 부르는 것을 보고,

아이가 아버지를 너무도 그리워하는 것이 안타까워

성종은 아이를 아버지가 있는 사천땅으로 보내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와 함께 살지는 못하도록 하여,

아이는 지금의 정동면 장산리 대산마을의 배방사(排房寺)에서 거주를 하게 된다.
이에 욱(郁)은 매일같이 사남면에서 정동면 배방사까지 찾아가 아들 순(詢)을 보는 즐거움으로 살았는데,

그때 아들을 남겨 두고 돌아오며 눈물을 흘리며 아들 사는 배방사를 돌아보던

지금의 정동면 학촌리 고개를  ‘고자봉(顧子峰, 아들을 되돌아본다)’이라 하고,

이 마을을 ‘고자실’이라 불렀다.

 

그러나 귀양 온 지 4년 만인 996년 욱(郁)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지리와 풍수에 능했던 욱(郁)은 아들에게 금 한 주머니를 주면서 하는 말이

"내가 죽거든 이 금을 지관에게 주고,

나를 이 고을 성황당 남녘 귀룡동(지금의 사남면 능화마을 뒷산)에 매장하게 하되,

반드시 엎어서 묻게 하라. "고 하였다.

이 말은 묘자리가 풍수적으로 보아 임금이 날 자리인데,

시체를 엎어서 묻으면 더 빨리 임금이 난다는 뜻이었다.

 

아들 순(詢)은 사천땅에서 4년을 살다가 6살 되던 해 개성으로 올라갔고,

마침내 1009년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고려 8대 임금 현종(顯宗)이다.
우리가 잘 아는 천추태후(千秋太后)는

제7대 임금인 목종(穆宗)의 친어머니이자 현종에게는 이모가 된다.

왕위에 오른 현종은 아버지 욱(郁)을 효목대왕(孝穆大王)이라 높이고,

묘호(廟號)를 안종(安宗)이라 하고 어머니를 효숙왕태후(孝肅王太后)로 추존하였다.

이후 지금의 능화마을에 있던 시신을 경기도로 옮기면서 건릉(乾陵)이라 하고,

여기는 그 터만 남아 있다.

훗날 현종은 어린 시절을 보낸 사천땅을 은혜를 베푼 땅이라 하여 많은 특혜를 베풀었는데,

당시 진주목(晋州牧)에 속해 있던 작은 고을이었던 사수현(泗水縣)을 사주(泗州)으로 승격시켰는데,

그때 전국에는 12개 주(州)만 있었으니 가히 파격적이라 할 것이다.

이때를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는 현종 6년(1015년)이라 기록하고 있으니,

벌써 1천년 전의 일이다.

 

또한 당시 사주(泗州)를 왕의 고향이라는 뜻으로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 하였는데,

역사적으로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 부르는 곳은 조선시대의 전주(全州)와 고려시대의 사주(泗州)로,

승격된 지 1천년을 맞아 고려 8대 임금 현종을 모셨던 배방사(排房寺)의 사지(寺址) 터와

부자 상봉의 애환이 서린 고자실 길을 복원하는 작업에 나섰다.

 

 

 

일단은 배방사지까지는 갔다가 상황에 따라 택시를 타거나 왕복을 하기로 마음을 먹는데,

아직도 양쪽 무릎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왕복은 좀 무리가 아닐까?

안종능지입구 2.0km · 고자정 2.4km · 고자실 4.2km · 배방사지 8.3km · 능화벽화마을 0.6km 가리키고

 

능화마을

 

 

능화2교

 

 

능화2교 부근 공터에 주차한 나의 애마

 

 

죽천천

 

 

 

 

 

 

능화마을 버스정류소,

콘크리트 포장임도를 따라 능화저수지와 능골로 올라가는데,

고자정 1.9km · 고자실 3.7km · 배방사지 7.8km · 능화벽화마을 0.1km 가리키고

 

 

 

하늘먼당인가?

 

 

 

 

 

 

능화저수지,

안종능지입구 1.0km · 고자정 1.4km · 배방사지 7.3km 가리키고

 

 

 

고려현종부자상봉길 - 안종능지 입구 갈림길,

그전엔 콘크리트 포장임도를 타고 안종능지 입구와 고자치로 올라간 것 같지만,

왼쪽의 산줄기로 붙어 고자치로 오르는 고려현종부자상봉길이 2020년 말경 새로이 조성된 듯,

어디로 갈까 망설이다 고려현종부자상봉길을 따라가기로 하는데,

고려현종부자상봉길 100m · 고자정 500m · 안종능지입구 200m를 가리키고

 

2020년 말경에 새로이 조성한 고려현종부자상봉길,

콘크리트 포장임도가 아닌 산길이 이어지고

 

 

 

 

 

 

 

고자치(顧子峙),

사천시 사남면 우천리 능화마을과 정동면 학촌리 학촌마을을 잇는 고개로,

이구산과 흥무산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지나는 곳이기도 한데,

고자정(顧子亭)을 둘러보고 나자 안종능지가 슬슬 보고 싶어지는 걸,

왕복을 하게 되면 이따가 돌아갈 때 가도 되지만,

상황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 아니한가?

 

고자치 임도 갈림길 이정표,

이구산 3.4km · 흥무산 2.2km · 능화마을 1.4km · 학촌마을 1.1km 가리키고

 

고자치 산불조심 이정표,

흥무산 2.2km · 선황사 5.8km · 학촌벽화마을 1.8km · 능화벽화마을 1.7km · 안종능지입구 0.3km 가리키는데,

학촌마을과 능화마을은 콘크리트 포장임도를 따라가는 거리가 아닐까? 

 

고자정(顧子亭)

고려 6대 임금 성종 때인 992년 7월 태조 왕건의 8번째 아들인 욱(郁)이

사수현(지금의 사천 사남면)으로 귀양을 와 살았는데,

당시 2살이던 그의 아들 순(詢)이 애타게 아버지를 찾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성종은 아들 순(詢)을 죄인인 아버지와 같이 살지는 못하게 하고

사수현 정동땅 배방사에 거주를 하게 했다.

 

아버지 욱(郁)은 오직 아들을 보는 낙으로 살며 매일같이

사남땅에서 정동땅 배방사까지 10Km의 거리를 걸어 아들을 만나러 다녔는데,

되돌아오는 길에 이 고개에서 아들이 있는 배방사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곤 했었다.

 

그때부터 아들이 사는 배방사를 돌아보던 지금의 정동면 학촌리 고개를 

‘고자봉(顧子峰-되돌아볼 고, 아들 자/아들을 되돌아본다)’이라 하고,

이 마을을 ‘고자실’이라 불렀다.

 

아버지 욱(郁)은 귀양 온 지 4년 만인 996년 세상을 떠났고,

아들 순(詢)은 배방사에서 4년을 살다가 6살 되던 해 개성으로 올라갔고,

마침내 1009년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고려 8대 임금 현종이다.

 

2015년 사천시에서는 아버지 욱(郁)이 아들 순(詢)이 있는

배방사를 돌아보며 눈물을 흘렸다는 이곳에 정자를 세웠다.

 

 

 

고자정(顧子亭)

 

 

 

 

고자치에서 콘크리트 포장임도를 따라 안종능지 입구로 내려가고

 

 

안종능지로 이어지는 길,

이 또한 2020년 말경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전엔 안종능지 입구 표지석에서 안종능지로 올라갔다 내려와야 했지만,

힘든 돌계단 길로 왕복을 하지 않기 위해 좀 더 수월한 길을 새로이 내지 않았을까?

안종능지 입구 표지석과는 60m쯤 떨어진 곳으로,

아무런 표지판도 없는 게 옥의 티라고나?

안종능지로 올라가는 게 아닌 안종능지에서 내려오는 길로 닦은 듯,

어느 길로 올라가든 내려가든 선택은 자유지만,

난 이 길을 따라 올라가기로 하고

 

 

 

 

 

안종능지,

지금은 훈련원봉사 성주 이공의 묘가 자리 잡고 있고

 

 

 

안종능지

고려 태조 왕건의 8번째 아들인 욱(郁)은

992년(성종 11년) 7월 사수현(泗水縣) 사남땅에 귀양을 와 살다가,

4년 뒤인 996년 7월에 어린 아들 순(詢)을 배방사(排房寺)에 홀로 남기고 이곳에 묻혔다.


죽으면서 아들에게 유언으로

“성황당 동남쪽 귀룡동에 시신을 엎어서 묻어라.(伏屍而葬, 복시이장)”고 했고,
이 묘터가 장차 임금이 날 자리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훗날 자신이 죽은 지 13년 만인 1009년 아들(詢)은 고려 제8대 임금 현종이 된다.

 

왕위에 오른 현종은 아버지 욱(郁)을 효목대왕(孝穆大王)이라 높이고,

묘호(廟號)를 안종(安宗)이라 하였다.

그때부터 장지가 있는 봉을 능화봉(꽃밭등)이라 하고,

그 아래 마을을 능화촌(陵下마을, 陵花마을)이라 부르고 있다.

이는 능이 있는 아래 마을이고, 꽃밭등이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이후 능화봉에 있던 시신을 경기도로 옮기면서 건릉(乾陵)이라 하고,

여기는 그 터만 남아 있다.

 

*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작가였던 남재 선생이 읊었다는 한 수의 시가 전해져 온다.

 

와룡산이 남쪽 궁벽한 곳에 있으니. 왕자가 멀리서 와 이곳에 놀았더라.

옛 무덤 허물어져 풀만이 무성하고, 까마귀 슬피 울어 석양의 수심을 보내네.

 

 

 

 

 

안종능지(安宗陵址)

고려 태조(高麗 太祖)의 여덟째 아들인 욱(郁)이 배방사(排房寺)에 유배(流配)되어

성종(成宗) 15년(996년) 7월에 죽으니,

이곳에 묻혔다가 뒤에 그의 아들 순(詢)이 현종(顯宗)으로 등극(登極, 1009년)하자,

안종(安宗)으로 추존(追尊)되어 송도(松都)로 이장(移葬)하여 건릉(乾陵)이라 하였다.

서기 1986년 5월  일

사천문화원(泗川文化院)

 

                                       * 배방사에 유배된 건 욱(郁) 아닌 그의 아들 순(詢) 아닌가?

                                       * 능지(陵趾)의 한자가 틀리지 않았는지?

 

훈련원봉사성주이공지묘(訓鍊院奉事星州李公之墓)

 

 

 

 

 

 

 

 

끝없이 이어지는 돌계단을 따라 안종능지 입구로 내려가는데,

안종능지 입구에 있는 고려안종추모제단까지 559개나 되는 돌계단이던가?

워낙 많아 몇 개 정도는 헷갈릴 수도 있겠지만

 

 

 

 

 

고려안종추모제단(高麗安宗追慕祭壇)

 

 

고려 태조의 여덟 번째 아들이며 8대 현종의 아버지인 왕욱은

992년(성종 11년) 사수현(현 사천시)으로 유배되었다.

왕욱이 유배 생활을 하다가 996년(성종 15년)에 사망하자,

아들 왕순은 왕욱의 유언대로 귀룡동(현 능화마을)에 복시하여(엎드려서) 안장하였다.

왕순은 1009년 고려 제8대 왕으로 즉위하자 아버지를 안종으로 추존하고,

1017년(현종 8년)에 귀룡동의 능을 개경으로 이장하였다.

이에 능화마을 주민들은 능 이장 천년에 즈음하여

마을 지명의 유래를 있게 한 안종을 길이 추모하고자 사천시의 지원을 받아

능화봉 꽃밭등 안종능지 산하에 추모 제단을 건립하였다.

 

2017년 7월

능화마을역사문화회

 

 

 

안종능지 가는 길 표지석

고려 태조(高麗 太祖)의 여덟째 아들인 욱(郁)이 사수현(泗水縣, 사천)으로 유배(流配)되어

성종(成宗) 15년(996년) 7월에 죽은 후 유언(遺言)에 따라 이곳에 복시이장伏屍而葬)

(유언: 복시이장하면 즉멸(卽滅) 10년-시신을 엎어서 장사지내면

10년 안에 그의 자손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하였다가,

뒤에 그의 아들 순(詢)이 1009년에 현종(顯宗)으로 등극하자,

아버지 욱(郁)을 안종(安宗)으로 추존(追尊)하여 송도(松都)로 이장(移葬)하고

건릉(乾陵)이라 하였다.

1986년에 사천문화원에서 능지(陵址)에 표석(標石)을 세우고 보존하여 왔습니다.

역사 속에 묻혀 잊혀진 옛길의 흔적을 2009년도에 능(陵)으로 가는 길을 복원하였다.

 

2009년 11월

사천시 사남면(泗川市 泗南面)

 * 능지(陵止)는 능지(陵址)의 잘못이 아닐까?

 

안종능지 입구 이정표,

능화마을입구 2.0km · 안종능지 0.3km · 고자정 0.4km · 고자실 2.2km · 배방사지 6.3km 가리키고

 

귀룡정(歸龍亭)

 

 

 

 

 

 

콘크리트 포장임도를 따라 다시 고자치로 올라가고

 

 

 

 

다시 돌아온 고자치,

고자정을 둘러보고선 이제 학촌마을로 내려가고

 

고자정

 

 

 

 

고자치에서 50m쯤 내려갔을까,

포장임도에서 벗어나 새로이 조성한 고려현종부자상봉길로 내려서고

 

 

 

 

 

 

 

 

 

 

 

사천시 정동면 학촌리 학촌마을,

고자실이라 부르는 마을이고

 

 

 

 

 

 

 

 

 

 

 

 

 

학촌천

 

 

 

 

 

 

쉼터,

지나가자마자 고자치로 이어지는 콘크리트 포장임도와 만나고

 

고자치로 이어지는 콘크리트 포장임도

 

 

 

 

 

 

학촌마을회관,

학촌숲 조성 기념비에 적혀 있는 학촌마을의 연원(淵源)에는,

우리 마을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여덟째 왕자 욱(郁)이 성종 임진 11년(992년)

성황당(城隍堂) 남쪽 귀룡동(歸龍洞)의 배소(配所)에서 귀양살이할 적에 배방절(排房寺, 배방사)에서

우거(寓居)하던 아들 순(詢, 뒤에 고려 8대 현종)을 보러 날마다 산등성(능화골)을 오르내렸으며,

아들을 만나 보고 돌아올 적에 산봉우리에서

아들 있는 곳을 뒤돌아보았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 고자봉(顧子峰)이며,

봉우리 밑에 있는 마을을 고자실(顧子谷, 고자곡)이라 한 것이다.

지명이 생겨난 시대 등을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高麗時代) 이전부터 사람이 들어와 살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의 학촌(鶴村)마을은 1914년 행정구역 병합 때

고자실동(顧子谷洞, 고자곡동)과 이동(梨洞)을 합하여 학촌(鶴村)이라 하였으며,

그 유래는 마을 우측에 솟은 산이 학(鶴)의 형국을 하고 있어 학산(鶴山)이라 하였는데,

학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배방사지 4.1km · 안종능지 입구 2.2km · 능화마을입구 4.2km · 고자정 1.8km를 가리키고

 

 

 

 

 

 

 

작디작은 꽃뱀 새끼가 난간(欄干)에 올랐구나.

온몸은 비단 같고 반점(斑點)은 아름답네.

이 작은 꽃뱀도 숲에만 살 것이라 말하지 말라.

때가 오면 하루에 용(龍)이 되어 하늘에 오를 것을.

* 고려 현종이 배방사에 거주하던 어린 시절(5-6세)에 지었다는 시()

 

 

 

 

 

 

 

고자실공방

 

 

 

 

 

 

 

 

 

 

 

사천강을 가로지르는 학촌교,

능화마을입구 4.7km · 안종능지입구 2.7km · 고자정 2.3km를 가리키고

 

 

 

 

 

 

 

학촌숲 조성 기념비

* 마을 연원(淵源)

우리 마을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여덟째 왕자 욱(郁)이 성종 임진 11년(992년)

성황당(城隍堂) 남쪽 귀룡동(歸龍洞)의 배소(配所)에서 귀양살이할 적에 배방절(排房寺, 배방사)에서

우거(寓居)하던 아들 순(詢, 뒤에 고려 8대 현종)을 보러 날마다 산등성(능화골)을 오르내렸으며,

아들을 만나 보고 돌아올 적에 산봉우리에서

아들 있는 곳을 뒤돌아보았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 고자봉(顧子峰)이며,

봉우리 밑에 있는 마을을 고자실(顧子谷, 고자곡)이라 한 것이다.

 

지명이 생겨난 시대 등을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高麗時代) 이전부터 사람이 들어와 살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의 학촌(鶴村)마을은 1914년 행정구역 병합 때

고자실동(顧子谷洞, 고자곡동)과 이동(梨洞)을 합하여 학촌(鶴村)이라 하였으며,

그 유래는 마을 우측에 솟은 산이 학(鶴)의 형국을 하고 있어 학산(鶴山)이라 하였는데,

학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 마을 숲 조성(造成) 동기(動機)

예로부터 우리 마을 선현(先賢)들은 마을 북쪽 약 500m 지점에 등성(登性)을 쌓고

동산(洞山)의 재(峙, 치)로 명(名)하여 마을 지키는 상징적인 큰 산으로 여기고 불러왔으며,

마을을 가로 흐르는 소하천을 따라 포구나무, 이팝나무 등을 심어 울창한 숲을 가꾸어 왔다.

이는 학산(鶴山) 산자락을 배후로 한 우리 마을이 북쪽이 허(虛)하여

재복(財福)의 누실(漏失)과 재액(災厄)의 침입을 막아야 한다고 믿어 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1979년 경지 정리 사업으로 사라져 구전(口傳)으로만 전해 오고 있으며,

시대의 변화와 개발 등으로 울창했던 숲도 많이 훼손되어 마을 주민들이 안타깝게 여겨 오던 중,

이번에 강폭 10m를 넗히는 사천강(泗川江) 확장 공사가 시행됨에 따라

마을의 온갖 재액(災厄)을 막아 큰 인물이 배출되고 재복(財福)이 충만하여 풍요로운 복지 마을로

만대유전(萬代遺傳)할 수 있도록 사천강 제방 옆으로 마을 숲을 조성하기로 뜻을 모아,

마을 주민과 많은 출향(出鄕) 인사(人士)들의 참여(參與)와 후원(後援)에

힘입어(후면에 그 명단을 새김) 팔천여만 원의 기금(基金)을 조성하고,

정부로부터 참 살기 좋은 마을 가꾸기 사업 대상 마을로 선정되어

총 일억 원의 사업비로 200여 평의 부지(敷地)를 매입(買入)하여 이 숲을 조성하고,

마을 표석(標石)과 기념비(紀念碑)를 세우게 되다.

 

2007년 9월 20일 

 

사천강

 

 

 

 

 

 

사천과 고성을 잇는 국도 33호선 굴다리를 통과하고

 

 

학촌마을 버스정류소

배방사지 3.5km · 고자실 0.6km · 안종능지입구 2.8km · 고자정 2.4km를 가리키고

 

 

 

 

 

 

 

 

 

 

 

 

 

 

 

만마마을 버스정류소

 

 

 

 

 

 

 

 

 

 

 

 

정동면 감곡리 복상마을,

배방사지 2.2km · 대산벽화마을 0.7km · 고자실 1.9km · 안종능지입구 4.1km · 능화마을입구 6.1km를 가리키고

 

 

 

 

 

감곡저온창고

 

 

 

 

 

 

 

 

 

 

 

감곡천

 

 

 

 

복상 · 감곡마을 버스정류소와 삼은교회

 

 

 

 

 

 

 

 

 

 

 

 

 

 

 

 

 

 

 

 

사천시 정동면 장산리 대산마을,

고려 8대 임금 현종이 어릴 때 4년(992년-996년, 2살-6살) 동안 살았다는 배방사지가 있는 동네로,

배방사지 1.6km · 대산벽화마을 0.1km · 고자실 2.5km · 안종능지입구 4.7km · 능화마을입구 6.7km 가리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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