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현종부자상봉길

고려현종부자상봉길 왕복(2)

큰집사람 2021. 5. 16. 14:58

 

 

* 날      짜 : 2021년 5월 14일(금요일)

* 날      씨 : 구름 조금

* 산  행 지 : 고려현종부자상봉길

* 산행시간 : 6시간 45분(운행시간 5시간 10분 + 휴식시간 1시간 35분)

* 산행속도 : 보통 걸음

* 산행인원 : 1명(나 홀로)

 

 

 

 

 

* 고려 현종(顯宗, 992~1031)은 기구한 운명을 타고 태어났지만,

거란의 2차와 3차 침입을 물리쳐 초기 고려의 위기를 극복하고 사직(社稷)의 기틀을 세웠다.

경제기반을 튼튼히 하고 외교를 강화하는 한편

무신들의 발호(跋扈)를 가차없이 제압한 냉혹한 군주로도 기록되어 있다.

현종의 아버지는 태조 왕건의 8번째 아들 욱(郁)이고,

어머니는 태조의 손녀이자 5대 경종(景宗)의 제4 계비 헌정왕후(獻貞王后)이다.

태조의 아들과 태조의 손녀가 숙질(叔姪) 사이 사통(私通)으로 낳은 아들이 바로 현종이다.

 

헌정왕후는 현종을 낳은 직후 죽고,

왕욱(王郁)은 사수현(지금의 사천시 사남면)으로 귀양을 내려온다.

성종(成宗)의 배려로 아들 왕순(王詢, 현종)도 2살 때 사수현으로 내려온다.

순은 아버지 욱이 죽자 그 이듬해 개경으로 돌아가지만 천추태후(千秋太后)의 견제를 받는다.

천추태후가 김치양(金致陽)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고

대량원군(大良院君, 훗날 현종)을 숭교사(崇敎寺)에 보내 승려(僧侶)로 만들었다.

이후 자객(刺客)들이 자주 들이닥치자 목종(穆宗)과 숭교사 내 승려들의 도움으로

1006년 신혈사(神穴寺, 현재 서울 진관사에 있던 절)로 갔다가,

드디어 1009년 강조(康兆)의 난으로 목종(穆宗)에 이어 8대 왕으로 오른다.

 

그러나 이듬해 1010년 강조의 난을 핑계 삼은 거란의 2차 침공을 받고

갖은 수모를 당하며 전남 나주까지 몽진(蒙塵)을 간다.

이후 1018년 거란의 3차 침공을 받았으나,

강감찬 · 강민첨의 활약으로 거란을 물리치고 1019년 평화조약을 체결한다.

강민첨(姜民瞻)은 지금의 하동군 옥종면 태생으로,

현재 진주시 옥봉동 은렬사(殷烈祠)의 주인공이다.(일부 자료는 은렬사가 탄생지라고 한다.)

이름 ‘민첨(民瞻)’은 ‘백성이 우러러 본다.’는 뜻이다

영웅(英雄)과 성웅(聖君)은 위기에서 빛나듯이

현종의 진가는 재위 중 2차례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면서 발휘한다.

거란은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거란의 2차 침입으로 개경(開京)이 함락되고 관군이 와해되었지만,

곳곳의 장수(將帥)들이 봉기(蜂起)하여 국토를 회복한다.

3차 침입 때 왕은 위험을 무릅쓰고 수비군이 거의 없는 개경을 지킨다.

3차 거란 침입을 격퇴한 양강(兩姜) 명장을 발탁한 것은 현종의 혜안(慧眼)이다.

그 후 뛰어난 외교력으로 100년 이상 외침 없는 평화시대를 닦았다.

송나라와도 평화로운 친교를 유지할 수 있었다.

조선의 선조 · 인조 · 고종 등 국가 위기 시 극도의 리더십 부재를 보여준 군주들과는 달리,

현종은 2차에 걸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 평화의 반석을 쌓은 군주로 평가 받는다.

조선 말 임오군란(壬午軍亂)과 유사한 최질 · 김훈의 난이 일어나자

일단 무신들의 주장을 수용하고 난을 평정한 다음,

서경 장락궁 잔치에 무신들을 초청해 만취한 19명을 주살(誅殺)하여 복고(復古)에 성공한다.

성종은 욱을 사천에 귀양 보내고,

그 뒤 순을 아버지 귀양지에 보내는 배려를 하지만 같이 살게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는 사남면, 아들은 정동면 배방사에서 살게 된다.

아버지 욱의 유일한 낙은 10㎞를 걸어 아들 순을 만나는 것이었다.

매일 고개를 넘어 아들을 보고 되돌아오며 또 고개를 넘었다.

아버지의 애틋하고 안타까운 심정이 스며 있는 이 고개는

지금의 정동면 학촌리 고자봉(顧子峰)이고, 마을 이름은 고자실이다.

아들을 돌아본다는 뜻이다.

 

욱은 귀양 온 지 4년 만에 한 많은 생을 마감하고,

아들 순은 4년을 살다가 개경으로 올라간다.

욱은 어린 아들에게 금 한 주머니를 주면서 유언을 남긴다.

“내가 죽거든 지관에게 부탁해 이 고을 뒷산에 복시이장(伏屍而葬)하라.”

시체를 엎어서 매장하라는 것이다.

임금이 날 자리인데 더 일찍 발복(發福)하기 위한 것이다.

욱이 지금의 능화마을 뒷산에 영면한 지 13년 만에 아들 순이 현종으로 등극한다.

왕위에 오른 현종은 아버지를 효목대왕(孝穆大王)으로 추존하고 묘호(廟號)를 안종(安宗)이라 했다.

이후 아버지를 경기도로 이장(移葬)하고 건릉(乾陵)이라 했다.

그리고 사수현(泗水縣)을 사주(泗州)로 승격하고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 불렀다.

 

한(韓)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반군을 진압하고

패주풍읍(沛州豊邑)에 들러 고향 사람들과 같이 대풍가(大風歌)를 불렀다.

이성계(李成桂)도 황산대첩(荒山大捷) 후 선조(先祖)의 고향 전주에 들러 같은 노래를 불렀다.

그래서 왕조의 고향이란 뜻으로 사천과 전주가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 불린다.

전주에 있는 조선 전기 객사(客舍)의 이름이 풍패지관(豊沛之館)이고,

호남제일성(湖南第一城)이라는 현판의 문은 풍남문(豊南門)이다.

옛 패서문(沛西門)은 수백 년 동안 전주의 중심이었다.

풍패지향 사천의 능화마을 · 학촌마을 · 대산마을에는 부자상봉 벽화가 그려져 있다.

 

 

 

 

 

 

사천시 정동면 장산리 대산마을,

고려 8대 임금 현종이 어릴 때 4년(992년-996년, 2살-6살) 동안 살았다는 배방사지가 있는 동네로,

배방사지 1.6km · 대산벽화마을 0.1km · 고자실 2.5km · 안종능지입구 4.7km · 능화마을입구 6.7km 가리키고

 

 

 

 

 

 

 

 

 

 

 

역사문화가 살아 숨쉬는 풍패지향 대산마을

 

 

 

 

 

 

한 가닥 물줄기가 백운봉(白雲峰)에서 솟아 나와

머나먼 큰 바다로 거침없이 흘러가네.

바위 아래 샘물이라 업신여기지 말게나.

머잖아 용궁까지 도달할 물이어니.

* 현종이 어린 시절(5-6세) 시냇물을 보고 지은 시(詩)

 

 

 

2017.9.29. 준공한 대산(垈山)마을회관,

대산마을회관에서 대산노인회관 앞으로 고려현종부자상봉길이 이어지며,

몽대(夢垈)라는 마을 이름에서 대(垈)자를 따 대산(垈山)이라 부르는데,

몽대(夢垈)라는 지명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거창 우지현전투(居昌 牛旨峴戰鬪)에서

강덕룡(姜德龍, 1560~1627), 정기룡(鄭起龍, 1562~1622) 장군과 함께 왜군을 격파하는 등 

큰 공을 세워 영남의 3룡이라 일겉던  주몽룡(朱夢龍, 1563~1633) 장군의 출생지로,

그 부친이 꿈에 용을 보았다 해서 용꿈을 꾼 집터란 뜻이라 한다.

배방사지 1.5km · 안종능지입구 4.8km · 학촌벽화마을 2.6km · 고자정 4.4km 가리키고

 

 

 

 

 

 

 

 

 

 

 

 

 

 

 

 

 

 

 

 

 

 

 

 

 

이름 없는 다리를 건너자마자 개울을 끼고 올라가는데,

배방사지 1.3km · 안종능지입구 5.0km · 학촌벽화마을 2.8km · 고자정 4.6km 가리키고

 

 

 

 

 

 

 

작디작은 꽃뱀 새끼가 난간(欄干)에 올랐구나.

온몸은 비단 같고 반점(斑點)은 아름답네.

이 작은 꽃뱀도 숲에만 살 것이라 말하지 말라.

때가 오면 하루에 용(龍)이 되어 하늘에 오를 것을.

* 현종이 어린 시절(5-6세) 이곳에서 지었다는 사아시(蛇兒詩)

 

小小蛇兒遶藥欄(소소사아요약란)

滿身紅錦自斑斕(만신홍금자반란)

莫言長在花林下(막언장재화림하)

一日成龍也不難(일일성룡야불난)

 

 

 

 

 

 

 

 

 

 

 

 

 

 

 

강감찬(姜邯贊, 946-1031) 장군

고려시대의 명장.

983년(성종 2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부시랑이 되었다.

1010년(현종 1년)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으로 침입하자 조신들은 항복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이를 반대하고 하공진(河拱辰)으로 하여금 적을 설득하여 물러가게 하였다.

그 뒤 한림학사 · 승지 · 중추원사 · 이부상서 · 서경유수 · 내사시랑평장사를 역임하였다.

 

1018년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으로 침입해 오자,

이듬해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상원수가 되어 군사 20만 8,000명을 이끌고 흥화진의 영접을 받았으며,

검교태위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 식읍 3백호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의 호를 받았다.

그 이듬해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가 1030년 왕에게 청하여 성을 쌓고 문하시중이 되었으며,

이듬해 특진검교태사시중 천수군개국후에 봉해졌다.

현종 묘정에 배향, 수태사 겸 중서령에 추증되었다.

 

 

 

 

 

대산마을에서 배방사지로 올라가는 입구,

배방사지 1.0km · 능화마을입구 7.3km · 안종능지입구 5.3km · 고자정 4.9km 가리키고

 

 

 

 

외딴집,

배방사지 0.5km · 능화마을입구 7.8km · 안종능지입구 5.8km · 고자정 5.4km 가리키고

 

 

 

오른쪽으로 올라가고

 

 

배방사란 절이 보이고

 

 

 

 

배방사,

콘크리트 포장임도를 따라 배방사지로 올라가는데,

배방사지 0.3km · 능화마을입구 8.0km · 안종능지입구 6.0km · 고자실 3.8km 가리키고

 

 

 

 

 

하늘먼당인 듯?

 

 

 

 

 

 

배방사지,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도착했는데다 아직은 무릎도 말썽을 부리지 않기에,

차량 회수를 위해 택시를 이용하지 않고 내친 김에 왕복을 하기로 마음을 정하는데,

과연 끝까지 양쪽 무릎이 벼텨줄 수 있을까?

 

 

 

배방사지(排房寺址)

이 사지(寺址)는 정동면 장산리 대산(垈山)마을 뒤 천금산(千金山) 맞은편 산자락에 있다.

절터를 중심으로 사방이 빙 둘러싸여 가운데가 오목하게 생겼는데,

속칭 ‘배방골’이라 부르기도 한다.

배방절(排房寺, 배방사)이 옛날부터 이름나게 된 까닭은,

고려 초기에 현종(顯宗)이 어린 시절 한때를 이 절에서 보낸 슬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530년>을 비롯하여

여러 향지(鄕誌) 배방사조(排房寺條)를 보면 현종에 관한 고사(故事)가 어김없이 실려 있다.

 

992년 7월 태조 왕건의 8번째 아들인 욱(郁)이 사수현(지금의 사천 사남면)으로 귀양을 와 살았다.

당시 욱(郁)은 고려 5대왕 경종(景宗)의 왕비(王妃) 황보(皇甫)씨와 정을 통해 아들을 낳았는데,

어미는 아들을 낳고는 바로 숨을 거두었고 아비인 욱(郁)은 사남으로 귀양을 온 것이다.

어느 날 6대 임금 성종(成宗)이 보모손에 키워지는 아이를 찾아보았는데,

계속해서 아버지를 찾는 것을 보고 안타깝게 여겨

아이를 아버지가 있는 사천땅으로 보내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와 함께 살지는 못하도록 하여,

아이는 이곳 정동면 장산리 대산마을의 배방사(排房寺)에서 거주를 하게 된다.

 

아이는 이곳 배방사에서 4년을 살다가 6살 되던 해 개성(숭교사)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신혈사로 갔다가 마침내 1009년 강조의 난에 의해 고려 제8대 임금 현종이 된다.


이와 같이 배방사(排房寺)는 고려 왕실과의 인연으로 명찰(名刹)로서의 영화를 누렸을 뿐 아니라,

임금을 모셨다는 뜻의 일명 배왕사(陪王寺)로 이름을 고쳐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절의 창건 시기를 <조선 사찰사료>에 의할 것 같으면,

본래 북방계(北方系)의 절로서,

신라 경덕왕 22년(763년)에 대내마(大奈麻: 품관 10등) 공관(이순 혹은 이준)이 승려가 되어

이곳에다 절을 짓고 노곡사(蘆谷寺)라 했다고 한 것을 볼 때,

이 절은 이미 신라시대부터 내려온 사찰이라 하겠다.

이후 어떤 연유로 해서 이 절은 폐사(廢寺)되고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았다.

그래도 고려 현종의 발자취가 담겨 있는 만큼

비록 유허(遺墟)로 변했으되 향토사적(鄕土史的) 의의가 크다 할 것이다.

현종이 어린 시절(5~6세) 이곳에서 지었다는 사아시(蛇兒詩)가 전해져 온다.

작디작은 꽃뱀 새끼가 난간(欄干)에 올랐고나. 온몸은 비단 같고 반점(斑點)은 아름답네.

이 작은 꽃뱀도 숲에만 살 것이라 말하지 말라. 때가 오면 하루에 용(龍)이 되어 하늘에 오를 것을.

 

* 강종의 난은 강조의 난의 잘못 아닌가?

 

 

 

배방사지(排房寺址)

이 사지(寺址)는 구명(舊名) 노곡(蘆谷)으로,

고려(高麗) 현종(顯宗)미시(微時, 어린 시절)

우거(寓居, 남의 집이나 타향에 임시로 거처하여 삶)곳이다.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제팔자(第八子) ()의 아들로 휘()는 순()이요,

()는 안세(安世)이다.

 

()이 청상(靑孀) 경종비(景宗妃)를 범윤(犯倫, 인륜을 어김)한 죄()로 사수현(泗水縣)에 유배(流配)되고,

()는 순()을 낳자 운명(殞命)하였다.

보모(保姆)에게 자란 비운(悲運)의 왕손(王孫)

측은(惻隱)히 여긴 성종(成宗)은 유배지(流配地) ()에게 돌려주었다.

부자(父子)는 성은(聖恩)으로 외로운 회포(懷抱)를 풀었으나,

적지(謫地, 귀양지)에서 다시 사별(死別)하고 욱()은 능화(陵花)에 묻혔다.

 

천애고아(天涯孤兒)가 된 순()

잠저(潛邸,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임금이나 종실에서 돌아온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사는 집이나 그 시기)

10년에 아제시(兒題詩)와 숱한 일화(逸話)를 남기고 뒤에 왕위(王位)에 등극(登極)하니,

이분이 고려(高麗) 8대 현종(顯宗)이다.

 

현종(顯宗)은 부() ()을 안종(安宗)이라 추서(追敍)하고,

재궁(梓宮, 왕이나 왕비의 시체을 넣는 관)을 건릉(乾陵)으로 옮겼으며,

사수현(泗水縣)을 황고(皇考, 남에게 돌아가신 자기 아버지를 이르는 선고(先故)의 높임말)

적거지(謫居地, 귀양지)라 하여 사주(泗州)로 높이니,

재위(在位) 6(1015) () 6월의 일이다.

사지(寺址)의 흔적(痕迹)만 남은 이곳에 사실(史實)을 새겨 표석(標石)을 세운다.

 

서기 1988530

사천문화원(泗川文化院) ()

 

 

 

 

 

 

 

 

 

 

 

배방사지를 뒤로하고 다시 대산마을로 내려가고

 

 

 

 

 

 

 

 

 

외딴집,

배방사지 0.5km · 능화마을입구 7.8km · 안종능지입구 5.8km · 고자정 5.4km 가리키고

 

대산마을

 

 

 

 

 

 

 

 

 

 

 

 

 

 

 

 

이름 없는 다리를 건너 대산노인회관과 대산마을회관으로 가고

 

 

 

 

 

 

 

 

 

 

 

 

 

 

 

 

대산마을회관,

배방사지 1.5km · 안종능지입구 4.8km · 학촌벽화마을 2.6km · 고자정 4.4km 가리키고

 

 

 

992년 7월 태조 왕건(太祖 王建)의

8번째 아들인 욱(郁)이 사수현(지금의 사천 사남면)으로 귀양을 와 살았다.

당시 욱(郁)은 고려 5대왕 경종(景宗)의 왕비(王妃) 황보(皇甫) 씨와 정을 통해 아들을 낳았는데,

어미는 아들을 낳고는 바로 숨을 거두었고 아비인 욱(郁)은 사남으로 귀양을 온 것이다.

왕족인 아이는 보모의 손에 키워졌는데,

어느 날 6대 임금 성종(成宗)이 아이를 찾아보았는데,

당시 두 살이었던 아이는 성종을 보더니 “아버지”라고 계속해서 부르는 것을 보고

아이가 아버지를 너무도 그리워하는 것이 안타까워

성종은 아이를 아버지가 있는 사천땅으로 보내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와 함께 살지는 못하도록 하여,

아이는 지금의 정동면 장산리 대산마을의 배방사(排房寺)에서 거주를 하게 된다.
이에 욱(郁)은 매일같이 사남면에서 정동면 배방사까지 찾아가 아들 순(詢)을 보는 즐거움으로 살았는데,

그때 아들을 남겨 두고 돌아오며 눈물을 흘리며 아들 사는 배방사를 돌아보던

지금의 정동면 학촌리 고개를 ‘고자봉(顧子峰, 아들을 되돌아본다)’이라 하고,

이 마을을 ‘고자실(顧子室)’이라 불렀다.

 

그러나 귀양 온 지 4년 만인 996년 욱(郁)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지리와 풍수에 능했던 욱(郁)은 아들에게 금 한 주머니를 주면서 하는 말이

"내가 죽거든 이 금을 지관에게 주고,

나를 이 고을 성황당 남녘 귀룡동(지금의 사남면 능화마을 뒷산)에 매장하게 하되,

반드시 엎어서 묻게 하라. "고 하였다.

이 말은 묘자리가 풍수적으로 보아 임금이 날 자리인데,

시체를 엎어서 묻으면 더 빨리 임금이 난다는 뜻이었다.

 

아들 순(詢)은 사천 땅에서 4년을 살다가 6살 되던 해 개성으로 올라갔고,

마침내 1009년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고려 8대 임금 현종(顯宗)이다.
우리가 잘 아는 천추태후(千秋太后)는

제7대 임금인 목종(穆宗)의 친어머니이자 현종에게는 이모가 된다.

왕위에 오른 현종은 아버지 욱(郁)을 효목대왕(孝穆大王)이라 높이고,

묘호(廟號)를 안종(安宗)이라 하고 어머니를 효숙왕태후(孝肅王太后)로 추존하였다.

이후 지금의 능화마을에 있던 시신을 경기도로 옮기면서 건릉(乾陵)이라 하고,

여기는 그 터만 남아 있다.

훗날 현종은 어린 시절을 보낸 사천땅을 은혜를 베푼 땅이라 하여 많은 특혜를 베풀었는데,

당시 진주목(晋州牧)에 속해 있던 작은 고을이었던 사수현(泗水縣)을 사주(泗州)으로 승격시켰는데,

그때 전국에는 12개 주(州)만 있었으니 가히 파격적이라 할 것이다.

이때를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는 현종 6년(1015년)이라 기록하고 있으니,

벌써 1천년 전의 일이다.

 

또한 당시 사주(泗州)를 왕의 고향이라는 뜻으로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 하였는데,

역사적으로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 부르는 곳은 조선시대의 전주(全州)와 고려시대의 사주(泗州)로,

승격된 지 1천년을 맞아 고려 8대 임금 현종을 모셨던 배방사(排房寺)의 사지(寺址) 터와

부자 상봉의 애환이 서린 고자실 길을 복원하는 작업에 나섰다.

 

 

 

 

 

 

 

 

 

 

 

 

 

대산마을 유인창녕조씨열행비(孺人昌寧曺氏烈行碑)

 

 

삼은교회

 

 

 

 

복상마을,

배방사지 2.2km · 대산벽화마을 0.7km · 고자실 1.9km · 안종능지입구 4.1km · 능화마을입구 6.1km를 가리키고

 

 

 

살짝 고개를 내미는 고성 무이산,

꽤나 이름을 날리는 문수암을 품고 있는 산이고

 

 

 

만마마을 버스정류소

 

 

 

 

 

 

 

 

학촌마을 버스정류소,

배방사지 3.5km · 고자실 0.6km · 안종능지입구 2.8km · 고자정 2.4km를 가리키고

 

 

 

 

 

학촌교

 

 

사천강

 

 

 

 

 

 

학촌교,

능화마을입구 4.7km · 안종능지입구 2.7km · 고자정 2.3km를 가리키고

 

 

 

 

 

 

 

고자실공방

 

 

 

 

 

 

학촌마을회관,

배방사지 4.1km · 안종능지 입구 2.2km · 능화마을입구 4.2km · 고자정 1.8km를 가리키고

 

 

 

 

 

 

 

 

 

 

 

 

 

 

 

 

 

 

 

 

 

돌아본 학촌마을

 

 

 

 

 

 

 

 

 

 

 

 

다시 돌아온 고자치,

새로 조성한 고려현종부자상봉길 아닌 콘크리트 포장임도를 따라 능화마을로 내려가고

 

 

 

고자정

 

 

 

 

 

 

안종능지 입구 이정표,

능화마을입구 2.0km · 안종능지 0.3km · 고자정 0.4km · 고자실 2.2km · 배방사지 6.3km리키고

 

 

 

 

 

귀룡정

 

 

 

 

 

 

 

 

 

 

고려현종부자상봉길 - 안종능지 입구 갈림길,

고자치에서 헤어진 고려현종부자상봉길과 다시 만나게 되는데,

고려현종부자상봉길 100m · 고자정 500m · 안종능지입구 200m를 가리키고

 

 

 

 

 

 

 

 

 

능화저수지,

안종능지(입구) 1.0km · 고자정 1.4km · 배방사지 7.3km 가리키고

 

 

 

 

 

 

 

능화마을 버스정류소,

고자정 1.9km · 고자실 3.7km · 배방사지 7.8km · 능화벽화마을 0.1km 가리키고

 

 

 

능화마을

 

 

 

 

 

 

능화숲

 

 

이구산 산줄기

 

 

 

 

죽천천

 

 

 

 

다시 돌아온 능화마을 입구 삼거리에서 발길을 멈추는데,

지난해 9월과 12월에 수술한 양쪽 무릎이 말썽을 부리지 않아 엄청 고마웠다고나?

고려8대임금현종부자상봉길,

그 옛날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면서 편안하게 걸을 수 있어 참 좋았으며,

흥무산과 이구산을 잇는 산행을 하게 되면 다시 만날 고자치와 고자정,

 5월이 가기 전에 그런 날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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