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 백령도(白翎島),
우리나라 최북단의 섬으로 북한의 장연군 장산곶 남쪽 17km 아래에 위치하며,
인천에서 서북쪽으로 228km 떨어져 있고,
3,004가구 5,281명(남자 3,123명, 여자 2,158명, 2020년 1월 말 현재)의 주민이 살고 있다.
섬의 최고봉은 해발 184m의 업죽산이며,
동쪽에 145m의 남산이 있고, 서쪽에는 해발 162m의 망골산이 있다.
섬의 남부에는 동쪽에 해발 130m의 이랑구미산,
중앙에 해발 114m의 매막골산, 서쪽에 해발 176m의 삼각산이 있다.
해안선 길이 52.4km에 면적 51.09㎢로 우리나라에서 14번째로 큰 섬이며,
1995년 3월 1일 경기도 옹진군에서 인천광역시 옹진군으로 편입되었다.
백령도의 유래를 보면,
옛날 황해도에 살던 선비와 사또의 딸이 사랑을 하게 되었으나,
사또는 선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계속 만나자 딸을 몰래 귀양을 보냈고,
애를 태우던 선비에게 꿈에서 백학(白鶴)이 그녀가 있는 곳을 가르쳐 줬다.
훗날 사람들이 <백학이 알려 줬다> 하여 백학도(白鶴島)라 부르다가,
오늘날 흰 백(白)과 날개 령(翎)을 써서 백령도(白翎島)라 부르게 되었다.
백령도 옹기포항
두무진
선대암
코끼리바위
부처바위
천안함 46용사 위령탑
점박이물범(자료사진)
두무진(頭武津)의 유래
두무진의 지명은 백령진지(1802년)에 두모(頭毛)라 기록되어 있다.
모(毛)의 의미는 털의 뜻과 풀(草)의 뜻이 있는데,
길게 늘어선 바위들이 마치 무성하게 자란 풀처럼 보여
<바위들이 풀같이 솟아 있다>는 의미로 두모진(頭毛鎭)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백령도의 관문이라는 의미로 두문진(頭門津)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832년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인 키슬라프 목사와,
1865년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인 토마스 선교사가 두문진을 통해 상륙했다고 한다.
따라서 두문진이라 불린 것은 백령도의 북서쪽 꼭대기(頭)에 있는 문호라는 의미였다.
이후 러일전쟁 때 일본군의 병참기지가 이곳에 생기고 나서
용맹한 장군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는 모양이라는 뜻의
두무진(頭武津) 명칭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반공희생자합동위령비(反共犧牲者合同慰靈碑)
1970년 7월 9일 23시경 군사분계선 남쪽 4마일 해상에 갑자기 나타난 북한 괴뢰 함정은
평화롭게 고기잡이를 하던 우리 어부들에게 발포를 가하면서 어선들을 북으로 나포해 가다.
이때 북괴에 잡혀가지 않기 위하여 필사의 노력으로 뱃줄을 끊고 도망하려던
최상일은 저들의 총탄에 맞아 사망하고, 장춘빈 · 민경신 · 변호신 · 사명남 등 4명은
북괴로 끌려가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으로 항거하겠다고 귀중한 생명을
바다에 던짐으로써 반공정신의 투철한 면을 보여주다.
이러한 사연은 9개월 간이나 강제로 북괴에 억류되었던
동료 어부들이 자유 대한의 품으로 귀환함으로써 알려지게 되다.
이에 백령도어업협동조합(조합장 장익보)에서는 이들의 용감한 반공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71년 두무진 분교 옆산에 반공 희생자 합동 위령비를 건립하다.
반공 희생자 합동 위령비가 설명 비문도 없이 세워졌던 것을 안타깝게 여긴
장익보 옹은 사재를 희사하여 안내 비문과 함께 이전토록 하다.
이 비문의 건립으로 많은 사람들이 반공투사들의 정신을 흠모하고
잠든 영혼을 위로하는 동시에 후학들이 반공정신의 귀감으로 본받게 되기를 기원하다.
1979년 12월 31일
유격재건위원회 회장 김순호
* 본 위령비는 반공정신을 이양하고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먼저 설립하였던 선배님들의 뜻을 동감한 마을 어민들이
투철한 반공정신과 협동정신의 깊은 뜻을 이곳에 심어
오래도록 보존하기 위하여 어민 대표로 선주들의 사비를 모아
다시 어촌계 행사로 복원 건립하게 되었음
1987.6.30
통일(統一)로 가는 길
민족의 자존심 백령도!
이 섬에 겨레의 소망 통일의 길이 열리리라.
통일로 가는 길은
대한민국이 가야 할 과거와 오늘과 내일의 길이요
세계로 가는 길이 되리라.
1995.7.28
해병대 흑룡부대 장병 일동
백령도 두무진(白翎島 頭武津)
백령도의 최북단 해안에 위치하는 두무진(頭武津)은 인천에서 북서 방향으로 228.8km,
황해도 서쪽 끝인 북한의 장산곶과 불과 12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장군머리와 같은 형상이라 두무진(頭武津)이라고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두무진은 수억 년 동안 파도에 의해서 이루어진
병풍같이 깎아지른 듯한 해안 절벽과 가지각색의 기암괴석이 솟아 있어
동해의 금강산 만물상과 비슷하여 일명 해금강이라고 불리고 있다.
옹진 백령도 두무진(甕津 白翎島 頭武津)
백령도의 북서쪽에 있는 포구인 두무진은
<뾰족한 바위들이 모여 장군의 머리와 같은 모습을 이루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주로 사암과 규암으로 되어 있고 오랫동안 파도에 의해 만들어졌다.
병풍같이 깎아지른 듯한 해안 절벽과 가지각색의 기암괴석이 솟아 있어
금강산의 만물상과 비견하여 서해의 만물상이라 불린다.
코끼리바위, 장군바위, 신선대, 선대암, 형제바위 등
온갖 모양의 바위가 바다를 향해 늘어서 있어
홍도의 기암과 부산 태종대를 합쳐 놓은 듯한 풍경을 만들고 있다.
특히 선대바위는 1620년 백령도로 귀양 온 이대기가 <백령도지>에
<늙은 신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소개했을 정도로 풍광이 뛰어난 곳이다.
형제바위
백령도 연화리 두무진
두무진은 장군의 머리 같이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두무진 암석에는 얕은 바다에서 쌓일 때 생기는 물결무늬 자국과
폭풍에 의해 생기는 작은 구릉 같은 퇴적구조가 관찰되므로,
수심 50m 이내의 얕은 바다에서 퇴적된 것으로 추정한다.
두무진 암석은 무려 10억 년 전에 모래가 바다에 퇴적되었던 것이,
깊은 땅속에 묻혀서 강한 압력을 받아 규암으로 변한 다음 다시 지상에 올라온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다양한 변화를 받았음에도 퇴적 당시의 모양과 특성을 간직하고 있고,
경관이 아름다워 명승으로 지적되었다.
통일기원비
조국의 허리가 잘리워 지내온 지난 반세기는
온 민족의 아픔으로 점철된 각고의 세월이었습니다.
이산가족과 실향민들의 피맺힌 절규는 모든 이의 눈시울을 적시었고,
민족의 하나됨을 외치는 함성은 지금도 이 땅을 진동시키고 있습니다.
우리 이곳에 온 겨레의 간절한 소망과 뜨거운 해병대(海兵隊)의 혼(魂)을 담은
통일기원비를 세워 영광된 통일조국의 그날을 기원하고자 합니다.
1992.5.28
해병대 흑룡부대 장병 일동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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