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권 산행기

불일협곡으로 오른 불일폭포와 소은산막

큰집사람 2019. 6. 9. 20:02


* 날    짜 : 2019년 6월 9일(일요일)

* 날    씨 : 구름 많음

* 산 행 지 : 석문마을 - 불일협곡 - 불일폭포 - 소은산막 - 내원수행촌 - 쌍계사 - 석문마을

* 산행시간 : 7시간 50분(운행시간 4시간 28분 + 휴식시간 3시간 22분)

* 산행속도 : 보통 걸음

* 산행인원 : 16명(오로라, 여운, 조아라, 솜다리, 쓰리고, 파랑새, 연하천,

                            고남, 신난다, 마왕, 네츄럴, 유비 , 큰골, 담비, 구름, 선함)







* 산행일정

08:00          석문마을 무료주차장(100m)

08:14          전통불교문화예술회관

08:22          쌍계사 위 내원골 잠수교

08:35 - 08:48  묵자바위(270m)

09:08          내원골 + 불일협곡 합수지점(320m)

09:10 - 09:15  첫 번째 마의 구간(불일협곡 수문장폭포)

09:32 - 09:48  두 번째 마의 구간(왼쪽 직벽·오른쪽 밧줄지대, 375m)

10:00 - 10:12  두 번째 마의 구간 위

10:18 - 10:28  옥천대

10:45 - 10:58  용추폭포와 겹용소(480m)

10:08 - 10:18  나무다리(불일폭포 삼거리 - 불일폭포)

11:25 - 11:35  불일폭포 전망대(510m)

11:39 - 11:56  불일암(550m)

12:00          불일폭포 삼거리

12:04 - 12:55  불일평전

13:59          불일폭포 삼거리

13:04          불일암

13:14 - 13:17  향로봉(청학봉)

13:21          부안임공원영지묘

13:27          돈선암

13:33          향불암 

14:00          활인령(520m)

14:08 - 14:30  소은산막(570m)

14:37          활인령

14:50          내원수행촌

15:02 - 15:22  묵자바위

15:40          쌍계사 대웅전

15:50          석문마을 무료주차장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석문마을 무료주차장,

내원골로 흘러드는 불일협곡으로 스며들어 용추폭포까지 나아가다 정규 탐방로로 올라가,

불일폭포와 불일암을 거쳐 소은산막을 둘러보고 쌍계사를 지나 돌아오기로,

  참말로 오랜만에 16명이나 되는 많은 지사모 회원들이 함께하는데,

가는 데가 좋은데다 운때까지 딱딱 맞아서 그러는 걸까, 

안 그래도 좁디좁은 불일협곡이 아무래도 꽉꽉 찰 듯,

그동안 쭉 바라던 바이긴 하지만,

불일협곡은 이번이 두 번째인데,

기록을 찾아 보니 2010년 12월 5일에 간 걸로.

그렇다면 8년 6개월 만에 다시 찾는 셈인가?(08:00)






쌍계사 매표소 앞 삼거리,

쌍계사는 내려올 때의 몫으로 돌리고,

맛있고 약이 되는 밥상이란 좋은세상식당 쪽으로





쌍계펜션에서 왼쪽의 좁은 골목으로 올라가고















물탱크 앞에서 왼쪽으로 꺾고



전통불교문화예술회관,

2012년 7월 말 착공하여 2013년 말에 완공할 예정이라 했는데,

거의 마무리가 된 것 같지만 아직 개관은 하지 않은 듯,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08:14)





첫 번째로 내원골을 건너는 잠수교,

잠수교를 건너자마자 쌍계사와 내원수행촌으로 이어지는 길로,

가지 말라지만 가야만 하는 걸 어떡하랴?

여기서부터 곧장 내원골로 계곡치기를 해도 되지만,

두 번째로 내원골을 건너는 묵자바위에서 계곡치기에 들어가기로,

한여름이면 또 모르지만 서두를 게 뭐 있다던가?(08:22) 





국립공원을 보호하고 자연생태계 훼손을 방지하기 위하여

자연공원법 제28조의 규정에 의거 출입을 금지한다는데,

국립공원엔 왜 이리 가지 말라는 데도 많은 걸까?

누가 훼손을 하라고 억지를 부려도 안 할 텐데














내원골을 두 번째로 건너는 곳,

건너자마자 묵자바위가 자리 잡고 있으며,

말아주타임을 갖고선 내원골을 따라 계곡치기에 들어가기로,

내원수행촌 쪽으로 좀 더 가다 합수지점 부근에서 내려서도 되지만,

이쯤에서 들어서야 헷갈리지 않고 제대로 갈 수 있는 걸,

16명이나 되는 일행이 우왕좌왕하는 불상사가 일어나서야?((08:35 - 08:48)





묵자바위,

나무나 돌에 새겼으면 각자(刻字)라 하고,

새긴 게 아닌 먹으로 쓴 걸 묵자(墨字)라 하는데,

두꺼비처럼 생긴 바위의 툭 튀어나온 부분 아래 먹으로 쓰여 있는 글자,

孤雲(고운) 최치원(崔致遠, 857 - ?) 선생이 청학동에서 신흥으로 갈 때 남긴 흔적이라지만,

수없는 세월에 많은 부분이 지워져 그 의미는 알 수 없다는 걸,

 그 설화(說話)조차도 쉽게 믿기지 않고 긴가민가하지만














빗살무늬바위,

소은산막에 살던 최영감님 부부가 오르내리며 내원골을 건널 때,

미끄러지지 않도록 최영감님이 바위에다 일일이 새긴 거라던가?












































불일협곡과 내원골이 만나는 합수지점,

내원골로 흘러드는 지계곡인 불일협곡佛日峽谷),

합수지점에서 불일폭포에 이르는 비교적 짧은 거리이며,

지리산의 수많은 계곡 중에서 유일하게 협곡이란 단어가 들어가는 계곡으로,

나로선 2010년 12월 5일 처음으로 들르고선 두 번째인 듯,

그동안 무려 8년 6개월이란 세월이 흐른 셈인데,

별스레 변한 건 없겠지?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4 - 1498) 선생이 불일폭포를 오가며 내려다보면서,

<신선이 살 만한 곳으로 청학동이 분명한 듯하나,

지형이 험난하여 원숭이가 아니고는 찾아들 수가 없다.>

아쉬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던 계곡이라던가?(09:08)









불일협곡 수문장폭포,

첫 번째로 맞는 마(魔)의 구간이요 난관에 봉착하는 곳으로,

왼쪽의 바위지대로 붙어 폭포를 보면서 올라갈 수도 있지만,

16명이나 되는 일행의 안전을 고려하여 좀 더 위쪽으로 우회하는데,

 불일협곡이 어떻다는 걸 보여주는 맛보기라고나?(09:10 - 09:15)












































두 번째로 맞는 마(魔)의 구간이요 난관에 봉착하는 곳으로,

험하고 까칠한 불일협곡 중에서도 가장 어렵고 위험한 곳이라고나,

왼쪽은 수십미터나 되는 직벽 바위지대가 버티고 있는지라,

그나마 좀 수월해 보이는 오른쪽으로 돌아서 올라가야 하는데,

낡고 가느다란 밧줄 하나가 매달려 있을 뿐인 걸,

 거기다 온몸을 의지하며 오른다는 건 위험천만한 짓(?)이기에,

유비·쓰리고 부부가 3시간 동안 작업하여 만들었다는 밧줄로 대체하기로,

다섯(파랑새, 신난다, 큰골, 담비, 구름)은 왼쪽의 큰 바위지대 아래로 올라가고,

난 오른쪽으로 우회하는 길이 있는가 싶어 혼자서 올라가고,

본대(本隊)는 기어이 어렵사리 새로 설치한 밧줄을 잡고 올라가는데,

다섯은 내려설 데가 없어 불일협곡과는 영영 이별을 하고 말 줄이야?(09:32 - 09:48)












































나 홀로 오른쪽으로 빙 둘러 30m쯤 위에서 불일협곡으로 내려서는데,

우회 또한 어렵고 위험하긴 직등이랑 다를 바 없더란,

일행들이 올라오는 걸 지켜보러 계곡을 따라 내려가고(10:00 - 10:12) 











직등한 여섯 뇬(쓰리고, 연하천, 오로라, 솜다리, 여운, 조아라)

한 뇬(파랑새)은 왼쪽으로 돌아 올라갔고











옥천대(玉泉臺),

신라의 학자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선생이 협곡으로 들어가,

천연암굴에 기거(起居)하면서 공부를 한 끝에 신선(神仙)이 되어

영생(永生)의 천수(天壽)를 누리고 있다고 전해진다는 걸로,

최치원 선생이 공부했다는 천연암굴이 바로 옥천대라는데,

아파트 거실 크기의 널찍한 공간이 있는데다,

그와 별도로 그 안쪽에 또 하나의 서재와 같은 자리가 있으니,

최치원 선생이 책 하나 크기로 들어오는 자연광선을 받아 공부를 했다는데,

오랜 세월이 흘러 침식작용 등으로 이젠 그 빛이 흘러들지 않는다나?(10:18 - 10:28)









특명,

물에 빠진 맥주를 건져라!



























































용추폭포(龍湫瀑布)와 겹용소,

불일폭포 아래 자리 잡은 또 하나의 멋진 폭포로,

정규 등산로에서는 보이지 않는 폭포가 20m 높이로 쏟아져 내리고,

그 아래 폭포수가 떨어지는 큰 용소와 바깥에 또 하나의 용소가 겹으로 되어 있어,

사람의 접근을 어렵게 하는 참으로 신통한 모양의 겹용소,
 안쪽 용소 깊은 곳에 가야산까지 통하는 굴이 있으니,

그게 최치원 선생이 신선이 되어 두 산을 오가는 길이라 전해온다는 걸,

이제 용추폭포 위론 오를 수가 없어 정규 등산로로 올라가야 하는데,

바로 옆 바위로 된 마른 협곡은 위험할 것 같아서,

15m쯤 돌아서서 좀 수월한 듯한 너덜지대 계곡으로 올라가기로,

 그 또한 곧추서  있긴 마찬가지지만(10:45 - 10:58)


















































정규 등산로가 지나는 나무다리,

마른 계곡을 따라 곧장 치올라가고


나무다리,

불일폭포 삼거리와 불일폭포를 잇는 정규 등산로가 지나는데,

맨 먼저 올라서서 숨을 고르자마자 나타나는 곰아저씨,

나야 뭐 오기에 앞서 탈출했으니까 까딱없지만,

일행들이 줄줄이 올라오고 있는데,

이를 어쩌나?

법을 어겼다니까,

처벌을 감수할 수밖에는,

착한 산행,

그게 떳떳하고 좋긴 하지만,

맨날맨날 쌀밥만 먹으면 질릴 수도 있고,

때론 맛없는 보리밥이 생각날 때도 있다던가?(11:08 - 11:18)


낙석주의지역,

이곳은 강우 및 동절기 결빙으로 인한 안전사고 위험이 높은 지역이오니

상시 낙석에 주의하시어 안전한 탐방하시기 바랍니다.

(삼거리 - 불일암 200m)





불일암을 가리키던 건데,

세월이 뭣인지?

불일폭포부터 구경하고 이따가 들르기로,

국사암이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닌데  





불일폭포(佛日瀑布),

이 폭포 아래 용소에 살던 용이 승천하면서

꼬리로 살짝 쳐서 청학봉(靑鶴峰), 백학봉(白鶴峰)을 만들고,

그 사이로 물이 흘러 폭포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그 높이가 60m로서 장엄하고 아름다운 폭포이다.

고려 희종(熙宗 : 재위 1204년 - 1211년) 때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 1158년 - 1210년)이 폭포 근처에서 수도하였는데,

입적(入寂)하신 후 희종은 시호를 <불일보조>라 내렸다.

그 시호를 따서 불일폭포라 하였으며,

지눌이 수도하던 암자를 불일암이라 불렀다.  


완폭대 석각(翫瀑臺 石刻),

1200년 전 고운 최치원 선생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완폭대 석각이 하동에서 발견됐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지리산국립공원사무소는 역사문화자원 조사 중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 뒤편 지리산 능선에 있는 불일암 아래에서
완폭대(翫瀑臺) 석각(石刻)을 발견했다고 2018년 5월 10일 밝혔다.
완폭대 석각은 폭 150㎝, 높이 140㎝ 암석에 음각돼 있었으며,
완(翫)자와 대(臺)는 비교적 선명하나 가운데 폭(瀑)자는 심하게 마모된 상태였다.
최석기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는
<그간 설화와 문헌으로만 전해져 온 완폭대 석각의 실물을
발견함으로써 역사적 사실을 고증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최 교수는 <최치원이 썼다고 전해지는 인근 쌍계석문(雙磎石門),
세이암(洗耳巖) 석각과 함께 선인들의 정신문화가 담겨 있는
의미 있는 석각 발견>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완폭대는 <불일폭포를 즐기면서 감상하는 바위>라는 의미로
최치원이 시를 읊고 푸른 학을 부르며 노닐었다는 청학동 설화가 전해진다.
겸재 정선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불일암폭포 그림에는
절벽에 위태롭게 돌출된 완폭대 바위가 묘사돼 있다.
1611년 유학자 유몽인이 쓴 <유두류산록> 이후 청학동을 찾아 불일암과
불일폭포를 답사한 선비들의 유람록 10여 편에 완폭대 석각이 실존한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이후 남주헌이 함양군수를 지내면서 1807년에 쓴
<지리산행기>부터 완폭대에 대한 기록이 없다.
이 시기를 전후로 불일암이 쇠락하거나 지형이 변해
완폭대 석각도 흙에 묻히거나 수풀에 가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불일암 앞에 돌출된 완폭대 바위는 현재 무너져 내려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었으며,
이번에 발견한 완폭대 석각은 약 200년 만이다.
신용석 지리산국립공원사무소장은
<완폭대 석각은 불일폭포 일원 청학동 설화가 사실에 가까움을 증명하는 유물>이라며,
<앞으로도 지리산에 남아 있는 역사적 흔적을 발굴해
민족의 문화자산을 온전하게 보전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최두열기자)

* 완폭대 석각은 2018년 4월 17일 지리산국립공원 하동분소 
김봉상 분소장과 조봉근 주임이 최초로 발견했다고 하며,
불일폭포 안내판과는 불일암 담장 아래에서 비스듬히 마주보고 있음 

완폭대



겸재 정선의 하동 불일암폭포


















불일폭포(佛日瀑布),

 그전에는 불일폭포 아래로 내려갈 수 있었지만,

전망데크를 설치하는 바람에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어 아쉬운데,

전망데크 아래로 억지로 내려갈 수 없는 건 아니지만 그만두기로,  

 우릴 반기기라도 하듯 그런대로 세찬 물줄기를 쏟아내는 불일폭포,

보고 또 보고 몇 번을 또 쳐다본들 이 어찌 멋지다 아니할 수 있으랴?

불일폭포 물줄기가 떨어지는 물웅덩이를 학연(鶴淵)이라 한다던가?

불일현폭(佛日顯瀑)은 지리10경 중 제7경이라는데,

청학봉(靑鶴峰)과 백학봉(白鶴峰) 사이의 험준한 골짜기 속의 깊은 낭떠러지 폭포로,

오색 무지개가 걸리고 백옥같은 물방울이 서리며,.

60m의 높이에서 떨어지는 장쾌한 폭포 소리가 온몸을 파고드는 냉기는

몸과 마음이 얼어 붙는 긴장감마저 느끼게 한다던가? (11:25 - 11:35)


 







불일폭포,

불일폭포는 고려시대의 승려인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 - 1210)

폭포 입구에 있는 암자에서 수도(修道)를 하였는데,

고려 제21대 왕인 희종(熙宗, 1180 - 1237)이 지눌의 덕망과 불심에 감동하여

불일보조(佛日普照)라는 시호(諡號, 충신이나 덕망이 높은 신하가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기 위하여 임금이 붙여준 이름)를 내렸답니다.

그 시호를 따라 이 폭포를 불일폭포라 하였고,

 그가 수도하였던 암자를 불일암이라 하였습니다.

불일폭포는 지리산 10경 중 하나로,

좌측의 청학봉과 우측의 백학봉 사이의 협곡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60여 미터에 이르며,

주변의 기암괴석이 잘 어우러져 장엄하고 웅장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완폭대









불일폭포 위에 자리 잡은 불일암(佛日庵),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雙磎寺)의 부속 암자로,

신라 말에 쌍계사를 중창한 진감국사(眞鑑國師)가 창건하였으며,

고려시대에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중창하고  수도도량으로 삼은 후,

그가 죽은 뒤 희종이 내린 시호인 불일보조(佛日普照)에 따라 불일암이라 하였으나,

그 후 폐허화된 것을 1911년에 쌍계사 승려 양용은(梁龍隱)이 중건하였으며,

현재의 모습은 1980년대 초 불타버린 걸 2004년엔가 다시 지은 것이라는데,

애당초 곧장 불일폭포골을 건너 향로봉능선을 넘기로 했지만,

불일평전으로 내려가 점심을 먹고 다시 올라오기로 작전을 바꿀 수밖에 없는 상황,

산을 다니다 보면 이런저런 장애물들은 있기 마련이라던가?(11:39 - 11:56)





불일암에서 바라본 비로봉(毘盧峰),

백학봉(白鶴峰)이라고도 한다던가?





























불일폭포 삼거리,

쌍계사 - 불일폭포 - 상불재로 가는 길이 나뉘는 곳으로,

 10m 정도 아랜 쌍계사로 이어지는 비로봉능선 들머리이며,

삼신봉 6.9km · 세석대피소 13.5km · 불일폭포 0.3km · 쌍계사 2.1km를 가리키고(12:00)


불일평전(불일탐방지원센터),

푸짐하게 점심을 먹으면서 한동안 머무르는데,

과연 소은산막으로 갈 수 있을는지?

못 가도 그만이지만,

목표는 거기가 아니던가?12:04 - 12:55)


봉명산방(鳳鳴山房),

점점 폐허가 되어가는 모습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얼마 안 가 무너지거나 국립공원공단에서 철거하지 않을까?

털보 변규화(卞圭和) 씨가 1978년 10월 1일 정착하여 운영하던 봉명산방,

2006년 11월 그가 30년 가까이 가꾼 봉명산방에서 뜻밖의 가스사고를 당하여,

의식불명으로 지내다 2007년 6월 12일 영원히 지리산의 품으로 가버렸다는 걸.


소설가 정비석(鄭飛石) 선생이 머물면서 봉명산방(鳳鳴山房)이라 지었다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자료사진이라 아쉬울 따름이고





내 삶의 의미(변규화),

나는 

세상을 向해서는 

 도무지 아무런 재주도

재능도 없고 게으르다

 그러면서 또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다만 내일이

오늘이 된다는 것과

오늘 이 순간까지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고 있다는 고마움

그것이 큰 행복감으로 남아

깊은 산 한 자락에 초막을 엮어

삶을 즐기며 살아간다.





청학동(靑鶴洞),

현실에 존재하지 않지만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고

여기는 곳을 우리나라에서는 청학동이라 불렀습니다.

청학동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260년 이인로의 파한집(破閑集)에 나옵니다.

<옛 사람이 전하기를, 지리산 안에 청학동이 있으니 길이 매우 좁아서

사람이 겨우 통행할 만하여 엎드려 몇 리를 가면 곧 넓은 곳이 나타난다.

사방이 모두 옥토라 곡식을 뿌려 농사짓기에 알맞다.

청학이 그곳에 서식하는 까닭에 청학동이라 부른다.>


청학은 예로부터 태평한 세월을 상징하는 길조(吉鳥)로 여겼으며,

신선이 되었다는 최치원이 청학을 불러 놀았다는

설화가 있어 청학동이란 이름이 생겼습니다.

전쟁과 가난과 질병을 피할 이상향을 갈구하던 조선시대 선비들은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최치원 설화가 깃들어 있는

이곳 불일폭포와 불일평전을 청학동이라고 믿었습니다.

이곳에서 발원한 청학동의 개념은

지리산 산간마을 의신, 매계, 묵계 등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불일평전,

오른쪽의 유람록 기록에서와 같이 불일평전은 인근의 불일암,

불일폭포와 함께 한국인의 이상향인 청학동으로 불려왔던 곳이다.

그만큼 햇볕이 잘 들고 물이 흐르며 토질이 좋아

먹고 살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이다.


현재의 아늑하고 평화스런 풍경은 1978년부터 이곳에서

오두막집을 짓고 살았던 고(故) 변규화 씨의 작품이다.

그는 사람들이 자연을 벗삼아 즐길 수 있도록 나무를 가꾸고,

연못을 조성하였으며, 소망탑이라는 돌탑을 쌓았다.


한때는 야영장으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탐방객들이 자유롭게 쉴 수 있는 

쉼터로 관리하고 있다.  


이상향(理想鄕),

사람들은 누구나 이상향을 꿈꿉니다.

이상향이란 사람들이 마음으로 그려낸 가장 살기 좋은 곳입니다.

서양의 이상향으로 영국의 토머스 모어가 쓴

소설의 이름에서 유래한 유토피아(Utopia)가 있습니다.

그 뜻은 <어느 곳에도 없는 좋은 장소>입니다.

또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틀란티스가 있는데

기원전 1500년경 화산폭발로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또한 성경에 나오는 기독교의 이상향으로 이스라엘의 에덴동산이 있습니다.


중국의 대표적인 이상향은 무릉도원(武陵桃源)입니다.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이야기로

무릉에 있는 복숭아 꽃이 활짝 핀

신선들이 사는 세계를 천국과 같은 이상향으로 여겼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이상향은 청학동이고,

이외에 우목동, 이어도, 태평동, 율도국 등이 있습니다.

전국에 청학동으로 여긴 장소나 지명이 많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지리산의 불일폭포·불일암, 세석평전, 덕평 등을

청학동이라고 여러 옛 문헌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소망탑(所望塔)















불일평전에서 점심을 먹고 불일암으로 출발,

애당초 목표지점인 소은산막으로 가고자,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갈 수 없잖아?


불일폭포 삼거리

불일폭포 쪽으로 가다 불일암으로 올라갈 거고(13:59)





다시 들른 불일암,

대웅전 뒤쪽으로 해서 빠져나가고(13:04)








불일폭포 위쪽의 불일폭포골,

쉬었다 갈 것도 없기에 서둘러 향로봉능선으로 올라가고(13:10)





청학봉(靑鶴峰)이라고도 부르는 향로봉(香爐峰) 정상부,

비로봉(백학봉)과는 불일협곡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셈이며,

소은산막으로 가자면 곧장 조금 내려서다 왼쪽으로 꺾거나,

아니면 되돌아서서 1분쯤 뒤 오른쪽으로 꺾어도 되는데,

어디로 가든 잠시 후 부안임공원영지묘에서 만나게 되고(13:14- 13:17)


나무 사이로 불일암이 살짝 보이고



부안임공원영지묘,

올봄 한식엔가 봉분을 새로 손본 듯?(13:21)


부안임공원영지묘에서 2분 남짓 갔을까,

소은산막과 내원수행촌으로 나뉘는 지능선 삼거리인데,

곧장 내원수행촌으로 내려서지 않고 소현로를 따라 소은산막으로,

그전엔 소현로(素現路)란 표찰이 있었건만 언젠가부터 사라지고 없으며,

그 뿐만 아니라 돈선암(豚禪岩), 하심목(下心木), 망운암(望雲岩), 향불암(向佛岩), 

정념정(正念亭), 무천대(無喘臺), 암적수(岩滴水), 활인령(活人嶺) 등이 있었는데,

소은산막 주인장이신 소현거사 최병태 영감님이 직접 만들어 단 거라 하고


소현로(素現路),

소은산막 주인장이신 최병태 영감님이 소현거사(素現居士)라던가?(자료사진) 


소현로(素現路),

다시 찾은 오솔길 소현로 따라 불일암과 소은암을 오고가다가

불소(佛素가) 확! 드러나 태양이 되어

<나는 빛이요 생명이요 길이다!>

하신 말씀과 같이 빛이 되고 소금이 되고

무량수 무량광으로 어두움 밝혀 주는 광명이 되고

자라는 생명에겐 빛이 돼 주고 가는 길 안내하는 등불 되소서(자료사진) 


돈선암(豚禪岩),

산돼지가 참선한 바위라던가?(13:27)





돈선암(豚禪岩),

이 길을 찾아 헤매던 중에 이곳에서 참선하던

산돈수자(山豚修子, 산돼지)가 벌떡 일어나 앞서가기에,

뒤따라 발자국 찾아 가닥을 잡아 오솔길 소현로가 열리게 되었기에 

감사의 마음 모아 이 바위를 산돼지님이

참선하시던 바위라 이름 붙여 드립니다.(자료사진)


하심목(下心木),

마음을 낮추게 하는 나무라던가?


하심목(下心木),

나는 죽어서도 하심하노라

이렇게 머리 숙여 엎드려 있습니다

<하심합시다>

부디 머리 숙여 겸손 하소서

존경 받으소서(자료사진) 


망운암(望雲岩),

높다랗게 앉아 바람에 떠도는 한두 점 구름을 즐기는 바위라던가?(13:31)





망운암(望雲岩),

하늘 열고 땅 생긴 지 실로 그 얼마던가!

나 묵묵히 여기에 서서

저 백운산을 보아 왔노라

생야일편백운기(生也一片白雲起)요 사야일편백운멸(死也一片白雲滅)인데,

파아란 넓은 하는

흰구름 하나 가볍게 떴고

나도야 두둥실

저 구름 따라가네

덧없는 세월 뜻있게 살다 갑시다(자료사진) 


향불암(向佛岩), 

부처를 향한 간절한 마음의 바위라던가?(13:33)


향불암(向佛岩), 

이 길로 가시는 분은 빼어난 불일 절경과

유서 깊은 불일암을 만나십니다

좋은 인연 되소서(자료사진)


무천대(無喘臺),

예까지 왔으니 더 헐떡일 일도 없다는 곳이라던가?


앞은 훤히 열리고 계곡은 꼬불꼬불

청산은 높이 둘렀는데

하늘 틔어 애 밝으니

요산 요경 이 즐거움

한아름 안고 보면

내 것도 아닌 내 것을 찾아

헐떡이던 그것들이

쌓인 눈 봄 만난 듯

모두 사라진답니다

잠깐 쉬어 가세요(자료사진)





암적수(岩滴水),

바위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라던가?


한 방울 한 방

바위틈을 새어 나와

깊은 산속 포르르

수정인가 구슬인가

한 모금 입안에 머금어 보면

세심 청심 바로 이거다(자료사진)


정념정(正念亭),

잡념이 없이 편안한 마음을 가지는 곳이라던가?


청산은 나를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자료사진, 가운데 내용이며 위와 아래는 알 수 없음)


너구리 쌍굴,

옛날 옛날 한 옛날에

너구리 한쌍이 이곳에서 살았었대요

둘이는 서로서로 사랑을 했더래요

때로는 번갈아 한쪽 굴에서

열정을 불태워 만나곤 했더래요

사랑? 사랑은 눈물의 씨앗?

아니죠, 눈물은 성공의 씨앗이죠(자료사진)


활인령(活人嶺),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고개라던가?

나지막한 무덤이 자리 잡고 있으며,

내원수행촌과 소은산막 갈림길이기도 한데,

곧장 내원수행촌으로 내려가지 않고 소은산막으로 올라가기로,

오늘 산행의 목표지점이기도 하거니와,

소은산막을 갔다 와도 시간이야 널널하니까.(14:00)



활인령(活人嶺),

옛 인연을 이어서 새 인연을 또 맺어

그물처럼 얽혀 있는 그 인연을

서로 돕고 서로 아껴 존중하면서

이타자리(利他自利) 행하는 바로 그것이

참 삶이요! 참 삶이라!

그곳에 천국(天國) 있고 불국(佛國)도 있어

하나님도 부처님도 오가십니다(자료사진)


























소은산막(素隱山幕),

2017년 8월 20일에 이어 거의 1년 10개월 만에 다시 온 걸로,

2016년 여름까지만 해도 최병태(당시 82세) 영감님 부부가 살았다는데,

노쇠하여 인간세상으로 내려가시고 지금은 돌보는 이가 없는 듯,

<증미당, 蒸米堂>이란 <쌀을 찌는 집>이란 뜻이니,

<밥을 해서 나눠 먹는 곳>이란 건가?(14:08 - 14:30)





內外明徹(내외명철),

<안과 밖이 사무쳐 밝음>이라는 뜻으로,

<안이 밝으면 밖도 밝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안과 밖을 가로막는 벽이 사라지고 안과 밖이 통한다.>는 수행의 요체(要諦)라던가?

칠불사(七佛寺)와 아자방(亞字房)을 복원(1978 - 1995)하고,

쌍계사(雙磎寺) 주지(住持, 1999 - 2001)를 지낸 제월당(霽月堂) 통광(通光, 1940 - 2013.9.6)

스님이 임오년(壬午年, 2002여름에 쓴 글씨라나?





어성초















소은산막 별채엔 菩果農園(보과농원)이란 현판이 걸려 있고

































다시 돌아온 활인령,

이제 내원수행촌으로 내려가고(14:37)








내원수행촌(內院修行村)






내원수행촌 앞 내원골,

 2010년 12월 5일 맨 처음 왔을 때는 이정표가 있었건만,

언제 왜 사라진 걸까?

내원재 3.6km · 쌍계사 1.5km라 했는데(14:50)


자료사진



자료사진












불일협곡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비로봉(백학봉)과 향로봉(청학봉)









묵자바위,

다시 한 번 내원골을 건너게 되는데,

손발과 얼굴을 씻으면서 산행의 흔적을 지우고 가기로,

이제 거의 끝나가는 셈인가?(15:02 - 15:22)


























산길에서 빠져나가,

내원골 잠수교를 건너지 않고 쌍계사로 내려가고(15:33)














전통불교문화예술회관이 보이고






쌍계사 대웅전(雙磎寺 大雄殿, 보물 제500호), 

722년에 신라의 대비화상과 삼법화상이 옥천사를 세운 것이 기원이다.

정강왕(886 ~ 887)이 두 계곡이 만나는

절의 지형을 보고 이름을 쌍계사라고 고쳤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탔던 것을 1632년에 벽암대사가 다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쌍계사의 중심인 대웅전은 부처(여래)를 모신 법당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이다. ()자모양의 팔작지붕을 얹었고,

지붕과 기둥 사이는 3단의 목조장식으로 받쳤는데,

밖으로 드러난 목재들이 복잡하면서도 우아한 곡선들이 오래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내부의 천장은 모난 우물 모양으로 꾸몄고,

부처의 하늘을 상징하는 닫집은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직선에 가깝고 비교적 높은 기둥은 건물의 규모를 크게 느끼게 한다.

기둥 사이에는 위에 장방형 창과 아래에 4짝의 여닫이 문을 달았다.


여닫이문의 아래에 있는 8각의 창은

대개 조선시대 말부터 대웅전에 채용되기 시작하는 것으로 알려져,

시기적으로 200년 이상 빠른 예에 속하고 있다.

기둥의 전면을 가득 채운 용과 구름무늬,

내부를 빈틈없이 꾸미고 있는 비단무늬(금문, 錦文),

회화적인 단청 등이 보물로서의 가치를 더하고 있다.

이 대웅전은 조선시대 불교건축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어,

우리나라 건축사와 미술사 연구에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15:40)


쌍계사 구층석탑(雙磎寺 九層石塔), 

이 탑은 고산 스님이 인도성지 순례를 마치고 돌아올 때

스리랑카에서 직접 모셔온 석가여래 진신사리(眞身舍利) 삼과와

산내 국사암 후불 탱화에서 출현한 부처님의

진신사리 2과와 전단나무 부처님 1위를 모셨다.

때마침 발심서원한 백창기 부부의 단독시주로

불기 2531(서기 1987) 13일 시공(施工)하여,

불기 2534(서기 1990) 315일에 완공(完工) 건립(建立)하였다.


쌍계사 일주문(雙磎寺 一柱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6호),

 일주문은 속세를 떠나 부처의 세계로 들어서는 첫 관문으로,

항상 한결같은 마음으로 수도(修道)하고 교화(敎化)하라는 뜻으로 세운 문이다.

양쪽에 하나씩의 기둥을 세워 지붕을 받치게 한다 하여 일주(一柱)문이라 한다.

 

그러나 쌍계사 일주문은 보조기둥을 세워 일주문으로서의 성격을 잃어버렸다.

이 문은 1641(인조 19)에 벽암(碧巖) 스님이 지었다고 하며,

1977년에 고산(杲山) 스님에 의해 중수되었다.

쌍계사 일주문은 겹처마로 이루어진 다포계(多包系) 팔작지붕 건물이다.

 

처마를 받쳐주는 기둥머리의 장식(포작, 包)은 역삼각형의 거대한 모습을 하면서도,

출목의 간격이 넓고 가늘어 섬세하고 화려한 느낌을 준다.

넓은 지붕을 가졌음에도 받침기둥(활주, 活柱)을 하지 않고,

대신 기둥 전후에 보조기둥을 설치함으로써 지붕의 안전성을 유지하였다.

 


일주문으로서는 드물게 팔장지붕인데다가 기둥머리 장식

(공포, 栱) 부재가 가늘고 섬세하여 장식성이 강하다는 점에서

조선시대의 양식보다는 근대적 성격의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삼신산 쌍계사(三神山 雙磎寺), 

쌍계사는 삼신산의 하나로 방장산(方丈山)이라 불리는

지리산(智異山)의 남록(南麓)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이다.

쌍계사는 서기 723(신라 성덕왕 22)에 삼법(三法), 대비(大悲) 두 스님이

당나라 6조 혜능대사(慧能大師)의 정상(頂相)을 모시고 와서

꿈의 계시(啓示)대로 눈 속에 칡꽃이 핀 곳(雪裏葛花處, 설이갈화처)

찾아 정상을 봉안하고 절을 지은 것이 처음이다.

서기 830년 진감혜소(眞鑑慧昭, 774 ~ 850) 국사께서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삼법, 대비스님의 옛 절터에다 육조 영당을 짓고 절을 크게 확장하여 옥천사라 하시고

이곳에서 선()과 불교 음악인 범패(梵唄)를 가리치다 77세로 입적(入寂)하셨다.


그 후 정강왕(定康王)은 이웃 고을에 옥천사가 있고

산문 밖에는 두 시내가 만난다 하여 쌍계사라는 사명(寺名)을 내리셨다.

서산대사의 중창기를 보면 중섬(中暹), 혜수(惠修) 스님의 대대적인 중창이 있었으나,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되었다.

임진왜란 후 벽암(碧巖), 소요(逍遙), 인계(印戒), 법훈(法訓),

용담(龍潭) 스님 등이 중창을 하였고,

1975년부터 고산(杲山) 스님에 의해 복원(復元), 重修 重創(중수 중창)을 거쳐

현재와 같은 대가람의 사격(寺格)을 갖추고 있다.

산내 암자로는 국사암과 불일암이 있고,

문화재로는 국보 1, 보물 9, 시도지정 유형문화재 13, 기념물 1,

문화재자료 5점을 보유하고 있다.














7시간 50분 만에 다시 돌아온 석문마을 무료주차장,

불일협곡과 소은산막을 연계한 원점산행이 완성된 셈인데,

잊지 못할 추억들을 많이 쌓은 날인가 하면,

한시라도 빨리 잊고 싶은 가슴 아픈 기억도 있는 걸,

산을 다니다 보면 별일이 다 있게 마련이지만,

 그래도 가야만 하는 걸 어떡하랴?

거기에 산이 있고,

내가 움직일 수 있는 한,

차에 오른다.

그리곤 떠난다.

진양호 노을빛이 참 고운 내 사는 진주로(15: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