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권 산행기

세양골로 남부능선 석문 올라 수곡골로

큰집사람 2019. 6. 2. 08:39

* 날    짜 : 2019년 6월 1일(토요일)

* 날    씨 : 구름 조금

* 산 행 지 : 의신 - 대성동 - 세양골 - 석문 - 양진암 - 수곡골 - 대성동 - 의신

* 산행시간 : 10시간 30분(운행시간 7시간 20분 + 휴식시간 3시간 10분)

* 산행속도 : 보통 걸음

* 산행인원 : 7명(고남, 이한검, 유비, 큰골, 구름, 참꼬막, 선함)

 


  

 

* 산행일정

08:15          의신마을

08:47 - 08:50  원통굴

09:00 - 09:30  대성동

09:45          세양골 독가

10:28 - 11:03  너른바위

11:08 - 11:12  세양골 좌우골 합수지점

12:10 - 13:06  세양골 좌골 좌우골 합수지점

14:10 - 14:30  남부능선 석문

14:34 - 14:41  1321m봉 전망대

15:21          1237m봉(묵은 헬기장)

15:26          수곡골(단천지능) 갈림길

15:30 - 15:33  단천지능 갈림길

16:17 - 16:23  양진암

16:56 - 17:06  두갈래폭포

17:17 - 17:23  수곡폭포

17:35 - 18:05  대성동

18:45          의신마을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 의신마을,

17세기 초반까지 있었다는 의신사(義神寺)라는 사찰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지 않았나 하는,

세양골로 남부능선 최고의 볼거리인 석문으로 올라 수곡골로 내려서서 돌아오기로,

지난 5월 15일 노고단 일출과 바래봉 철쭉은 다섯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또 남정네만 일곱이 함께하게 되는 하루해,

음양의 조화란 걸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마구잡이로 짓밟아도 되는지,

지리산 산신령도 여인네들이 그리울지 알 수 없거늘,

자연의 섭리를 자꾸 어긴다며 노하지나 않을까? 

  세석대피소 9.1km · 대성동 2.5km를 가리키며,

벽소령대피소는 6.9km이고(08:15)


원통암(圓通庵),

원통암은 조선시대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승리로 이끄는데

게 기여한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출가(出家)한 절이다.

서산대사(법호(法號) - 휴정(休靜), 속명(俗名) - 최여신(崔汝信), 자(字) - 현응(玄應),

호(號) - 사명당(四溟堂), 1520 - 1604)가 15세 때 지리산을 유람하던 중

원통암에 들렀다가 숭인장노(崇仁長老)의 법문을 들고 출가했다.

서산대사는 삼철굴암(三鐵窟庵), 의신사(義信寺), 원통암 등에서 수행하던 어느 날,

인근 구례 성촌마을을 지나가다 대낮에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지리산 덕평봉 남쪽 아래 해발 700m 고지에 자리한 원통암은

신라 말 고려 초에 창건된 것으로 전해 온다.

옛날에 의신마을 터에 있었던 의신사의 31개 산내 암자 중 하나로

벽송지엄(碧松智儼, 1464 - 1534), 부용 영관(芙蓉靈觀, 1485 - 1571),

경성일선(敬聖 一禪, 1488 - 1568), 숭인장노(崇仁長老), 추월조능(秋月祖能),

원오일진(圓悟一眞) 스님 등  많은 고승대덕(高僧大德)이 머물렀다.

유서 깊은 문화유산인 원통사는 구한말(舊韓末) 화재로 폐사(廢寺)됐으나,

1997년 복원사업(復元事業)이 시작돼 인법당(人法堂 또는 因法堂), 산신각(山神閣)

등을 새로 짓고 서산대사 영정(影幀)을 청허당(淸虛堂)에 모셔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항일투사 17인 의총(義塚),

처음엔 30인이었고 뒷면에도 30인으로 되어 있는데,

언제 왜 바꿨을까?

여기엔 17명의 유해가 묻혀 있다는 걸까? 

그래도 앞뒤가 맞지 않는데


자료사진




항일투사 30인 의총(義塚),

한일 강제병합이 있기 2년 전 1908년 2월 일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온몸으로 저항하며 결사 항전하다 최후를 맞이한 항일

무명영웅 30인이 이곳 지리산 화개면 의신(義神)마을 공동산에 잠들었다.

이곳에 묻힌 항일의병은 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맹활약하다 1908년 1월 말 의신마을에 도착했다.

의병들은 마을 서당에 본부를 두고 배명고지(지리산역사관 뒤 능선}에

초병을 세우고 벽소령 길목을 경계했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에게 베조각을 나누어 주면서

토시와 길목(발등덮개)을 만들게 하고 음력 설을 쇠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2월 2일(음력 설날 아침) 승려로 가장한 일본군이

철골(용화정사터)에 있는 마을 주막으로 오는 것을 발견하고

발포하였으나 일본군의 유인작전이었다.

일본군(변장대)은 마을에 침투하여 의병을 향해 기습공격을 했다.

항일의병 80여 명은 일본군에 맞서 이틀 간 격렬히 저항했지만,

일제의 막강한 화력 앞에 의병 50여 명이 전사하고

생존자는 산청 쪽으로 몸을 피했다.

이때 주민 일부도 총탄에 맞아 희생되었다. 


이후 의신마을 주민들은 항일의병의 시신을 수습하여

산제등, 진평전 및 계곡 산허리에 묻어 주었으며,

이곳 30명의 무명 항일영웅들의 묘는 그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봉분이 훼손됨에 안타까워

하동 군민의 정성을 모아 묘역을 새롭게 단장하고

삼가 항일의병 비를 세웁니다.

서기 2011년 8월 15일(광복66주년)


의신마을






대성골

반쯤 남았습니다.

의신 1.2km·대성동 1.3km·세석대피소 7.9km를 가리키고(08:35)





원통굴 갈림길,

등산로가 아니라며 출입금지라지만,

오랜만에 왔는데 원통굴을 들르지 않을 수야?

의신 1.8km·대성동 0.9km·세석대피소 7.3km를 가리키고(08:44)





원통굴(圓通窟),

서산대사가 출가했다는 원통암(圓通庵)과는 상관없는 자그마한 암자인데,

몰지각(沒知覺)한 이들은 헷갈리기도 하는 것 같더란,

거대한 바위지대에서 흘러나오는 석간수(石間水)가 일품이고(08:47 - 08:50)














대성골









대성동 지킴이 소나무,

이제 70m 남짓이면 대성동마을이고


대성동마을,

참새가 방앗간을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기어이 주인장이 담궜다는 막걸리 두 주전자를 비우고서야 엉덩이를 일으키는데,

아무도 서두르거나 재촉하지도 않고 모두가 느긋하기만,

이제 막 시작이요 아직도 갈 길은 멀기만 하고,

세양골은 어떻게 생겼는지도 전혀 모르는데,

의신 2.5km·세석대피소 6.6km를 가리키고(09:00 - 09:30)








대성골에서

수곡골 양진암 단풍 보러 갔다가

단풍은 아직 일러 보지 못하고

바람 부는 어느날...

천왕봉에 올라가서 의정부 산다는

이쁜 처녀에게 청혼하였다는

남성이를 만났다.

 

십 몇 년 전 해맑던 그 총각 남성이

어느새 의젓한 청년이 다 되었고,

12월 9일에 혼례식을 올린다 하니

남성이 부부에게 이제 지리산

산신령의 하늘 같은 축복 있으시라.

 

남성이 "반갑다"며 산에서 갓 따온

송이버섯, 국버섯 안주로 한잔 술을 

권하니 대성골의 가을이 벌겋게

술에 취한다.

 

단풍은 아직 일러 보지 못했으나

잘 생긴 양진암 스님도 만났고

장가 간다는 "남성이"도 만났으니,

자박자박 의신으로 돌아가는 우리들의

가을은 행복으로 가득하다.

 

2007. 가을 전기찬  


대성골,

195112월 동족상잔 한창일 때
지리산으로 숨어든 빨치산 잡는다며
사흘 낮 사흘 밤 퍼부은 포탄으로
대성골 온 마을 불바다가 되었고
그 맑던 계곡물 붉은 피로 물들었다.
세개골, 세양골, 자빠진골, 수곡골  
골골마다 이데올로기의 희생양들
통곡소리 끊이지 않던 죽음의 골짜기
그 모진 세월 견뎌낸 원대성골, 대성골 사람들
모두 다 의신으로 쫓겨가고
빈집 몇 채만 대성골을 지키고 있었다.

60년 세월 꿈 같이 흘러 2012229,
밤길 더듬어 대성골 당도하니
육이오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십남매 중 막내인 남성 씨가 우리를 반긴다.
한잔 두잔 거나하게 된 남성이는
각시 허락도 없이 대성골 약초술 죄다 내놓는다.  
천왕봉 산신령이 점지하여 의정부 처녀를 만나
떡두꺼비 같은 아이를 둘이나 낳은 그이는
누가 뭐래도 넉넉한 지리산 산사나이

세상 근심 다 내려놓고 곤하게 잠들었던
뜨끈뜨끈한 흙담집 구들방은 그때 그대로인데
이념의 푯대 끝에 매달린 깃발 온데간데없다. 
세상일 까마득 잊고 앵글 속으로 들어간
자족과 평화와 화해의 땅 대성골
머지않아 돌북숭아꽃 지천으로 피어나고
하늘을 찌를 듯한 후박나무 꽃봉오리 터지면
꿈속의 무릉도원 찾아 해맬 일 없겠다.(김순철, 통영시청) 



































수곡골 들머리,

나중에 빠져나올 곳이기도 하고


세양골 들머리,

대성골을 건너 산길을 따르거나 계곡치기를 해도 되고


대성골



대성골로 흘러드는 세양골,

큰골과 참꼬막은 처음부터 계곡치기로 들어가지만,

우린 세양골을 건너 산길을 따라 독가로 올라가는데,

큰세개골과 작은세개골 및 수곡골과 더불어 대성골을 이루는 세양골,

그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작은 편이라고나? (09:40)














세양골 독가,

거주(居住)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지만,

관리 상태로 봐선 농작물을 가꾸려 드나드는 듯?(09:45)


독가에서 다시 세양골로 붙자,

한동안 산길은 계곡을 오른쪽으로 끼고 이어지고(09:48)





고달픈 삶의 흔적들,

과거엔 누군들 힘겹게 살지 않얐냐마는





지리산 자락 어딜 가나 만날 수 있는 풍경이라고나?













































너른바위,

지사모 공식주 말아주타임을 갖고 가기로,

대성동 주막에서 먹고 마신 술기운이 아직 남아 있을 터이건만,

참꼬막표 보리숭어를 안주 삼아 또 실컷 들이킬 수밖에는,

제아무리 거칠고 투박한 세양골이라한들,

할 짓을 안 하고 갈 우리들인가?

무려 35분에 걸쳐 주거니 받거니,

그 후유증이 얼마 안 가 나타날 줄이야?(10:28 - 11:03)   





























세양골 좌우골 합수지점,

우골이든 좌골이든 물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물이 좀 더 많아 보이는 좌골이 본류인 듯,

우리 또한 좌골로 올라가는데,

우골도 언젠간 갈 날이 있지 않을까?(11:08 - 11:12)


우골


























































































세양골 좌골은 다시 좌골과 우골로 나뉘는데,

좌우골의 물줄기가 엇비슷해 보이지만,

계곡미를 갖춘 듯한 우골이 본류인 듯,

이따가 우리도 우골로 올라갈 거고,

이제 그만 이쯤에서 점심을 먹고 가기로,

갓 지은 큰골표 쌀밥과 참꼬막표 바지락국은 기본이요,

 보리숭어와 상추, 깻잎, 쑥갓, 무생채, 참기름과 초고추장이 어우러진 비빔밥,

어디에 견줘도 빠질 게 없는 푸짐하고 맛깔스런 오찬(午餐),

실컷 먹고도 짐승과 새들의 먹이로 보시(布施)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지리산 산신령인들 부러워서 군침을 흘리지 않았을까?(12:10 - 13:06)


좌골



우골















점심을 먹고 우골로 올라가자,

얼마 안 가 물줄기가 사라지면서 계곡의 형태를 잃어가는데,

어찌어찌하다 보니 3패로 나뉘어 가게 되는 걸,

큰골은 흔적만 남은 세양골을 고집하는 것으로,

우리 4명(고남, 이한검, 참꼬막, 선함)은 오른쪽으로 흘러내린 지능선으로 붙고,

구름과 유비는 큰골과 우리 사이로 올라가는 것 같은데,

지리산 그 어딘들 갈 수 없는 데가 있을까마는,

  결과적으론 석문에 도착한 걸 기준으로 볼 때,

구름과 유비가 1등이요,

우리 4명이 2등이고,

큰골이 꼴찌였다나?

















구멍바위라고나?(13:59)
























정확하게 석문으로 빠져나가게 되는데,

세양골 우골을 따라 남부능선으로 붙는 것과 똑같은 코스인 듯,

참말로 신기하고 신통한 일이 아닐까?

큰골은 이정표(세석대피소 2.7km · 쌍계사 13.9km · 청학동 7.3km)가

있는 곳으로 탈출했다 하고.


석문(石門),

남부능선에선 제일가는 볼거리요,

지리산에서도 손꼽히는 명물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좀 처진 일행들을 기다렸다 같이 가는데,

어차피 나 홀로 아닌 우리가 아니던가?(14:10 - 14:30)





1321m봉,

남부능선에선 최고의 전망대로 전혀 손색없는 곳인데,

이곳저곳 돌아가며 눈요기를 하면서 머물다 갈 수밖에,

나로서도 꽤 오랜만의 만남인 셈인가?((14:34 - 14:41)











촛대봉과 시루봉



산청군 시천면 내대리 일대



남부능선과 삼신봉 일대






세석대피소 3.3km · 쌍계사 13.3km · 청학동 6.7km를 가리키고(14:58)



세석대피소 3.9km · 쌍계사 12.7km · 청학동 6.1km를 가리키고(15:15)



지리 14 - 11지점(15:20, 1236m)



1237m봉,

묵은 헬기장이 자리 잡은 곳으로,

세석대피소 4.4km · 쌍계사 12.2km · 청학동 5.6km를 가리키고(15:21)








남부능선에서 벗어나 수곡골로 들어가는데,

빅딘재라고도 부르는 수곡재가 삼신봉 쪽으로 2 - 3분 거리이고(15:26)











4분 남짓 갔을까,

단천지능 갈림길에서 수곡골로 내려서고(15:30 - 15:33)























양진암,

몇 년 동안이나 비어 있었는데,

요근래에 노스님께서 정진하고 계신다는 걸,

대성동에 거의 이르렀을 즈음 올라가는 스님은 제자격이고,

양진암에 가시냐니까 아니라고 하더니만,

대성동 주인장(임씨)은 양진암 사정을 알고 있는 듯,

조용히 물만 마시고 또 사진만 찍고선 스르르 물러나는데,

당분간은 들르선 안 되겠단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16:17 - 16:23)
































두갈래폭포,

자꾸만 처지는 일행과 함께 뒤에서 내려가는데,

안 그래도 세양골에서 나자빠지면서 다리가 불편하다더니,

또 낙엽에 미끄러지면서 몇 바퀴 구르는 불상사가 벌어질 줄이야?

난리통에 안경알이 빠져 어디론가 도망을 갔다지만,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낙엽 더미에 도무지 찾을 수가 있어야지?

한참 동안이나 헛고생만 실컷 하고선 그냥 갈 수밖에는,   

안경알이 없으니 눈에 뵈는 게 없다나 어쩐다나?(16:56 - 17:06)











수곡폭포,

수곡골에선 제일가는 폭포요,

또한 최고의 볼거리가 아닐까?

단풍이 들 때면 더욱 아름답다지만,

그때그때 볼 때마다 언제나 좋지 않을까?(17:17 - 17:23)

















대성골을 건너 대성동 주막으로,

앞서간 일행들이 하산주를 들이키고 있지 않을까?(17:34)











대성동 주막,

아니나다를까 일행들이 하산주를 마시고 있는데,

여느 때 같으면 누가 부르지 않아도 꿰차고 앉았으련만,

 진주까지 가야 하는 내 차는 누가 운전한단 말인가?

나 홀로 왔으니 갈 때도 나 홀로요,

굳이 누구랄 것도 없이 내가 해야 하는 걸 어쩌랴?

 그저 그림의 떡이요,

화중지병(畵中之餠)이라고나?(17:35 - 18:05)














원통암 갈림길,

아까완 달리 등산로를 따라서 왔고(18:18)


대성골에서 반쯤 왔습니다.

의신 1.2km·대성동 1.3km·세석대피소 7.9km를 가리키고(18:26)











10시간 30분 만에 다시 돌아온 의신마을,

때 묻지 않은 자연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는 세양골과 수곡골,

 대성골로 흘러드는 지리산 원시계곡 둘을 한꺼번에 탐사한 셈인데,

그다지 서두르지 않고 쉬엄쉬엄 나아가다 보니, 

짧지 않은 하루해가 길지 않게 느껴졌다고나?

차에 오른다.

그리곤 떠난다.

진양호 노을빛이 참 고운 내 사는 진주로(18: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