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 공북문(拱北門),
'공북(拱北)'이란 충성을 맹세한 신하가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공손하게 예를 올린다는 뜻이다.
공북문은 17세기 이후에 그려진 진주성도에 진주성의 정문으로 나와 있으며,
진주성의 북문이다.
2002년 5월 1일 홍예식 2층 다락루로 복원하였다.
공북문은 낮보다는 밤에 봐야 더 웅장하고 아름답다.
진주성
진주성은 외적을 막기 위하여 삼국시대부터 조성한 성으로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깃든 유서 깊은 곳이다.
고려말 우왕 5년(1379년)에 진주목사 김중광(金仲光)이 잦은 왜구의
침범에 대비하여 본래 토성이던 것을 석성으로 고쳐 쌓았으며,
임진왜란 직후에는 성의 중앙에 남북으로 내성을 쌓았다.
선조 25년(1592년) 10월 왜군 2만이 침략해 오자 김시민(金時敏)
장군이 이끄는 3천 8백여 명의 군사와 성민이 힘을 합쳐 물리쳤으니,
이것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이다.
이듬해 6월에는 왜군 10만여 명이 다시 침략했고,
민간인과 관료, 군인 등 7만여 명이 이에 맞서 싸우다
모두 순국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다.
1972년 촉석문을 복원하였고,
1975년에는 일제강점기에 허물어졌던 서쪽 외성의 일부와 내성의 성곽을 복원하였다.
1979년부터는 성 안팎의 민가를 모두 철거하는 등 진주성 정화사업을 시작해
2002년 공북문 복원공사를 마지막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였다.
성곽의 둘레는 1760m이고 높이는 5 ~ 8m이며,
성 안에는 촉석루. 의기사. 영남포정사. 북장대. 창렬사. 호국사. 서장대.
임진대첩계사순의단.국립진주박물관 등이 있다.
논개(論介)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남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娥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石榴)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남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江)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남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수주 변영로, 樹州 卞榮魯)
망진산
진주교와 선학산
촉석문(矗石門)
진주교,
진주시 강남동과 중앙동을 잇는 진주대로가 지나고
천수교
동방호텔
경남문화예술회관
진양교
뒤벼리
진주교
촉석루(矗石樓,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호)
촉석루는 진주의 상징으로 영남 제일의 명승으로 꼽힌다.
이곳은 고려 고종 28년(1241) 진주 목사 김지대(金之岱, 1190 ~ 1266)가
창건한 이후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고쳐 지었다.
전쟁 때는 장수의 지휘소로 쓰였고,
평상 시에는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명소였다.
촉석루는 강가에 바위가 우뚝우뚝 솟아 있다고 하는 데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으며,
일명 남장대(南將臺) 또는 장원루(壯元樓)라 부르기도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10년(1618) 병사 남이홍(南以烘, 1576 ~ 1627)이
전보다 웅장한 건물로 고쳐 지어 1948년에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1950년에 6 ·25전쟁으로 불탔다.
지금의 건물은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가
국비, 도비, 시비와 시민의 성금으로 고쳐 지은 것으로,
건물의 구조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형태로 되어 있다.
예로부터 남(南)으로는 진주 촉석루,
북(北)으로는 평양 부벽루(浮壁樓)라 할 만큼 풍광이 아름다워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글과 그림이 전해져 오고 있다.
현재 촉석루에는 하륜(河崙, 1347 ~ 1416)의
『촉석루기(矗石樓記)』를 비롯한 많은 글이 걸려 있다.
의암(義巖)
촉석루
義巖(의암)
義巖(의암)은 논개(論介)가 왜장(倭將)을 끌어안고 순국(殉國)한 바위다.
조선(朝鮮) 선조(宣祖) 26년(1593) 6월 29일 임진왜란(壬辰倭亂)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진주성(晋州城)이 함락(陷落)되고 7만 민(民) · 관(官) · 군(軍)이 순절(殉節)하자,
논개(論介)는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장을 의암(義巖)으로 유인하여 이 바위에서 순국하였다.
이에 논개(論介)의 순국정신(殉國精神)을 기리기 위해 영남(嶺南)사람들은
이 바위를 의암(義巖)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인조 7년(1629) 진주의 선비 鄭大隆(정대륭, 1599 - 1661)은
바위의 서쪽 벽면(壁面)에는 전서체로 義巖(의암)이라는 글을 새겼고,
남쪽 벽면(壁面)에는 韓夢參(한몽삼, 1598 - 1662)이 쓴 것으로 전하는
해서체로 된 義巖(의암)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義巖(의암) 바닥 넓이는 3.5m X 3.3m이다.
촉석루
쌍충각(雙忠閣)
진주성 우물
충무공 김시민 장군
공북문
공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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