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과 풍경

제18회 진주논개제(2019.5.24 - 5.26)에 들른 진주성(2)

큰집사람 2019. 6. 3. 00:06

 

 

 

 

 

 

촉석루

 

 

 

 

 

 

 

촉석루중삼장사기실비(矗石樓中三壯士記實碑)

선조 임진년 5월에 문충공 학봉 김성일은 영남초유사로 진양성에

다다라 충의공 대소헌 조종도와 정의공 송암 이로와 함께 촉석루에 오르다.

때는 왜란으로 강토에 선지피 낭자하니

벼슬아치는 모두 달아나고 군사와 백성은 흩어졌다.

성안은 비어 괴괴하고 강물만 예대로 아득히 흐르는데

멀리 눈을 들어 조국의 산하를 바라보니 오직 슬프고 분함에 마음 저려

조공과 이공은 초유사 김공의 손을 잡고 삶이 차라리 욕되도다.

강물에 몸을 던져 한을 씻자 하였으나,

학봉은 짐짓 잠시의 괴롬을 잊을 뿐이라며 한은 천추에 씻지 못하리니

오직 한 번 뿐인 장부의 죽음을 허술히 하랴.

여기 푸른 물굽이 상기 뜻있어 흐르거늘 남은 목숨은 더욱 원수 앞에 질기리니,

이 유서 있는 터전을 지켜 나라에 갚으리라.

분연히 맹세하여 술 한잔 높이 들고 시 한 수를 읊으니

<촉석루 삼장사는 잔을 들고 굽어볼 제 뜻있어 흐르는 물 웃는 가슴 미어지다.

세월도 강물이거니 넋은 길이 남으리라.>

이 시는 뒤에 순찰사로 부임한 오공숙이 현판에 새겨 높이 달으니,

이로써 이 사실이 세상에 널리 알린 바 되어 후인들이 일컬어 촉석루 삼장사라 하였다.

세 현자의 자세한 내력은 각기 그 문집과 사승(私乘 : 개인적인 기록)에 남았으니,

여기 다만 이 한 가지 사실만을 돌에 새겨서 촉석루 곁에 세우고

지나는 나그네로 하여금 발을 멈추게 하니,

이는 지금을 거슬러 삼백 예순 아홉 해인 임진년의 일이니다.  
최재호 새기고, 허민 씀

 

 

*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판서에 추증된 김성일(金誠一, 1538 - 1593)

조종도(趙宗道, 1537 - 1597), 이조판서에 추증된 이로(李魯, 1544 - 1598)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로,

삼장사에 대한 기록이 문헌마다 달라 국사편찬위원회의

유권해석과 경상남도지사의 허가를 받아 1963년에 세웠으며,

비문은 중재(重齋) 김황(金榥, 1896 - 1978)이 1960년에

찬(撰 : 시가나 문장 중에서 잘된 것을 골라 모아 엮다)하였다.

 

 

 

* 촉석루(矗石樓) 삼장사(三壯士) 시(詩)

 

矗石樓中三壯士(촉석루중삼장사)
촉석루 위 마주앉은 세 장사들은 

一杯笑指長江水(일배소지장강수)
한잔 술로 웃으면서 남강물을 가리키네  

長江之水流滔滔(장강지수유도도)
남강물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흘러가니
 波不渴兮魂不死(파불갈해혼불사)
강물이 마르지 않는 한 넋도 없어지지 않으리

 

 

 

 

 

 

 


 

촉석문(矗石門)

 

 

 

논개(論介)

(수주 변영로, 樹州 卞榮魯)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石榴)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魂)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진주성(晋州城, 사적 제118호)

 진주성은 외적을 막기 위하여 삼국시대부터 조성한 성으로,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깃든 유서 깊은 곳이다.

고려 말 우왕 5(1379)에 목사 김중광이 왜구의 잦은

침범에 대비하여 본래의 토성이었던 것을 석성으로 고쳐 쌓았으며,

임진왜란 직후에는 성의 중앙에 남북으로 내성을 쌓았다.

 

선조 25(1592) 10월 왜군 2만여 명이 침략해 오자 ,

김시민(金時敏) 장군이 이끄는 38백여 명의 군사와 성민이 힘을 합쳐 물리쳤으니,

이것이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이다.

이듬해 6월에는 왜군 10만여 명이 다시 침략했고,

민간인과 관료, 군인 등 7만여 명이 이에 맞서 싸우다

모두 순절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1972년에는 촉석문을 복원하였고,

1975년에는 일제 강점기에 허물어졌던 서쪽 외성의 일부와 내성의 성곽을 복원하였다.

1979년부터는 성 안팎의 민가를 모두 철거하는 등 진주성 정화사업을 시작하여,

2002년에 공북문 복원공사를 마지막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성곽의 둘레는 1,760m이고 높이는 5 ~ 8m이며,

 성 안에는 촉석루, 의기사, 영남포정사, 북장대, 창렬사,

호국사, 서장대, 임진대첩계사순의단, 국립진주박물관 등이 있다.

 

 

 

 

 

 

 

 

 

 

 

 

 

 

 

진주성 임진대첩 계사순의단(晉州城 壬辰大捷 癸巳殉義壇)

 

 

 

진주성 임진대첩 계사순의단(晉州城 壬辰大捷 癸巳殉義壇) 

이 단은 진주성의 임진대첩과 계사순의 때에 순절한 호국영령을 기리기 위하여

진주 시민의 소망을 담아 문화공보부와 진주시가 세운 제단이다.

198612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98712월에 마쳤다.

단의 크기는 가로 18m, 세로 24m, 높이 3.6m이고,

3단으로 이루어진 네모난 단 위에 가로 9.7m, 높이 3.5m의 대첩비를 세웠다.

단의 왼쪽과 오른쪽 옆면에는 돋을새김으로 당시의 역사적 장면을 표현하였고,

앞뒤면에는 임진대첩과 계사순의의 역사적 기록을 새겼다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킨 호국영령들을 기리고,

그들의 역사정신을 가슴 깊이 이어받고자 이 단을 세운다.>

 

 

 

 

 

 

 

 

 

 

 

 

 

 

 

호국(護國)의 종(鐘) 

종(鐘)의 높이는 2.7m, 지름은 1.7m이며, 무게는 500kg이다.

종신(鐘身)에는 문양(文樣)이 부조(浮彫)되어 있는데,

종두(鐘頭)에는 호국(護國)을 상징(象徵)하는 용(龍)을 주조(鑄造)하고,

상하대(上下臺)와 유곽에는 진주시의 상징인 석류꽃과 석류(石榴)를 연속적으로 새기고,

유두에는 무궁화(無窮花)를 장식했다.

전체적인 모습은 상원사종(上院寺鐘)과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을 본뜬 것으로,

 종신에는 논개 부인상과 촉석루 그리고 대나무가 조각되어 있다.

 

 

 

호국(護國)의 종(鐘)

이 호국(護國)의 종(鐘)은 서기(西紀) 196012

진주시민(晋州市民)의 뜻을 모아 선조(先祖)들의 거룩한 호국(護國)의

얼을 계승선양(繼承宣揚)하기 위(爲)하여 주조(鑄造)된 것이다.

 

당초(當初) 촉석문루(矗石門樓)에 걸려 있었으나,

문루(門樓)가 종(鐘)의 무게를 지탱(支撑)하지 못하여

이전(移轉)을 추진(推進)하던 중(中),

일본국(日本國) 장기현(長岐縣) 대촌시(大村市)에 거주(居住)하는

재일동포(在日同胞) 최복순(崔福順) 여사(女史가)

많은 사람들에게 애국애족(愛國愛族)의 정신(精神)을 일깨워 주고,

아름답고 가치(價値) 있는 삶의 자세(姿勢)를 행동(行動)으로 보여주기 위(爲)하여,

현해탄(玄海灘) 건너 이국(異國)에서 각고성실(刻苦誠實)로

모아온 거액(巨額)의 사재(私財)를 희사(喜捨),

이곳에 종각(鐘閣)을 건립(建立)하고 이전(移轉)하게 된 것이다.

 

유서(由緖) 깊은 이곳 성(城)터에 뜨거운 애국(愛國)의

충정(衷情)으로 호국(護國)의 종각(鐘閣)을 높이 세우니

꺼지지 않는 민족(民族)의 기상(氣象)이

영원무궁(永遠無窮)토록 소리 높이 울려 퍼질 것이다.

1987년 12월

진주시장(晋州市長) 문백(文伯)

 

 

호국종 

진주성 엣 성안에 울려 퍼지는 호국 종소리

대처럼 푸른 절개 석류꽃보다 붉은 충성

빛나는 역사전통을 잊지 말라 울리네

가슴을 파고드는 은은한 호국 종소리

내 고장 내 나라 사랑 우리 소원 번영과 통일

겨레의 자랑과 영광 이룩하라 울리네

호국종 치는 소리 이 종소리 들리거든

몸을 바로 하고 옷깃 여미시고

가슴에 두 손을 얹고 다시 다짐하시오.

(1980년 3월 1일 노산 이은상 씀)

 

 

 

 

 

 

김시민장군전공비(金時敏將軍戰功碑)와 촉석정충단비(矗石旌忠壇碑)

 

 

 


 

 

 * 김시민장군전공비(金時敏將軍戰功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호)

 이 비는 임진왜란(壬辰倭亂) 3대첩(大捷)의 하나인

진주성 싸움을 승리로 이끈 주장(主將) 김시민 장군의 전공을 새긴 비이다.

당시 김시민 장군은 진주목사(晋州牧使)로서 판관 성수경(判官 成守慶),

곤양군수 이광악(昆陽郡守 李光岳) 등과 함께

주도면밀(周到綿密)한 작전을 펼쳐 왜적을 격퇴(擊退)하였다.

 

비문(碑文)에는 1천 명 되지 않는 병력으로

10만 명의 군대를 물리쳤다고 했으나,

다른 기록에는 3,800명의 적은 병력으로 2만여 명의

왜적을 격퇴하고 진주성을 지킨 것으로 나타난다.

김시민 장군은 적은 군사로서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몰려오던 왜적의 예기(銳氣)를 꺾고 승리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영남에서 호남으로 나아가는 길목인 이곳 진주성을 사수(死守)함으로써

왜병의 호남 진출을 봉쇄하여 임진왜란 초기에 우리측에

불리했던 전세를 뒤집고 전열을 가다듬은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 비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진주고을 백성들의 열망에 의해

광해군(光海君) 11(1619) 7월에 세워졌는데,

성균관 진사 성여신(成汝信)이 글을 짓고,

성균관 생원 한몽인(韓夢寅)이 글씨를 썼다. 

 

 

* 촉석정충단비(矗石旌忠壇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호) 

이 비(碑)는 조선 선조(朝鮮 宣祖) 26(1593) 61929일 사이에

있었던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장렬하게 순국한 삼장사(三壯士)

​김천일(金千鎰), 황진(黃進), 최경회(崔慶會) 및

군관민의 영령을 제사하기 위하여 세운 정충단의 비석이다.

 

임진왜란 초기에 왜적의 기습적 공격에 미처 전열을 정비하지 못한

우리는 한동안 육지의 전투에서 곤경에 처했다.

그러나 우리 군대가 흐트러진 대오를 가다듬기 시작하면서 왜적을 제압하자,

수세에 몰린 적들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

아군의 10배에 가까운 병력으로 일대 반격을 펼쳤으나,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하여 물러갈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제1차 진주성 싸움(159210510)이다.

 

그들은 이에 대한 보복전을 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특명에 의해 가토 키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이끄는 왜군 최정예(最精銳)의 대군을 편성하여 2차로 진주성을 공격해 왔다.

이때 삼장사를 중심으로 뭉친 진주성의 군관민은 압도적인 적세에

두려움 없이 맞서 전원이 순국하는 장렬한 최후를 맞았던 것이다.

숙종(肅宗) 12(1686)나라를 위해

충절을 다한 이들을 위해 촉석루 동쪽에 정충단을 세운 것이다

 

 

 

 

 

 

진주성 관리사업소

 

 

 

 

 

 

 

 

 

 

 

 

 

 

 

 

 

 

 

 

 

 

 

 

 

 

 

 

 

 

 

 

 

 

 

 

 

 

 

 

 

 

 

 

 

 

 

천자총통(天字銃筒)

 

 

 

천자총통(天字銃筒)

천자총통(天字銃筒)은 조선 태종 때부터 제작되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사용된 화포 중에서 가장 큰 화포(火砲)이다.

이 포는 성(城) 안에 설치되어 적의 진영을 격파하고,

을 공격할 때에는 성벽을 무너뜨리는데 사용하였다.

또한 수군(水軍)의 거북선, 판옥선에 장착되어

적선을 격파하는데도 큰 성능을 발휘하였다.

특히 진주성 전투에서 사용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 포는 동차(童車)에 장착하여 사용하였는데,

길이 2.3m의 대장군전과 새알처럼 생긴 철환 100개를 발사할 수 있으며,

포의 사정거리는 900(1,136m)이다.

현재 두 점의 천자총통이 전해 오고 있는데,

그 중 한 점이 보물(寶物) 647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자총통(地字銃筒)

 

 

 

지자총통(地字銃筒)

지자총통(地字銃筒)은 조선 태종때부터 제작되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사용된 화포(火砲) 중에서 천자총통 다음으로 큰 화포이다

     이 포는 성(城) 안에 설치되어 적의 진영을 격파하고,

성을 공격할 때에는 성벽을 무너뜨리는데 사용하였다.

또한 수군(水軍)의 거북선, 판옥선에 장착되어

적선을 격파하는데도 큰 성능을 발휘하였다.

특히 진주성 전투에서 사용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 포는 동차(童車)에 장착하여 사용하였는데,

길이 1.8m의 장군전과 새알처럼 생긴 철환 200개를 발사할 수 있으며,

포의 사정거리는 800(1,009m)이.

현재 세 점의 지자총통이 전해오고 있는데,

두 점은 보물(寶物) 862 · 863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자총통(玄字銃筒)

 

 

 

현자총통(玄字銃筒)

   현자총통(玄字銃筒)은 조선 태종 때부터 제작되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사용된 화포(火砲) 중에서 천자총통, 지자총통

다음으로 큰 화포이나 지자총통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이 포는 성(城) 안에 설치되어 적의 진영(陣營)을 격파하고,

성을 공격할 때에는 성벽을 무너뜨리는데 사용하였다.

 또한 수군(水軍)의 거북선, 판옥선에 장착되어

적선을 격파하는데도 큰 성능을 발휘하였다.

특히 진주성 전투에서 사용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 포는 동차(童車)에 장착하여 사용하였는데,

길이 1.5m의 차대전과 새알처럼 생긴 철환 100개를 발사할 수 있으며

포의 사정거리는 800(1,009m)이.

현재 다섯 점의 현자총통이 전해오고 있는데,

두 점은 보물(寶物) 885  · 1233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臣)은 진실로 둔하여 시골에 자취를 감추고 있었습니다만

이제 왜란을  당하여 종묘사직이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니 저희 선조 삼대가 조정에 벼슬하였습니다.
신묘한 꾀가 비록 미치지는 못하오나

복수하려는 마음을 진실로 가지고 있습니다.
까닭에 목숨을 내걸고 4월 22일에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방어하였습니다.
다행히 전하의 빛나는 위세에 힘입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죽기를 맹세하고 온 힘을 다하여 죽은 다음에야 그만둘 것입니다.
<임진년(1592년) 4월 의병을 일으키며 곽재우(郭再祐, 1552 - 1617)>

 

 

나는 충의를 맹세하고 진주성을 지켜

국가 중흥의 근본으로 삼을 것이니,
힘을 합쳐 싸우면 천 만의 섬 오랑캐인들 무엇이 두려우랴!
나를 따르는 자 살 것이며 도망하는 자 멸할 것이니

감히 도망하는 자는 목을 베리라.
나의 엄지(拇指)는 이미 떨어지고

식지(食指)와 장지(長指)로 활을 당기다

남은 세 손가락마저 떨어질 때까지 싸우리라.

<임진년(1592년) 10월 초 김시민(金時敏, 1554 - 1592)>

 

 

 한 번 죽을 것을 기약하고 곧 범의 굴로 바로 쳐들어가

요망한 적들을 소탕하여 나라의 수치를 만 분의 일이라도 씻으려 합니다.

성공하고 실패하고,

잘 되고 못 되는 것은 제가 미리 생각할 바 아닌 것임을 삼가 갖추어 아룁니다.

<임진년(1592년) 4월 경상도로 첫 출전하면서 조정에 보고한 글, 이순신(李舜臣, 1545 - 1598) 

 

 

                                           조정에 관록 있던 몸이 바다 동쪽에 떨어져 있으니

                                          아득한 길 천 리에 믿을 것은 바람소리 뿐일세

                                          서울 소식은 험난한 파도 밖에서나 들을 뿐이요

                                          부모님 얼굴은 꿈속에서나 뵈을 수 있을는지

                                          두 눈을 뜨고 같은 해와 달을 보기가 부끄럽고

                                          일편단심 그리운 것은 고국땅 밟는 것 뿐일세

                                          강남땅 무성한 숲속에는 꾀꼬리 소리 요란할 터인데

                                          혹시나 빠른 배가 나타나 이 몸을 실어다 줄수 있을는지

                                               <강항(姜沆, 1567 - 1618) 선생께서 1598년 일본에 포로로 잡혀가 지은 시>

 

 

제24회 88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기원하는

전국 성화봉송 행사기간 중 진주시 방문 때 성화안치를 위해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에서 설치하여 기증한 시설물로서,

현재에는 매년 개최되는 개천예술제 행사 중 성화안치대로 활용하고 있다.

 

 

 

 

 

 

국립진주박물관

국립진주박물관은 가야문화를 소개하고,

 서부경남의 고고학적 연구 · 조사를 담당하는 국립기관으로 1984년 11월 2일 개관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의 최대 격전지인 진주성 내에

자리 잡고 있는 입지조건과 임진왜란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1998년 1월 15일 임진왜란전문역사박물관으로 재개관하였다.

1997년부터 국내외에서 임진왜란 관련 유물 약 600여 점을 대여 받았으며,

다시 1998년에 56점을 수집하여 임진왜란 전문역사박물관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전시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시간의 흐름을 위주로 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난 원인과 과정,

결과 및 후대평가에 이르기까지 다각적인 방향에서 관련된 유물 20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2001년 11월 19일 국립진주박물관은 새롭게 두암관을 개관하면서

더욱 다양하고 품격 높은 문화를 소개하였다.

경남 사천 출신의 재일교포 실업가 두암 김용두 선생이

수십년 간 일본에서 수집한 우리 유물 가운데 179점을 기증하여

그 중 백자철화죽문죽절 형병을 비롯한 청자, 분청사기, 백자, 목제생활품,

금속공예품, 회화, 서예작품 등 다양하고 아름다운 우리미술품 10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2008년에는 역사문화실을 신설하여 경남 서부지역의 전통문화를 소개하고,

지역문화를 선도하는 문화중추시관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山淸 泛鶴里 三層石塔)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山淸 泛鶴里 三層石塔)

이층 기단에 삼층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 양식 석탑이다.

꼭대기 장식(상륜부, 相輪部)과

하층 기단 덮개돌(갑석, 甲石) 아래는 남아 있지 않다.

석탑 재질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섬장암

(閃長岩, 반짝이는 장석으로 된 암석)으로 만들어졌고,

덮개돌 이하 부분 복원에도 동일한 섬장암을 사용했다. 

석탑 외면에는 부조상이 정교하게 새겨졌다.

상층 기단에는 8구의 갑옷 입은 신장상

(神將像, 무력으로 불법을 수호하는 신)이 무기를 들고 있다.

1층 탑신은 공양하는 보살상 4구가 조각되어 있는데,

정면의 보살상만 앞을 바라보고 있다.

 신장상과 보살상의 조합은 독특한 사례로

9세기 통일신라 석탑 양식의 중요한 지표가 되며,

당대의 뛰어난 조각기술과 불교미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 준다. 

 

 

<이 석탑은 원래 경호강이 바라보이는 산청 둔철산 자락에 있었으나,

조선시대 어느 시점에 절이 사라지면서 석탑도 허물어졌다.

그러다가 1941년 한 일본인이 이 석탑 부재들을 매입하면서 산청을 떠났고,

대구지역 공장 공터로 옮겨진 후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유물 실태조사 과정에서 확인해 이듬해 서울로 옮겨졌다. 

그러다가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에서 해방되자

미군 공병대가 1946년 5월 서울 경복궁 안에 세웠으나,

1994년 역사바로세우기사업의 일환으로 경복궁이 정비되면서 다시 해체돼

무려 23년 간이나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햇빛을 보지 못했다. 

 

국립진주박물관은 석탑 재건과 전시를 위해 이관을 요청해

마침내 2017년 2월 고향인 경남 산청과 인접한 진주로 반환받았다.

이후 박물관은 야외 석조물 정원에다가 석탑 부재들을 다시 쌓아,

이듬해 11월 석탑 복원을 완료했다.

일제 강점기 때 석탑 운반 과정에서 사라진 하대석을 복원하면서

산청 범학리 근처 정곡리에서 석탑 원석인 섬장암(閃長岩) 채석장을 찾아내 사용했다.

높이는 4.145m, 무게는 대략 12t이다.> 

 

 

 

 

 

 

 

 

 

 

 

 

 

 

 

 

 

 

 

 

 

 

불상연화대좌(佛像蓮花臺座)

 

 

 

 

 

 

 

석등연화대석(石燈蓮花臺石)

 

 

 

 

 

 

 

석탑면석(石塔面石)

 

 

 

 

 

 

삼층석탑(三層石塔)

 

 

 

 

 

전축기단(塡築基壇)

 

 

 

 

 

 

 

전축기단(塡築基壇)

건물의 기단부(基壇部)를 벽돌로 쌓은 것을 전축기단(塡築基壇)이라 한다.

기단석 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높이 75cm 가량의 탱주(撑柱)를 세우고,

그 사이사이에 벽돌을 쌓은 다음 갑석(甲石)을 덮은 형태이다.

사용된 벽돌은 한 변이 긴 5각형의 형태로 길이 32cm · 두께 7cm 내외이며,

긴 변을 밖으로 나오게 하고 탱주와 마주치는 곳에서는 길이를 맞추기 위해

각층(各層)마다 반절된 벽돌을 사용하였다.

갑석은 석탑(石塔)의 우동단(隅棟端)과 같이 약간 들린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전축기단의 발견에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있는 것으로서,

건축사(建築史)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1985년 국립진주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하였다. 

 

 

진주성보수정화비(晋州城補修淨化碑)

 

 

 

진주성보수정화비(晋州城補修淨化碑)

여기 진주성(晋州城)은 선인(先人)들의 애국충절(愛國忠節)이 깃든 곳입니다.

조선(朝鮮) 선조(宣祖) 25(1592)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을 때

그해 10월에 왜장(倭將) 우시등원랑(羽紫藤元郞, 하시바 토오겐로)이 이끄는

3만 군()이 영호남(嶺湖南)의 관문(關門)인 이곳 진주성(晋州城)을 공격해 왔습니다.

당시 성주(城主)셨던 김시민(金時敏) 장군(將軍) 휘하(麾下) 성군(城軍)

9일 간()에 걸쳐 피나는 접전(接戰)으로 적()을 무찌르니,

이 승전(勝戰)이 청사(靑史)에 길이 빛나는 진주성대첩(晋州城大捷)이었고,

()은 잔병(殘兵)을 이끌고 패주(敗走)하였으나,

김시민(金時敏) 장군(將軍)은 아깝게도 이 싸움터에서 전사(戰死)하셨습니다.

 

이듬해인 계사년(癸巳年) 6월에

지난해 임진년(壬辰年) 싸움의 참패(慘敗)를 설욕(雪辱)하기 위하여,

가등청정(加藤淸正, 가토 기요마사)이 이끄는 왜병(倭兵) 6만 대군(大軍)

조총(鳥銃)으로 무장(武裝)하여 파죽(破竹)의 기세(氣勢)로 재침(再侵)해 옴에,

왜적(倭敵)을 맞은 군(· (· ()이 합심(合心)하여 공방전(攻防戰)을 치르던 가운데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 황진(黃進) 등을 비롯하여 6만여 군(· (·()

()의 운명(運命)과 함께 장렬(壯烈)히 순국(殉國)하여 천추(千秋)의 빛을 남겼으며,

 의랑(義娘) 논개(論介)가 적장(敵將) 모곡촌육조(毛谷村六助, 게야무라 로쿠스케)

유인(誘引)하여 남강(南江)에 투신(投身)한 것은 꽃다운 순절(殉節)이었습니다.

우리 조상(祖上)들의 슬기와 얼이 담긴 이곳 성터를 그동안 수차(數次) 손질하여 왔으나,

성안에 세워진 마을이 있어 손대기 어려웠던 관계(關係)로 정비(整備)를 미루어 오던 중,

1979년부터 많은 사업비(事業費)를 투입(投入)하여 성곽(城郭) 500여 미터를 복원(復元)하고,

촉석루(矗石樓)를 비롯하여 많은 유적(遺跡)을 보수(補修) 정비(整備)하였으며,

민가(民家) 751()을 헐어 내어서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진주성대첩(晋州城大捷)의 승전(勝戰) 유품(遺品) 등과 가야문화권(伽倻文化圈)

유물(遺物)을 전시(展示)하기 위한 박물관(博物館)도 건립(建立)하게 되었습니다.

 

선인(先人)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새롭게 갈고 다듬는 뜻은,

조국(祖國)과 계레를 위해 순절(殉節)한 선열(先烈)의 숭고(崇高)

호국정신(護國精神)을 만세(萬歲)에 계승(繼承)코자 함이니,

()을 찾은 사람은 이 뜻을 되새겨 주시기 바랍니다.

19845월 일

진주시장(晋州市長) 윤희윤(尹熙潤) 근찬(謹撰)

 

 

개천예술탑(開天藝術塔)

 

 

 

 

 

창제취지문(創祭趣旨文)

하늘과 땅이 있는 곳에 꽃이 피는 것과 같이

인류(人類)의 역사(歷史)가 있는 곳에 문화(文化)의 꽃이 피는 것은

아름다운 우주(宇宙)의 섭리(攝理)가 아닐 수 없다.

예술(藝術)은 문화의 또 한 겹 그윽한 꽃이요,

예술(藝術)이 없는 세기(世紀)에는

향기(香氣)와 참다운 인간정신(人間精神)의 결실(結實)이 없는 것이다.

한때 예술(藝術)이란 권력자(權力者)를 위하여

궁정(宮庭) 속의 비원(秘苑)에 피는 꽃인 줄만 알았으나,

온전(穩全)한 예술(藝術)이란 사람의 목숨과 같이

영원(永遠)히 자유(自由)롭고 대중적(大衆的)인 것이다.

기름지고 오랜 땅 위에 커다란 꽃송이가 피어나듯이

힘차고 참다운 마음 위에서만 위대(偉大)한 예술(藝術)은 꽃피는 것이다.

포학(暴虐)의 모진 겨울에서 해방(解放)된 우리 겨레의 목숨 위에

그 깊숙한 서라벌의 예술적(藝術的) 피는 바야흐로 꿈틀거리며

새로운 백화난만(百花爛漫)을 설계(設計)하고 있다.

여기 독립(獨立)된 1주년(周年)을 길이 아로새기고

엄연(儼然)하게 되살아난 겨레의 아우성과 마음의 노래와

그 꽃의 일대 성전(聖典)을 사도(史都) 진주에 이룩하여

젊은 전(全) 영남(嶺南)의 정성(精誠)으로

개천(開天)의 제단(祭壇) 앞에 삼가히 받들기를 뜻하는 바이다.

단기 4282(1949) 개천절

 

진제양주예연기념비(晋濟兩州藝緣紀念碑)

 

 

제15회 개천예술제 서제의 날에

서기 1964년 11월 6일

제주오현고등학교장 고봉식

 

<멀리 바다 건너의 두 살림터이나 촉석루 휘어 감는 남강의 흐름에서

또한 한라의 기슭에서 빚어진 아름다움을 그리는 넋이의 두 줄기는

서로 한데 어울려 줄기찬 메아리 되어 퍼지나니

여기 그 울림터에 뜻을 모아

굳히는 보람을 다짐하고자 바위에 새겨 이끼에 쌓이는 날을 기다리다.>

 

3 ·1운동 기념비와 진주지구 전승비

 

 

3 ·1운동 기념비

 

 

3 ·1운동 기념비

 1919년 3월 18일 진주군 진주면 내 각처에서는

대규모 군중이 집결하여 3 ·1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3 ·1독립운동 기념비는 이를 기념하고,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애국애족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1971년 3월 1일 진주시민들이 결의하여 건립하였다.

1919년 2월 말 고종의 인산에 참여하였다가 3 ·1운동을 목격한 김재화,

정용길. 심두섭 등은 귀향 후 김재화의 집에 모여 비밀회합을 가지면서

진주에서의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이때 이강우, 권채권, 강달영 등도 가세하였다.

 

3월 18일 12시 진주교회의 종소리가 울리는 것을 시작으로

중앙시장, 재판소, 촉석공원, 매립지, 대안동, 촉석루 입구, 봉곡동 등

곳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천 명의 군중이 대한독립만세을 외치기 시작했다.

오후 4시경에는 시위군중이 2만여 명으로 늘어난 가운데

경남도청 앞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까지 진출하였다.

일제 헌병들과 경찰들은 시위대에게 잉크물을 던져 검거하는 방식을 택했는데,

시위가 더욱 산발적이 되어 야간에도 만세소리가 그칠 줄 몰랐다.

그리고 3월 19일과 20일, 21일에도

상가철시와 함께 맹렬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3월 18일부터 21일까지 4일에 걸쳐 전개된 진주 지역의 독립만세시위는

기생 · 걸인들까지 단체로 참여할 정도로 전민족적 성격의 시위였다.

진주장날을 이용하여 진주뿐 아니라 서부경남 각지의 민중이 함께

항거하였다는 점에서 경남의 대표적 만세시위라 하겠다.

국가보훈처에서는 이를 기념하여

2004년에 3 ·1운동 기념비를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진주지구 전승비

 

 

진주지구 전승비

 진주지구 전승비는 미 제25사단을 주축으로 한 <킨, KEAN)>

특수임무부대가 진주지구에 쳐들어 온 북한군 제6사단을 격퇴시킨

전승을 기리기 위해 육군 1206건설공병단이 1958년 7월 10일 건립하였다.

북한군은 남한을 공산화한다는 목표로 개전 한 달여 만인

7월 말 낙동강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미 제25사단은 북한군 제6사단을

진주 일대에서 맞아 6일 간의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킨특수임무부대>로 구성된 미 제25사단의 사활을 건 방어전투로,

북한군의 부산 진출을 저지하고

진주 동쪽 지역에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으며,

이로써 낙동강선 방어에 성공한 유엔군은

전력을 회복하여 총반격을 개시할 수 있었다.

국가보훈처에서는 진주지구 전승비를 기념하여

2004년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진주지구 전적 기공비

남강은 논개의 옛 사적으로 더불어 빛나고,

진양은 이제 자유수호의 신()의 꽃다운 전적으로 새롭도다.

호남 일대를 유린한 괴뢰군 제6 9사단은

단기 4283729일 진주지구에 진출하여 왔으므로,

25사단의 기간으로 편성된<칸>기동부대도

진주 서방(西方)에서 이를 맞아 연일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특히 서북능선을 둘러싸고 전개된

피아(彼我)의 쟁탈전은 열세 번을 거듭하도록 가열하였으며,

대구 침공에 실패한 적은 마산을 점령하여 서쪽으로부터 부산에

출하려는 새 기도 밑에 831일 밤 전면적인 대공세를 취하여 왔다.

토(寸土)를 다투는 격전 속에 일진일퇴를 거듭하여 8일 간을 계속하여

현 전선을 고수한 결과 총반격의 계기를 조성하고

국련군(國聯軍) 승리의 원인을 이루었다.

이 영웅적인 무훈(武勳)을 높이 찬양하고자

이 돌을 세워 영원히 후세에 전하노라.

단기 4291년 11월 10일

육군 제1206 건설공병단 세움

 

 

 

 

 

 

 

 

 

 

 

 

 

 

 

 

 


 

 

 


 

 

 

 

 

 

 

 

서장대(西將臺)

 

 

 

 

 

서장대(西將臺,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호)

진주성의 서문에 속하는 장군의 지휘소이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회룡루(回龍樓)로 기록되어,

규모는 작으나 남장대인 촉석루와 같은 다락집이었다고 전한다.

지금의 건물은 허물어진 것을 1934년 서상필(徐相弼) 씨가 출자하여 새로 지은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옆에서 보면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을 올린 목조 기와집이다.

현재 걸려 있는현판의 글씨는 정명수(鄭命壽) 씨가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