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 짜 : 2018년 12월 25일(화요일)
* 날 씨 : 구름 많음
* 산 행 지 : 지리산 동북부 폐칠암자터
* 산행시간 : 8시간 30분(운행시간 4시간 52분 + 휴식시간 3시간 38분)
* 산행속도 : 보통 걸음
* 산행인원 : 5명(순옥엉가, 수막새, 적석, 곰쉐끼, 선함)
* 산행일정
08:50 적조암주차장(430m)
09:15 박쥐굴 갈림길(산죽비트)
09:37 - 09:54 박쥐굴(700m)
10:14 - 10:21 지장사지(760m)
10:31 상대날등 묵은 헬기장
10:49 금낭굴 갈림길
11:06 - 11:11 금낭굴(915m)
11:58 상대날등 꼭지점 - 안락문 갈림길
12:04 오뚝이바위 - 안락문 갈림길
12:05 송대 - 안락문 갈림길
12:08 - 12:11 안락문
12:14 - 12:22 함양 독바위(1117.5m)
12:24 - 12:27 신열암지(1100m)
12:29 - 12:32 고열암지(1085m)
12:35 - 12:40 의론대
12:49 선녀굴 사거리
12:52 - 15:00 선녀굴
15:03 선녀굴 사거리
15:22 - 15:25 유슬이굴(935m)
15:35 선열암 사거리(920m)
15:43 - 15:55 선열암지(950m)
16:02 선열암 사거리
16:03 배바위
16:08 - 16:13 환희대(825m)
16:25 - 16:28 돌배나무(노장동마을, 737m)
16:48 - 17:04 박쥐굴 갈림길(산죽비트)
17:20 적조암주차장
함양군 휴천면 운서리에 자리 잡은 적조암,
지리산 동북부 지역의 상대날등과 황새날등 및 솔봉능선 일대에 흩어져 있는 칠암자터,
언제부터인가 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단지 그 터만 남아 있을 뿐이지만,
지장사지 - 금낭굴 - 신열암지 - 고열암지 - 선녀굴 - 유슬이굴 - 선열암지를 잇기로,
모이면안다2호점 회원들의 2018년 송년산행인 셈이요,
나로선 이런저런 사정으로 참말로 오랜만에 함께하는 게 아니던가?
지리산 정규 탐방로가 아니고선 세월이 갈수록 묵어만 가는 길,
지리산 동북부 칠암자터 탐방이 처음은 아니지만,
제대로 이으면서 찾아갈 수나 있으려나?(08:50)
노장대골,
상대날등과 황새날등 및 솔봉능선의 물이 모여 흐르고
출입금지라지만 어쩔 수 없이 가야만 하고
계곡 건너 고로쇠통이 보이는데,
이제 1분 남짓이면 박쥐굴 갈림길인 옛 산죽비트에 이르고
박쥐굴 갈림길,
산죽이 잠깐 숨을 죽이는 자그마한 공터가 있는 곳으로,
그전엔 함양군에서 설치한 김종직의 유두류록 및 산죽비트 안내판이 있었으며,
바로는 노장동 마을터에 있는 큼지막한 돌배나무로 이어지고,
박쥐굴로 가자면 왼쪽의 노장대골 물을 건너야 하고(09:15)
산죽비트,
빨치산들은 토벌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거나 산의 곳곳에
숨어다니며 토벌대의 추격을 피하면서 유격전을 펼치기도 하였다.
이들은 지리산의 험난한 계곡과 능선을 따라 자연적인 지형지물을
이용한 비트를 만들어 숨어서 토벌대의 추격을 따돌리곤 하였는데,
북한에서 남파된 간첩이나 무장공비 등이
지금도 많이 사용하는 은신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빨치산은 산죽, 바위, 낙엽, 굴을 이용한 비트를 주로 이용하였다.
이곳은 비트 중 산죽비트를 재현한 것으로,
빨치산들은 지리산의 곳곳에 분포되어 있는 울창한 산죽에 몸을 은신하여
토벌대의 발견이 힘들도록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종직(金宗直, 1431 ~ 1492)의 "유두류록(遊頭流錄)" 탐방코스,
조선초기의 성리학자이며 문신으로 공의 자는 계온(系溫), 호는 점필재(佔畢齋)이고,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며, 본관은 선산(善山)이고, 경남 밀양이 고향인 분이며,
함양군수(1470.12.28 ~1475.12.28)를 지냈을 당시 유두류록을 남겼다.
유두류록은 1472년(성종 3년)에 쓴 김종직의 지리산 기행문이며,
함께 대동한 사람은 유호인(兪好仁), 임대동(林大仝), 한인효(韓仁孝),
조위(曺褘), 승려 혜공, 법종, 아전 옥곤과 용상 그리고 노비들 몇 명이었다.
유람 도중 현실적 갈등과 모순이 없는 무릉도원을 희구하였으며,
선생은 사림파 지식인과 목민관으로서의 자세를 가지고 산행 도중
만나 매를 잡는 사람들의 움막을 보고 민생의 어려움을 걱정하였고,
당시의 숭유억불정책과도 상통하는 승려들의 혹세무민적 행적도 비판을 한다.
한편 천왕봉에 올라 사방을 조망하며 주위의 명산들을 열거하며 설명하는
지리적인 혜안에서는 선생의 국토 산하에 대한 애정과 지식을 엿볼 수 있다.
선생의 단출한 여행단 구성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여느 지리산 행적과 비교가 되어 존경심까지 불러 일으키며,
선생의 등로는 지금의 의식으로 볼 때에
하나의 개척 산행으로 탐구 가치가 있는 지리산 기행록이다.
* 산행일자 : 1472년(성종 3년) 8월 14일 ~ 18일
* 산행코스 : 함양 관아 - 엄천 - 화암 - 지장사 - 선열암 - 신열암 - 고열암(1박) - 청이당 - 영랑대 -
해유령 - 중봉 - 천왕봉 - 성모사(2박) - 통천문 - 향적사(3박) - 통천문 - 천왕봉 - 제석봉 -
세석 - 창불대 - 영신사(4박) - 영신봉 - 직지봉 - 실덕리 - 등구재 - 함양 관아(산행종료)
노장대골을 건너고
키가 아주 큰 고욤나무,
떨어진 고욤을 몇 개 먹어 보는데,
얼고 녹고를 되풀이해서 그런지 얼마나 달고 맛있던지
갈라진 바위
오른쪽으로 틀어 비스듬히 오르고
박쥐굴,
두 개의 거대한 바위가 서로 기대어 있는 형태로,
입구는 좁지만 내부는 상당히 높고 넓으며,
지리99 <유두류록> 탐구산행 시 우연히 발견했다는데,
그 당시에는 박쥐가 많이 살아 박쥐굴이라 했다고,
지금은 박쥐라곤 찾아볼 수가 없어 아쉽기도,
그 많은 박쥐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09:37 - 09:54)
박쥐굴에서 오른쪽으로 틀어,
상대날등에서 흘러내린 지능선을 넘어 왼쪽으로 오르고
커다란 바위지대를 왼쪽으로 돌아 지능선으로 오르고
숯가마터 흔적인 듯?(10:09)
지능선으로 올라서서 왼쪽으로 오르는데,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돌배나무(양민 거주지)에 이르는 듯?
지장사지,
동북부 폐칠암자터 가운데 첫 번째로 들른 셈이요,
지금은 잡목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어 조망도 없고 너저분하지만,
제법 널따란 터와 기왓장 조각들로 봐선 꽤 큰 절이었던 듯,
1472년 8월 14일 점필재 김종직 일행이 잠시 쉬어 간 곳이라는데,
"그 후론 길이 험해 말에서 내려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1리쯤 떨어진 환희대로 갔고,
선열암과 신열암을 거쳐 고열암으로 갔다."고 <유두류록>에 적었다지만,
우린 선열암지와 환희대는 하산길에 둘러보기로 하고선,
금낭굴로 가고자 지장사터 뒤쪽으로 난 길을 따라 상대날등으로 올라가고(10:14 - 10:21)
상대날등으로 올라선 묵은 헬기장,
왼쪽으로 내려가면 환쟁이골 입구 다리로 이어지며,
4분쯤 뒤엔 또 하나의 묵은 헬기장 (10:31)
장군봉 아래 금낭굴 갈림길 안부,
상대날등에서 벗어나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나아가고(10:49)
금낭굴(錦囊窟),
지리산 동북부 폐칠암자 가운데 두 번째로 찾은 금낭굴암지이며,
굴을 품은 바위의 모양이 비단 주머니를 닮았다 하여 붙은 이름이라는데,
자칫하면 뭐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을 듯,
알고 보면 박쥐굴과 마찬가지로 좌우가 거의 대칭인 커다란 쌍굴이요,
금낭굴에서 음달골로 해서 선열암지로 갈 수도 있지만,
금낭굴 왼쪽 굴로 빠져나가 상대날등으로 올라가고(11:06 - 11:11)
금낭굴 위로 가파르게 올라서서 상대날등으로
상대날등으로 올라서서,
큼지막한 바위지대를 오른쪽으로 돌아가고(11:21)
10분쯤 지났을까,
바위지대 우회가 끝나면서 능선으로 올라서고(11:31)
함양 독바위 쪽으로 엄청나게 큰 바위가 보이기도 하고
상대날등 꼭지점(1193.3m봉) - 안락문 갈림길,
1193.3m봉과 1213.9m봉을 지나 오뚝이바위(1211m)로 갈 수 있지만,
이미 점심때가 되었는데다 떡국을 끓일 물이 모자라 그냥 내려가고(11:58)
오뚝이바위 - 안락문 갈림길,
오뚝이바위 쪽으론 눈길만 주고선 곧장 안락문으로 내려가고(12:04)
송대 - 안락문 - 벽송사 갈림길,
안락문과 함양 독바위를 거치지 않고 고열암지 사거리로 이어지는 지름길로,
안락문 0.1km · 송대 2.4km · 벽송사 5.6km를 가리키던 컨데,
그전엔 이런 이정표가 곳곳에 있었건만,
언제 왜 전부 사라져 버렸을까?(12:05)
안락문(安樂門),
근심과 걱정이 없이 몸과 마음이 평안하고 즐거워지는 문인가?(12:08 - 12:11)
통락문,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걸
함양 독바위,
산청 독바위 및 하동 독바위와 함께 지리산의 3대 독바위라 부르며,
멀리선 하나로 보이지만 5개의 커다란 바위지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한 부인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놓고
그 안에서 홀로 기거하며 도를 연마하여 하늘로 올랐다.>하여
<독녀암(獨女岩)>이라 부르기도 한다는 곳으로,
함양군 휴천에서는 <장독바위>, 마천에서는 <필봉(筆峰)>,
산청군 화계에서는 <상투바위>로 부른다 하고(12:14 - 12:22)
그전엔 밧줄이 있어 어렵지 않게 올라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도 아니고
저거라도 있으면 훨씬 수월하건만
함양 독바위,
함양독바위에서 생성한 상대날등과 황새날등을 좌우로 거느린
음달골이 오죽 깊고 험했으면 " 그곳에 가면 사흘 안으러는 나오기 힘들다."는
말까지 전해져 올 지경이다.
한국동란 지리산 전사에도 등재되어 있는 노장동전투에서는
골짝의 요새 같은 지형 탓에 피아간에 혈전이 수없이 이루어져
아군의 피해가 막심했었다고 한다.
지리산 동북부 폐칠암자 가운데 세 번째로 들른 신열암지,
함양 독바위와는 100m 남짓 떨어져 있는 곳이요,
이다음에 들를 고열암지도 100m쯤 된다고 하며,
뒤쪽의 바위지대와 연결되어 안락문이 자리 잡고 있고(12:24 - 12:27)
신열암지 샘터,
제구실을 하긴 어려울 듯하고
고열암지,
지리산 동북부 폐칠암자 가운데 네 번째로 들른 셈이며,
태극을닮은사람들 회원이며 진주에 사는 산거북이를 만나기도,
산꾼은 언제 어디서든 산에서 만나게 된다던가?
신열암지와는 달리 샘터에 물이 고여 있지만,
산거북이 일행들이 점심을 먹고 있기에,
우린 좀 더 내려가 선녀굴에서 먹기로,
1472년 8월 14일 점필재 김종직 일행이 하룻밤을 묵은 곳이고(12:29 - 12:32)
宿古涅庵(고열암에서 자다)
病骨欲支撑 병든 몸을 지탱하고자 하여
暫借蒲團宿 잠시 포단을 빌려 깔고 자는데
松濤沸明月 소나무 파도가 달빛 아래 들끓으니
誤擬遊句曲 구곡에 노니는 듯 착각케 하네
浮雲復何意 뜬구름은 또한 무슨 뜻인고
夜半閉巖谷 한밤중엔 바위 골짜기 닫혀 있구나
唯將正直心 오직 정직한 마음을 가진다면
尙得山靈錄 혹 산신령의 비록을 얻을는지
- 김종직의 <유두류록> 중에서 -
고열암지 샘터,
생각했던 것과는 달이 물이 고여 있고
의론대(議論臺),
수십 명이 머무를 수 있는 비스듬한 바위지대이며,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에는 의론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독녀암에서 조금 서쪽으로 돌아 고열암에 이르렀다.
해는 이미 저물었다. 그 서쪽에는 의론대가 있었다.
극기 일행은 뒤에 쳐졌다.
그래서 나 혼자 지팡이를 짚고 삼반석(三盤石)에 오르니,
발아래에 향로봉(香爐峯)과 미타봉(彌陀峯)이 내려다 보였다.
법종의 말에 의하면, 절벽 아래에 석굴(石窟, 선녀굴)이 있다고 한다.
옛날 이 석굴에는 노숙(老宿)과 우타(優陀)가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이미 해탈한 세 승려와 함께 이 돌에 앉아
불교의 진리를 논하다가 문득 도를 깨쳤다고 한다.
그래서 의론대라는 바위 이름이 붙은 것이다.“(12:35 - 12:40)
의론대에서 바라본 함양 독바위
의론대에서 바라본 상내봉(미타봉, 와불산, 부처바위)
의론대의 아픈 흔적,
그전에 노장대 독바위 조망 안내판이 있었던 걸로,
누가 왜 치웠을까?
노장대 독바위 조망 안내입니다.
노장대는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들의 활동거점으로서
세동마을로부터 시작되는 등산로와 송대에서 올라오는 등산로가 있다.
계곡과 어우러진 등산로를 따라 올라오다 보면
선녀굴(이은조 사살지) 등 당시 빨치산들의 은거지
(산죽비트, 바위비트 등)를 찾아볼 수 있다.
선녀굴 사거리,
솔봉과 선녀굴 및 유슬이굴로 나뉘는 갈림길이며,
점심을 먹기로 한 선녀굴로 가고(12:49)
선녀굴,
지리산 동북부 폐칠암자 가운데 다섯 번째인 선녀굴암지이며,
선녀들이 내려와 바위틈에서 나는 샘물로 목욕을 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망실공비(亡失共匪) 3인부대로 불렸던
정순덕, 이홍희, 이은조가 군경의 추격을 피해 숨어 지낸 곳으로,
1962년 2월 이북 출신의 여자 남파 공비 이은조(45)가 사살된 현장이기도,
이홍희와 정순덕은 달아나 산청군 삼장면 안내원마을에 숨어 있다,
1963년 11월 12일 새벽 이홍희는 사살되고,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생포된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22년 가까이 복역하다 1985년 광복절 특사로 출소하여,
이리저리 옮겨다니다 72살(1933.6.20 - 2004.4.1)의 나이로 인천에서 사망했다는데,
남북분단이 빚은 또 하나의 아프고 슬픈 우리의 역사가 아닐까?
수육을 삶고 떡국을 끓여 늦은 점심을 먹고 가는데,
샘물이 좋아 그런지 엄청스레 맛있더란(12:52 - 15:00)
선녀굴,
8.15 해방이후 공산주의 세력이
여순반란사건(1948년)을 일으켰으나 국군의 토벌작전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러나 잔여병력 약 200여 명이 지리산으로 입산하여
인근 좌익세력과 함께 제2병단 지리산 유격대(빨치산부대)를 결성하였다.
이들 빨치산은 6.25 한국전쟁 시 후방 교란을 목적으로
경찰관서와 군부대를 습격하고 민가에 피해를 주는 등 그 폐해가 심하였다.
휴전협정 이후 지리산에서는 1953년 5월 병단장인 이현상이
사살된 이후까지 수년 간에 걸쳐 토벌대와 빨치산 간의 격전이 벌어졌으며,
이로 인해 민족의 영산인 지리산이 피로 물들었던 민족비극의 사건이 있었다.
이곳 선녀굴은 이은조가 정순덕과 함께 마지막 빨치산 3인 중
위원장 직책으로 싸우다 1963년 2월경에 토벌대에 의해 사살된 지역입니다.
(1963년 11월 정순덕 체포 시 증언에 의해 확인됨)
원래 선녀골은 바위틈에서 선녀가 목욕을 하던 전설이 서린 곳으로,
선녀굴은 천년동굴로서 이 동굴의 옆에 있는 우물은
아무리 가뭄이 심하여도 물이 마르지 않는 샘물로서
아직도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굴비트,
빨치산들은 토벌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거나 산의 곳곳에
숨어다니며 토벌대의 추격을 피하면서 유격전을 펼치기도 하였다.
이들은 지리산의 험난한 계곡과 능선을 따라 자연적인 지형지물을
이용한 비트를 만들어 숨어서 토벌대의 추격을 따돌리곤 하였는데,
북한에서 남파된 간첩이나 무장공비 등이
지금도 많이 사용하는 은신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빨치산은 산죽, 바위, 낙엽, 굴을 이용한 비트를 주로 이용하였다.
이곳은 비트 중 굴비트를 재현한 것으로,
빨치산들은 지리산의 곳곳에 분포되어 있는 많은 굴에 몸을 은신하고
굴 입구를 위장하여 토벌대의 발견이 힘들도록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선녀굴암지 샘터,
누구 하나 돌보는 이라곤 없지만,
마르지 않는다는 샘물은 아직도 먹을 만하고
선녀굴을 뒤로하고 다시 선녀굴 사거리로,
유슬이굴과 선열암지를 거쳐 환희대로 내려갈 거고
선녀굴 사거리,
비스듬히 유슬이굴로 나아가고(15:03)
유슬이굴,
지리산 동북부 폐칠암자 가운데 여섯 번째로 들른 유슬이굴암지로,
솔봉능선과 황새날등 사이에 있으며,
그 옛날 <유> 씨 성을 가진 이가 공부를 한 곳이라 전한다는데,
바위들이 얼기설기 서로를 지탱하며 받치고 있는 형국으로,
그 규모가 꽤 상당하다는 걸 알 수 있으며,
이제 황새날등의 선열암 사거리로(15:22 - 15:25)
황새날등의 선열암 사거리,
올라가면 함양 독바위요 내려가면 환희대이며,
가야 할 선열암지는 바로 나아가고(15:35)
지리산 동북부 폐칠암자 가운데 일곱 번째로 들른 선열암지(先涅菴址),
뒤쪽에 치솟은 큼지막한 바위지대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는데,
금낭굴과는 좀 어렵고 힘들긴 해도 음달골로 해서 오갈 수 있으며,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에는,
선열암(先涅菴)을 찾아가 보니 암자가 높은 절벽을 등지고 지어져 있는데,
절벽 밑에 두 샘이 있어 물이 매우 차가왔다.(15:43 - 15:55)
금낭굴과 이어지는 통로,
오르내리는 게 제법 까탈스러울 듯?
다시 돌아온 선열암 사거리,
이제 환희대를 거쳐 적조암을 내려가면 되고(16:02)
배바위,
배의 돛대를 닮아서 붙은 이름이라던가?(16:03)
환희대(歡喜臺),
선열암 사거리에서부터 함께하던 황새날등에서 벗어나,
양민 거주지(노장동마을)를 거쳐 적조암으로 내려가는데,
쭉 황새날등을 타고 가면 문수사와 세동마을로 이어지며,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에는,
지장사 갈림길에서 1리쯤 더 가니 환희대(歡喜臺)란 바위가 있는데,
조태허와 한백원이 그 꼭대기에 올라갔다.
그 아래는 천 길이나 되는데, 금대사(金臺寺), 홍련사(紅蓮寺),
백련사(白蓮寺) 등 여러 절이 내려다보였다.(16:08 - 16:13)
삼봉산과 법화산이 가까이 다가서고
멀리 백운산과 대봉산(갓걸이산, 괘관산)이 들어오고
환희대,
환희대는 천 길이나 되는 곳으로 그곳에 오르면
금대사, 홍련사, 백련사 등 여러 사찰이 보인다고 했다.
노장대 마을터에서 일반 등로를 따라 15분 가량 오르면
독바위에서 내려오는 독바위능선에 닿는다.
독바위능선과 운암골의 분기점이 되는
삼거리 지점에 큰 바위 하나가 버티고 서 있는데,
이 바위가 바로 <환희대>라고 추정되는 곳이다.
숯가마터인 듯?
양민 거주지(노장동마을)에 서 있는 돌배나무,
도저히 돌배나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데,
아무래도 수백 년은 되지 않았을까?(16:25 - 16:28)
양민 거주지,
8.15 해방이후 공산주의 세력이
여순반란사건(1948년)을 일으켰으나 국군의 토벌작전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러나 잔여병력 약 200여 명이 지리산으로 입산하여
인근 좌익세력과 함께 제2병단 지리산 유격대(빨치산부대)를 결성하였다.
이들 빨치산은 6.25 한국전쟁 시 후방 교란을 목적으로
경찰관서와 군부대를 습격하고 민가에 피해를 주는 등 그 폐혜가 심하였다.
휴전협정 이후 지리산에서는 1953년 5월 병단장인 이현상이
사살된 이후까지 수년 간에 걸쳐 토벌대와 빨치산 간의 격전이 벌어졌으며,
이로 인해 민족의 영산인 지리산이 피로 물들었던 사건이 있었다.
이곳 양민 거주지는 10여 가구가 살았던 흔적이 있으며
낮에는 토벌대가, 밤에는 빨치산이 점령하여
양민들은 양쪽에서 의심을 받아 괴롭힘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박쥐굴 갈림길,
아까 박쥐굴로 갔던 거기로 다시 돌아온 셈인데,
간식으로 입요기를 하면서 머물다 적조암으로 내려가기로,
이제 거의 끝나가는 게 아니던가?(16:48 - 17:04)
8시간 30분 만에 다시 돌아온 적조암,
함양 독바위와 연계하여 지리산 동북부 폐칠암자터를 모두 둘러본 셈인데,
이것저것 보고 또 먹으며 쉬엄쉬엄 가면서 널널하게 진행했기에,
생각했던 것보단 좀 더 시간이 많이 걸리긴 했지만,
어차피 하루해를 보내고자 지리산 자락으로 들지 않았던가?
오랜만에 함께 발을 맞춘 모이면안다2호점 회원들,
비록 몇 명 되지도 않는 우리들만의 모임이지만,
오래도록 변치 말고 이대로만 이어갔으면,
차에 오른다.
그리곤 떠난다.
진양호 노을빛이 참 고운 내 사는 진주로(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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