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과 풍경

코로나19로 축제는 사라졌어도 만개한 벚꽃이 반기는 사천 선진리성(2020.3.29. 일요일)

큰집사람 2020. 3. 30. 20:57





이총(耳塚),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에 자리하고





이총(耳塚)

이곳은 임진왜란 때 조선(朝鮮)과 명(明)나라 연합군이

일본(日本)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역사의 현장이다.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전리품으로 조선인들의

귀와 코를 베어낸 후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보내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를 승전의 표시로

교토 토요쿠니 신사 앞에 묻고 이총(耳塚)이라 칭하였다.

1992년 4월 사천문화원과 삼중 스님이 합심하여 이역만리에서 떠도는

원혼들을 달래고자 이총의 흙 일부를 항아리에 담아 와서

제(祭)를 지내고 조명군총(朝明軍塚) 옆에 안치하였다.

2007년 다시 뜻을 모아 사천시의 후원으로 현재의 위치로 이전 안치하고

비(碑)를 세워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삼고자 한다.  





사천 조명군총(泗川 朝明軍塚)












와룡산






사천대교













































사천 선진리성(泗川 船津里城)

사천 선진리성은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주둔한 왜군(倭軍)이 일본식으로 지은 성이다.

사천읍에서 남쪽으로 6km 떨어진 선진리 북쪽의 낮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으며,

현재 대부분 복원된 형태로 남아 있다.


당시 북진하던 왜군은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저항하자

경상도 남해안 지방으로 물러나 남해안 곳곳에 성을 쌓고 머물렀는데,

그때 쌓은 성 중 하나가 선진리성이다.

이 성은 기록에 따르면 왜군 장수 11명이

1597년 10월 29일부터 12월 27일까지 지휘하여 쌓았다고 한다.

성안에는 많은 건축물이 있었고,

성 주위에는 해자(垓子)와 나무 울타리가 설치되었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항구로 유명했으며,

선진(先陣)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또한 고려시대 전국 12조창(漕倉) 중 하나인

통양창(通洋倉)을 보호하기 위한 토성의 일부가 남아 있다.

이 성은 왜군이 활동하기 위한 주요 근거지였기 때문에

한때 이순신 장군에게 격파당하기도 하였다.

현재는 선진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이충무공해전승첩기념비도 세워져 있다. 








































































충령비(忠靈碑) 안내문

이충령비는 1950년 6.25전쟁 발발 시부터

1958년 지리산 공비토벌작전 종료 시까지

대한민국의 영공을 수호하기 위해 임무 수행 중 장렬히 산화한

66명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1958년 10월 30일

공군 제1훈련비행단(현 공군 제3훈련비행단)에서 건립한 전적기념비로서,

구국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전승유적지인

이곳 선진리성에 자리했다는 점에서 더욱 뜻깊다 하겠습니다.


최초 건립 이후, 2003년 11월까지 공군 제3훈련비행단(사천기지)에서

임무 수행 중 꽃다운 청춘을 조국의 하늘에 영원히 바친

47명의 공군 장병들의 영령을 추가 봉안함으로써,

현재 113명의 호국영령이 잠들어 있습니다.


대한민국 공군은 1982년부터 이 비(碑)를 공군 군사재(軍史財)

제12호로 지정하여 공군의 성지로 관리하고 있으며,

사천시의 협조로 2006년 12월 4일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립하였습니다.


아! 장하다 조국을 위하여 순국한 공군 용사들이여!

나라에 충성을 바친 한 많은 청춘의 모든 영령들을 그 누가 공경하며,

추앙하지 않으리요.

길고 오랜 세월이 흘러도 타의 모범이며,

본보기가 되었구나!

채 피지도 못하고 꺾인 아까운 목숨이 되고 말았구나!

그대들이 세운 공과 크나큰 뜻은 만방에 찬연히 빛나며,

하늘이 다하는 그날까지 영원할지니,

그 뜻을 가슴 깊이 새기며

부디 명복을 빕니다.




















천수각터(天守閣址)

천수각은 일본식 성곽의 가장 핵심이 되는 건물로써

일본의 전국시대에는 전망대, 사령탑 등으로 이용되었으며,

에도시대 이후에는 권력을 상징하는 건물로 변모되었다.

현재 이곳은 2005년 발굴조사 과정에서 다량의 기와가 확인되었으며,

성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는 것으로 보아 천수각터로 추정되며,

붕괴된 석대와 주변 성곽은 2007년 해체 후 다시 보수하였다.


























이충무공사천해전승첩기념비



전적문,

여기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서해를 침공하는 전진기지가 되어 왜적이 날뛰었던 곳이며,

우리 수군의 용전으로 적을 물리쳐 크게 이긴 곳이다.

1592년 4월 13일 왜병 20만 대군이 부산에 상륙하여

파죽지세로 북상하는 한편 적 수군은 거제도 등지로 침공하였다.


우리 수군의 1차 출전은 5월 7일 옥포 합포에서,

5월 8일은 적진포에서 적선 42척을 격파하였으나

부산포에 있는 적 수군은 계속하여 거제 고성 등지를 분탕질하였으며,

사천 선창에는 적의 큰 배 12척이 열박하고 4백여 명의 적병이

산 주위에 장사진을 치는 등 그 세력이 날로 더하고 있을 무렵

전라도 좌수사 이순신은 적의 세력이 증강되기 전에 쳐부셔야 한다고 판단하여

5월 29일 여수 본영을 떠나서 2차 출전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크고 작은 배 23척을 거느리고

경상도 우수사 원균의 배 3척과 합세하여 곧바로 사천 앞바다로 나아가

적선 1척을 쳐부수고 일시에 공격할 방책으로 거짓 퇴각하는 것과 같이

적을 유인하니 적군은 산 주위에서 나와 배를 지키고

일부 병졸은 언덕 아래에 진을 치고 포와 조총을 쏘아대었다.

우리 수군은 밀물 시기를 기다려 거북선을 앞세워 적선에 돌진을 하면서

각종 무기를 일제히 발사하니 포소리는 천지를 진동하고 치열한 화력전이 전개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최선두에서 지휘하던 중 적의 철환을 맏아 왼쪽 어깨를 부상당하였으나,

조금도 개의치 않고 여전히 활을 당겨 적을 쏘았다.


적병은 크게 패하여 흩어져 도주하고

적선은 모조리 불태워 버려 통쾌하게 전승을 거두었다.

이 싸움은 이순신 장군의 묘책과 용전으로

적을 격퇴하여 적의 수륙병진 계획을 막을 수 있게 되었으며,

특히 거북선을 처음으로 실전에 이용하여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는 사실은 전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1978년 12월  일




























































































새 천년맞이 매향비(埋香碑)






새 천년의 여명을 깨치고 시민의 웅비와 화합을 만방에 꽃피우게

매향비를 충무공의 얼이 파도치는 선진리성에 세우니 복지와 번영을 주소서


하늘과 땅이 손 맞잡아 십이만 시민의 소원을 향에 담아 묻고

와룡과 봉명의 정기를 바탕으로 우리의 융성할 천년을 여기에 아로새기니

참과 사람을 숭상하는 사천시로 열매 맺게 하소서.

지나가는 바람이 어루만지고 찬란한 태양이 쓰다듬어

사천시의 창창한 미래를 가꿀 선진 조국 통일의 초석이 되고자 함이니

후세여 그 향기 널리 떨치소서

이천년 일월 일일 시인 천덕찬 짓고

                         우천 강선규 쓰다



새 천년의 여명을 깨치고 시민의 웅비와 화합을 만방에 꽃피우게

매향비를 충무공의 얼이 파도치는 선진리성에 세우니 복지와 번영을 주소서


하늘과 땅이 손 맞잡아 십이만 시민의 소원을 향에 담아 묻고

와룡과 봉명의 정기를 바탕으로 우리의 융성할 천년을 여기에 아로새기니

참과 사람을 숭상하는 사천시로 열매 맺게 하소서.

지나가는 바람이 어루만지고 찬란한 태양이 쓰다듬어

사천시의 창창한 미래를 가꿀 선진 조국 통일의 초석이 되고자 함이니

후세여 그 향기 널리 떨치소서

이천년 일월 일일 시인 천덕찬 짓고

                         우천 강선규 쓰다


* 추서

이 매향비는 새천년 기념사업으로 12만 사천 시민의 뜻을 모아

각산의 돌을 기단석으로 하고 봉명산의 돌은 비석으로 하여

시민의 화합과 발전을 도모하고 후손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며 건립하였으나,

풍화작용으로 비문이 훼손됨에 따라 당초 건립 취지를 살리고자

비석을 교체하지 않고 음각 비문을 동판에 옮겨 새겨 보수하였습니다.(2012.09. ) 








성문(城門)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세워진 성문을 복원해 놓은 것으로써,

2005년 발굴조사와 2006년 성벽 보수공사 중 확인된

4개의 기둥받침돌과 2곳의 기둥구멍을 기초로 해서

일본 히메지성의 성문 형태를 참고하여 만들었다.


















































































































































6.25전쟁 및 월남전쟁 참전유공자기념탑

조국과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목숨 걸고 6.25전쟁 및

월남전쟁에 참전한 유공자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억하고 참전용사의 사기앙양

순국선열의 애국애족정신을 계승하고자 건립하였습니다.

* 공사기간 : 2011.11.24 - 2012.6.23

* 규모 : 75m², 높이 14m

* 사업비 : 350백만원

* 시공사 : (주)우영종합건설

* 시행청 : 사천시























당병공양탑(唐兵供養搭)

최근(2017년 3월) 경상남도기념물 제80호
사천조명군총에 관계된 석물이 하나 발견돼 눈길을 끈다.
발견 장소는 사천시 용현면 통양마을의 한 골목.
사천시가 종포지구 항공산업단지 주변지역 지원사업의 하나로
이 마을의 골목길을 넓히는 공사를 하던 중 땅속에서 나왔다.
예사롭지 않은 물건이라 여긴 주민들이 사천시에 연락했고,
시는 옛 조명군총 앞에 서 있었다는 당병공양탑(唐兵供養塔)임을 확인했다.

당병공양탑,
사천시가 펴낸 사천시사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선진공원(船津公園)을 조성하면서
조명군총 앞을 지나는 도로를 개설했고,
일부 붕괴된 무덤을 수축한 다음 그 위에
‘唐兵供養塔(당병공양탑)’이라 새긴 높이 1m쯤 되는 표석을 세웠다.
그런데 1945년 광복 후 누군가에 의해 사라졌다는 것.

당병공양탑에 얽힌 기록은 여기까지다.
그리고 ‘누군가가 도랑을 건너는 다리로 쓰기 위해 가져갔다’는
이야기가 인근 주민들 사이에 전해오는 정도였다.
그러나 행방은 묘연했다.
용현면 출신의 조영규(68) 문화관광해설사조차
이야기 속 주인공을 찾기 위해 여러 차례 탐문했으나
구체적인 정보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 공양탑이 어느 날 불쑥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통양마을에 사는 강태진(67) 씨는 “공양탑이 발견된 곳은
옛날 마을공동우물이 있던 곳”이라며 “아마 옛날 어른들이
디딤돌이나 빨래판으로 쓰기 위해 갖다 놓은 것 같다”고 말했다.
강 씨에 따르면 우물 자리는
새마을운동 시기를 거치며 시멘트포장길로 바뀌었다.
탑의 존재는 점점 잊혀졌다.

3월 31일 통양마을 어귀에서 당병공양탑 실물을 확인했다.
키는 1미터 가량.
한눈에 봐도 여느 비석이나 탑비와 생김새가 다름을 알 수 있었다.
특히 낯설게 다가오는 점은 비석의 윗부분.
둥그스름한 게 보통이나 뾰족하게 각이 졌다.
또한 세로 모양도 나란하지가 않고
사다리꼴 모양으로 아래로 내려올수록 폭이 넓었다.
이를 두고 사천시 김상일 학예사는 “우리나라 전통적 모양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당병공양탑은 언제 누가 왜 만든 것일까?
이 탑에는 당병공양탑이라 적힌 글 말고는 다른 글이나 문양이 전혀 없다.
따라서 유래 등 다른 정보 확인이 어렵다.
다만 일제가 선진리성에 벚나무를 심는 등
선진공원으로 정비하던 때가 1912 ~ 1918년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 무렵 조명군총도 일부 정비하고 탑을 세우지 않았을까 추정할 뿐이다.

참고로 선진리성을 공원화할 당시 ‘사천신채 사적보전회’가 조직됐고,
정유재란 당시 사천신채를 지켰던
장수 시마즈 요시히로의 후손 시마즈 다다시게가 자금을 댔다.
보전회는 공원 내에 신사 두 채와 사천신채전첩지비(泗川新寨戰捷之碑)를 세웠으나
광복 후 주민들에 의해 모두 제거됐다.

3월 31일 만난 선진마을 강영수(97) 씨는 당병공양탑의 존재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에게 실물을 보여 주자 금방 알아봤다.
“이게 어딨다 나왔을까?
내가 어릴 때부터 봤던 것 맞아. 무덤 있는 길가에 있었지.
해방 되고 나서 얼마쯤 있다가 사라졌는데,
누가 가져갔는지는 모르고 있었어.”

같은 마을 윤맹호(87) 씨도 기억 몇 조각을 더듬었다.
“옛날에 조명군총을 댕강무더기라 불렀는데,
그 앞에 작은 비석이 있었지. 학교 다닐 때 항상 보고 다녔어.
일본사람들은 그 앞을 지날 때마다 허리 숙여 절을 하곤 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절하는 모습은 못 본 것 같아.”

강 씨의 기억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공양탑 제작 시기다.
그가 1921년생인 점을 감안하면 최소한 1920년대거나
그 이전부터 공양탑이 세워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윤 씨의 기억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탑의 용도다.
공양탑의 본래 의미라면 불교에서 부처에게 공양하는 뜻에서 세우는 탑이지만,
일본에서는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래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심한 듯 지나다닌 반면
일본사람들은 절을 했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그 옛날 승전을 기념해 선진리성을 공원화 한 것에 비춰
공양탑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탑의 모양이나 규모 등이 지극히 소박한 점에서 보면
민간 차원에서 추도 의미로 세웠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는 얘기도 있다.

사천시는 이 당병공양탑을 어찌 처리할까를 놓고 고민하고 있다.
먼저 주민들에게 뜻을 물었으나 “시가 알아서 처리해 달라”는 답을 얻은 상태다.
이에 시는 경남도 문화재위원들과 상의하겠다는 입장이다.
탑의 운명은 탑을 세운 뜻이 무엇인지
해석하는 일에서부터 출발할 것으로 보인다.














사천 조명군총(泗川 朝明軍塚)

사천 조명군총은 조선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때

선진리성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을 몰아내고자

결전을 벌이다 전사한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집단 무덤이다.

명나라 군의 전사자가 훨씬 많아 <당병무덤>, <댕강무데기>라 불리기도 하였다.

무덤은 사방 36m의 네모 반듯한 모양이다.


싸움이 한창 진행될 즈음 우리 편 군대 진영의 화약고가

폭발하면서 화재가 일어나자 왜군은 이를 틈타 역습을 하였다.

이때 수천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왜군은 그들의 승리를 본국에 알리려고 

죽은 군사들의 귀와 코를 베어 일본으로 보내었다.


조선 사람들은 싸움이 끝나고 귀와 코,

목이 베어진 전사자들을 수습하여 한데 모아 무덤을 만들었다.

무덤을 돌보는 사람이 없어 약 400년 동안 방치되었다가,

1983년 사천문화원과 지역 주민이 중심이 되어 무덤을 정비하였다.

그 후 해마다 음력 10월 1일에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조명연합군전몰위령비(朝明聯合軍戰歿慰靈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