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 짜: 2019년 12월 4일(수요일)
* 날 씨: 맑음
* 산 행 지: 덕문정주차장 - 화장산 - 벌목봉 - 수양산 - 시무산 - 사리마을회관 - 덕문정주차장
* 산행시간: 5시간 25분(운행시간 4시간 10분 + 휴식시간 1시간 15분)
* 산행속도: 보통 걸음
* 산행인원: 1명(나 홀로)
* 산행일정
10:55 덕문정주차장
12:02 - 12:30 화장산(615m)
13:27 - 13:40 벌목봉(743m)
14:04 - 14:17 감나무단지 안부(440m)
14:27 - 14:32 수양산(502.3m, △ 산청 455)
15:03 - 15:14 시무산(402.5m, △ 산청 454)
15:39 - 15:44 사리마을회관(덕산교, 110m)
16:00 자양보유원지 입구
16:20 덕문정주차장
* 화장산은 여름산행지로서
휴가철에 덕천강과 함께 권하고 싶은 곳이며,
무엇보다 깨끗한 덕천강이 있어 더욱 올라 보고 싶은 산이다.
화장산에는 화장암 절터가 있다.
화장암은 『진주지』등 옛 기록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꽤 오래된 절이 분명한데,
해발 600미터의 높은 산 중턱에 좁게 자리하고 있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이 암자의 뒤편에 있는 바위틈에서 저녁마다 쌀이 나오는데,
바리때를 받쳐 두면 한 사람의 중이 공양을 할 수 있는 분량의 쌀이었다.
산밑에 마을이 있지만 가파른 산을 오르내리면서 탁발하기에는
너무도 힘들어 매일 밤 바리때를 바위 밑에 받쳐 두고
쌀을 받아서 어렵잖게 공양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어쩌다가 산 너머 이웃의 한림사에서 중이나 상좌중이 와서
머무는 날에는 두 사람 분의 쌀이 받쳐져 있었다.
그러므로 비록 작은 암자지만
중은 흉년 · 풍년을 모르고 지내면서 불도에 정진하다가 열반을 하였다.
다음에 새로운 중 한사람이 오게 되었는데,
쌀은 변함없이 받쳐져 암자가 평상 시대로 잘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에 이 지방에 큰 흉년이 들어서 마을마다 기근이 자심(滋甚)하였다.
기근이 너무나도 심하여 흰죽배미가 생겨나기도 하였는데,
흰죽배미란 논 한 필을 배미라고 하여 흰죽 한 그릇에 바꾸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때에도 화장암에는 쉼 없이 쌀이 나와서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중이 쌀바위를 자세히 살펴보니
쌀이 나오는 구멍이 아주 좁아서 겨우 쌀 한톨이 빠져나올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때 그 중은 구멍을 넓히면 하룻밤에 많은 쌀이 쏟아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흉년에 큰 도움이 되고 절도 확장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단단한 나무막대기를 만들어서 그 쌀 구멍을 넓히게 되었는데,
힘들여서 바위를 벌려서 쌀 구멍을 넓혀 놓고 그날 밤에
바리때보다 큰 그릇을 받쳐 두고 밤을 새기가 바쁘게 새벽에 달려가 보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구멍이 넓어졌는데도 쌀은 한 톨도 받쳐 있지 않았다.
그 이튿날도 또 사흗날 밤도 쌀은 나오지 않았고,
이 일이 있고 난 뒤에 쌀은 영영 나오지 않고 말았다는데,
가뜩이나 흉년을 만난 중이 부지할 길이 없어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그 길로 절이 퇴락하여 바위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이 근처에는 옛날에 한림사, 백운암, 용문암 등의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그러나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발굴되었는데,
칼과 창 등 5점이 현재 경주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점촌마을 서북방 약 1km지점에 바위가 첩첩이 쌓인 곳이 있는데,
속칭 쇠대가리라고 한다.
이곳에 있는 암굴에서는 금, 은, 동을 채취한 흔적을 볼 수 있으며,
점촌은 당시에 제철을 했던 곳으로 요지와 철산화물 등을 찾을 수 있다.
원지에서 시천면 소재지로 가다 보면,
단성면 창촌리 구만마을을 지나면 백운계곡 입구가 나오고,
이어서 덕문교 건너 태소마을이 화장산 등산로 초입이다.
태소마을을 지나 화장계곡을 따라 오르면 되는데,
산길이 적당하게 경사가 형성되고 숲도 울창하며,
정상까지 거리도 얼마 되지 않아 한나절 산행지로는 손색이 없다.
정상까지 거리는 2.5km로 1시간 30분이면 올라갈 수 있으며,
그전엔 정상에 서면 천왕봉이 한눈에 들어오는가 하면,
구곡산, 웅석봉, 석대산 등이 보이고
덕천강의 넉넉함도 함께 느낄 수 있는 곳이었지만,
갈수록 나무가 자라는 바람에 지금은 벌목봉이 나무 사이로 살짝 들어올 뿐이다.
화장산에서는 북쪽의 벌목봉으로 가서 덕산 지리태극을 따라
수양산과 시무산을 거쳐 시천면 사리로 하산하면 산행의 진수를 느낄 수 있으나,
화장산에서 벌목봉까지는 길이 희미하여 조심해야 하며,
혹시라도 길을 잃으면 아랫소리당이 있는 계곡으로 내려서면 된다.
화장산에서 수양산까지는 4km,
수양산에서 사리까지는 2km이며,
전체 운행시간은 3시간30분 정도가 소요된다.
산청군 단성면 백운리 국도 20호선가의 덕문정주차장,
곡점 13km · 시천 4km란 교통표지판이 있으며,
<덕산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입덕문(入德門)이 자리 잡은 곳이기도 한데,
화장산 - 벌목봉 - 수양산 - 시무산을 잇고 사리마을회관으로 내려서서,
옛 국도 20호선 남명로와 국도 20호선 지리산대로를 따라 돌아오기로 하는데,
덕산 지리태극에서 살짝 벗어나 산꾼들의 발길이 아주 뜸한 화장산,
벌목봉에서 화장산을 거쳐 백운마을(태소)로 내려간 적은 있지만,
덕문정주차장에서 화장산으로 이어지는 길이나 있으려나?(10:55)
입덕문(入德門)
이곳은 조선(朝鮮) 명종(明宗) 6년(1561)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先生)이
삼가(三嘉)로부터 덕산(德山)으로 오시면서
동구(洞口)의 천연석문(天然石門)을
입덕문(入德門)이라 명명(命名)하시고
자주 逍遙昑詠(소요음영)하시던 유서(由緖) 깊은 곳이다.
근세(近世)에 도로 개설로 옛 석문(石門)은 없어졌으나,
선생이 남기신 정채(精采)와 유향(遺香)은 지금도 그윽하다.
입덕문(入德門) 석자(三字)는 선생의 고제(高弟)
도구(陶丘) 이제신(李濟臣) 선생의 필적(筆跡)이라 전한다.
시대변천으로 주위경관이 크게 황폐하자
후학(後學)들이 1960년에 입덕문(入德門) 보승계(保勝契)를 일으켜
고적(古跡)인 입덕문(入德門). 탁영대(濯纓臺). 덕암(德巖) 등을 보호하며
선현(先賢)의 유덕(遺德)을 추모(追慕)하고 계곡 일대의 수목(樹木),
토석(土石), 어족(魚族), 조수(鳥獸) 등 자연경치를 보전(保全)하는 한편
지리산(智異山) 관문(關門)의 경승지(景勝地) 조성을 목표로
덕문정(德門亭)을 신축하였는데, 계원(契員)이 천명(千名)에 이른다.
국도확포장 공사로 인하여 암벽(岩壁)에 새겼던
입덕문(入德門) 각자(刻字)를 떼어서 두 차례(1982년, 2004년)
옮겨 세운 사실을 기록하여 이 돌을 세운다.
서기 2004년 갑신(甲申) 7월 일
입덕문(入德門) 보승계(保勝契)
* 덕산은 본래 입구가 좁은 동천(洞天)이었고,
덕산에 들어서는 길은 조그만 벼랑길밖에 없었는데,
그 벼랑길 초입(初入)의 자연석에 새겨진 입덕문(入德門)이다.
입덕문(入德門)이란 <군자가 덕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과,
<덕산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으며,
덕산에서 4km 떨어진 산청군 단성면 백운리 국도 20호선 도로변에
위치한 덕문정주차장에 입덕문(入德門) 표지석(標識石)이 서 있다.
현재 남아 있는 <入德門> 세 글자를 두고 논란이 있다는 걸,
입덕문 설명문에는 도구(陶丘) 이제신(李濟臣) 선생의 필적(筆跡)이라 하고,
분성배씨종친회에서는 모정(慕亭) 배대유(裵大維, 1563 - 1632)의 글씨라고 주장,
이제신 선생이 바위의 이름을 입덕문이라 지었는데,
그 후 참지(參知) 배대유가 계서(繼書)하여 그걸 새겼다고 한다.
국도20호선에서 콘크리트 포장도로로 올라가는데,
밤나무단지로 올라가자마자 비포장도로로 바뀌게 되고
낙동강 수계 수변구역 안내판
철부지 개나리
밤나무단지,
100m 가량 이어지던 포장도로가 비포장도로로 바뀌고
개울을 건너자마자 백운솔농원인데,
약 9,000평 정도의 임야라 하고
화장산 산줄기
삼거리,
좌회전 아닌 직진(11:05)
비룡산과 오대주산
고령토를 채취한 듯,
소나무숲으로 들어가고(11:12)
5분쯤 지났을까,
산등성이로 올라서고
덕천강 너머 산줄기들
그런대로 나 있던 길이 낙엽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데,
겨우 방향만 잡고서 비스듬히 왼쪽으로 치오르는 수밖에는,
가파르긴 해도 잡목이 성가시게 하지 않으니 그런대로 오를 만하며,
어렵사리 화장산과 백운마을(태소)을 잇는 희미한 길에 접속하여,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나아가길 10분 남짓 만에 화장산으로 올라서고
화장산 정상부,
참호 흔적인 듯한 구덩이가 두 개 정도 보이고,
나무 사이로 벌목봉이 들어올 뿐 조망은 시원찮은데,
함양군 유림면 화장산(586.4m)은 연비지맥이라도 지나지만,
산청군 단성면 화장산은 덕산 지리태극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바람에,
일부러라도 찾는 산꾼들은 거의 없다고 하는 게 맞을 듯,
화장산의 높이가 지도에 따라 612m 또는 615m로 나오는데,
우리나라 거의 대부분의 산이 같은 현상이라고나,
왜 이런 것도 제대로 바로잡지 못하는 걸까?
나로선 꽤 오랜만에 3번째로 들른 것 같은데,
언제 또다시 오게 될지?(12:02 - 12:30)
벌목봉,
화장산과는 달리 덕산 지리태극이 지나기에,
이웃사촌이먼서도 그 대접에 있어선 천양지차(天壤之差)라고나,
감나무단지 안부까지는 곤두박질치듯이 쏟아져 내리는데,
발목이 푹푹 빠지는 가랑잎으로 포장한 길이 얼마나 미끄러울지,
아무래도 엉덩방아 서너 번은 찧어야 하지 않을까?(13:27 - 13:40)
한림산(화장산) - 태소 표지판,
반대쪽인 용무림산 쪽을 가리키며 나무에 얹혀 있는 걸,
주변에 떨어져 있던 낡은 천조각으로 고정시키고 방향도 제대로,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벌목봉샘,
살짝 물줄기가 비치긴 하지만,
언제 샘터로서의 기능을 한 적이 있었던가?(13:43)
감나무단지 안부,
고사리단지이기도 한데,
따지 않은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기에,
잘 익은 홍시를 따먹으며 좀 쉬었다 가기로 하는데,
뜻하지 않은 영양보충을 하는 셈이라고나?(14:04 - 14:17)
가야 할 수양산
모습을 드러내는 화장산
돌아본 벌목봉
수양산,
덕산 태극종주의 역사와 같이하는 듯한 <태극종주 수양산> 표찰,
첫 번째 그 짓(?)을 할 때인 2009년 9월 25일엔 말짱했건만,
그 무엇도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던가?
이젠 많이 바래 <태극종주>란 건 거의 지워지고 말았으며,
그마저도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에,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았는데,
내년 봄에 그 짓(?)을 하면서 만날 수 있을까?(14:27 - 14:32)
수양산 삼각점(산청 455)
안부 사거리,
덕산과 소리당을 이어주는 길이 지나고(14:50)
402m봉
자료사진
시무산,
덕산 지리태극의 처음이자 마지막 봉우리가 아니던가?(15:03 - 15:14)
시무산 삼각점(산청 454)
화장산
진주 뭘아산 국사봉과 장군대봉
아이고 무서워라!!!
지리산 천왕봉 일대,
눈이 많이 녹은 듯?
구곡산
대구비실이부부 표지기,
전국 산사람들과 함께하는 준 · 희 선생님 정족산 헌정산행(2019.11.2 - 11.3)에서 만났고
백두대간(白頭大幹) 덕산 사리가 날머리이다.
백두대간(白頭大幹)의 백두는 우리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에서 유래된 말이며, 대간은 큰 줄기를 말한다.
백두대간(白頭大幹)은 백두산(白頭山)에서 시작하여
계곡이나 강을 건너지 않고 큰 줄기만으로 지리산까지 이어져 있다.
한반도의 근간을 이루는 등성마루로
1대간 1정간 13정맥으로 하나의 대간체계로 이어져 있다.
백두대간의 의의는 한반도 산지체계의 근간을 이룬다는 점이고,
지형적으로는 정간과 정맥이 우리나라 하천의 주요 발원지가 되며,
이것을 중심으로 국토의 물줄기가 갈라지게 되어
현대적 의미에서 유역권 구분의 기본이 되고 있다.
정신적으로는 한반도의 역사가 백두대간 중심의
지맥에 뿌리를 둔다는 역사적 의미도 강한 편이며,
우리 고유의 땅의 흐름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자연관을 대표하는 개념 가운데 하나이다.
1. 백두대간의 주맥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금강산 - 설악산 - 태백산 - 소백산을
거쳐 지리산 천왕봉으로 이어지고, 천왕봉에서 수양산을 거쳐 사리로 내려온다.
<천왕봉에서 내려온 백두대간의 주맥은
웅석봉 정상 입구에서 보면 시천면 사리 쪽으로 감아 내려온다.
주맥은 항상 감아 내려온다.
전국 산악인들 중 이곳이 천왕봉의 끝머리라는 것을 많이 알고 있다.
진부령에서 설악산, 오대산, 태백산, 소백산, 문경새재를 거쳐
속리산과 삼도봉, 남덕유산, 육십령, 함양 백운산과 남원 영원재,
주천면 고기리, 고리봉, 정령치, 만복대, 노고단을 돌아
명선봉, 벽소령, 촛대봉, 연하봉, 장터목, 제석봉, 천왕봉, 중봉, 하봉, 쑥밭재,
독바위 양지, 왕등재, 밤머리재, 웅석봉삼거리, 소리당재, 사리로 이어진다.>
2. 대간(大幹)은 계곡이나 강을 건너지 않고 큰 줄기만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의 산에서 물을 건너지 않고 다른 산으로 가는 길은 반드시 있고,
그 길은 오직 하나 뿐이다. <물을 건너지 않는다.>는 말은
결국 능선 길을 밟아 나간다는 뜻이다.
또한 그 길은 반드시 이어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도 백두대간을 타고 백두산까지 갈 수 있다는 말이다.
(인용 : 백두대간의 역사/장성규/한국학술정보)
6.25사변 당시 북한군이 북한으로 도피하면서
산더미 같은 탄약을 현재 사리회관 인근에 재어 놓고
<여기서 백두대간 따라가면 물을 건너지 않고 북한까지 간다.>고 했다.
실제로 1990년대에 지리산에서 진부령까지
(전)대한산악연맹 김구채 이사가 50m 줄자로 실측했다.
3. 백두대간의 날머리가 바로 덕산 사리(絲里)이고, 산천재는 지리산의 주맥이 감싸고 있다.
두류산(頭流山)이라는 글자는 지리산을 지칭한다.
백두산(白頭山) 정기가 흘러온 산(山)이기에
예로부터 지리산은 두류산이라 불렀고,
양단수(兩端水)라는 석비에 새겨진 글자는
양쪽에서 흘러들어 오는 물줄기, 두물머리를 뜻한다.
풍수에서는 두 물줄기 머리에는 산줄기 따라 흘러온
땅기운이 멈추기에 명당혈은 두물머리에 있다고 한다.
<......우리 땅의 기상인 백두대간 정기들이 모두 모여
또다시 발원하는 지리산 지령에는 양반생각이 아닌 선비정신이 흐른다......>
산천재에서 보는 천왕봉은 단연 빼어났다.
천왕봉 지령을 담고 있는 그릇이
산천재(山天齋)라는 것은 풍수분석으로 상세히 드러난다.
대동여지전도의 산줄기
(천왕봉에서 산천재까지 이르는 산줄기)를 풍수형국론 시야로서 잡아 보면,
전형적인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형국도 임을 알 수 있다.
조상산을 떠난 용(산줄기)이 다시 머리를 돌려
조상을 쳐다본다는 회룡고조형이 산천재의 풍수형국이다.
어린 손자(산천재)가 할아버지(천왕봉)를 쳐다보니
천왕봉이 산천재에 산기운을 듬뿍 준다는 것이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에 걸린 풍수발복 관계이기도 하다.
(인용 : 서울풍수/지은이 장영훈/도서출판담디)
산천재(山天齋)
천왕봉에서 산천재까지 연결된 산줄기는 대동여지지도를 보아도 한눈에 드러난다.
천왕봉에서 산줄기는 동쪽으로 뻗어가다가
남쪽을 향해 C자 모양으로 몸을 틀어서 어느 곳에 이르는데,
그곳은 바로 산천재가 입지한 곳이다.
그러므로 천왕봉은 산천재의 조산(祖山)이 되고,
주산(主山)은 산천재를 발치에 두고 있는 배산(그곳에는 남명 묘소가 있다.)이 된다.
아래 사진을 비교하여 서로 사진을 겹치면
천왕봉과 웅석봉과 산천재의 위치가 비교적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위 사진에서 웅석봉 아래로 보면
그 끝줄기가 입덕문 약간 위로 끝나고 산천재를 휘감아 돈다.
(인용 : 영남학파 서원의 풍수지리에 관한 연구 -
퇴계와 남명의 풍수적 시추를 중심으로/2011/철학박사 논문 반오석)
4. 남명은 덕산을 백두산의 정기가 흘러 이곳에 머물러 쌓이는
곳으로 판단하고 바로 이곳을 무릉도원(武陵桃源)으로 선택했다.
남명은 일찍이 <유두류록, 流頭流錄>을 쓰기까지
덕산동 3회, 청학동 3회, 용유동 3회, 백운동 1회 등
총 11회에 걸쳐 지리산을 다녀보고 난 후 덕산동(德山洞)을 선택했다.
그 첫째 이유는 웅장한 천왕봉을 항상 볼 수 있음이요,
그 둘째는 풍수지리적으로 완벽한 장풍국의 입지를 이룬
덕산동을 무릉도원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덕산은 백두대간의 끝에 위치하는 지리산 천왕봉 아래에 있고 둥글고 크고 너르다.
천왕봉에서 좌우로 두 맥이 날개를 펼치고,
중앙으로 또 하나의 맥이 나와 구곡산을 만들고 명당을 만들었다.
천왕봉이 항상 보이고 산계와 수계가 일치하며,
완벽한 장풍국을 이룬 입지로 터가 넓고,
그 입구가 외부인들이 잘 찾아올 수 없는 무릉도원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남명은 덕산을 선택했고,
<두류산가, 頭流山歌>라는 시를 지어 이곳이 무릉도원이라 노래했다.
두류산(頭流山) 양단수(兩端水)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겼세라.
아해야, 무릉(武陵)이 어디메뇨, 나는 옌가 하노라.
덕산을 무릉도원으로 택한 남명은 그 혈을 찾아 묘지로 정하고,
그 아래를 살터로 정하신 후 그 이름을 산천재(山天齋)라 하였다.
산천(山天)은 <주역> 대축괘(大畜卦)로
<산이 하늘 위로 솟은 상이니 그 쌓음이 지극히 높다.>는 뜻이다.
대축은 간괘(艮卦)와 건괘(乾卦)로 구성되는데,
간괘가 산(山), 건괘가 천(天)을 나타내 <산천, 山天>이라 하였다.
또한 주역에서 <산은 멈춘다(止)>,
<천(天)은 하늘의 힘, 창조적인 힘>이란 뜻도 품고 있다.
그래서 이 뜻을 합쳐 <산속에서 창조적인 학문의 힘을 키운다.>
라는 큰 뜻을 품고 후학을 힘써 키웠다.
또한 주역에 이러한 뜻도 있다.
산은 머문다(止)>, <천(天)은 하늘의 힘>라는 뜻도 있다.
바로 이곳에 천왕봉의 정기가 머문다는 의미이고,
이는 백두산의 맥이 이곳에서 멈추고 머물러 그 힘이 이곳에 쌓인다.
산청군 시천면 사리가 백두대간 끝이라는 주장과 함께,
이곳을 알리는 표지석 설치와 홍보가 필요하다는 점이 제기됐다.
지리산에서 40여 년의 삶을 보낸 조재영(79) 옹은
최근 백두대간 끝머리 성역화 사업의 당위성을 강조하며,
이에 뜻을 같이하는 인사들과 자리를 같이했다.
이 자리에는 류창환 전 재진시천면향우회장과
서기선 마루원 대표이사, <본지> 성준제 주필이 함께했다.
조재영 옹은 <백두대간 끝머리는 웅석봉 정상 아래 삼거리에서
시천면 사리로 감아 도는 산맥의 끝이 된다.>고 주장했다.
자리를 함께한 류창환 전 시천면향우회장은
<이러한 사실을 널리 알리면서 역사적 고증을 해야 한다.>고 말했으며,
서기선 마루원 대표는 <고증을 위해서는 전문가의 자문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또 성준제 주필은 <성역화 사업을 위해서는 각계각층 인사들을 추대하고
민간단체를 발족해 체계적으로 추진해 나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2018.5.10. 산청시대)
사리마을화관과 덕산교,
덕산 지리태극의 그 시작과 끝이요,
2009년 9월 25일 처음으로 덕산 지리태극 종주에 나섰던 곳으로,
모두 13번(덕산 5, 남강 5, 진양호 3)의 지리태극을 하게 될 줄이야?(15:39 - 15:44)
천왕봉과 중봉을 비롯한 지리산 일대가 보이고
SK신원주유소
옛 국도 20호선 남명로
지리산국립공원본부와 지리산국립공원경남사무소
국도 20호선 지리산대로
자양보유원지 입구,
진주 35km · 산청 30km를 가리키고(16:00)
덕천강의 유래
덕천강은 산청에서 발원해 산청의 정신을 맑게 씻어내는 강이며,
신라와 고려의 수호신을 모신 성전과
조선의 개국을 반대한 지리산의 신비로움을 간직한 강이다.
지리산 천왕봉 아래서 샘솟는 천왕샘을 비롯,
지리산의 신령스러움을 모셨던 제석천과
호야와 연진의 전설을 낳은 음양수샘에서 시작한 중산리계곡의 물이
스스로 무지개를 피운다는 무제치기폭포와
청정 비구니들의 독경소리 고요한 대원사에서 흘러온 물과 만나는
덕천 양단수에서부터 진양호에 닿기까지 큰 산의 한많은 이야기를 들려 준다.
중산리계곡에서 흘러온 물과 대원사계곡에서 흘러온 물이 만나는 지점이 양단수다.
물이 얼마나 맑고 주변 경치가 좋았으면 무릉도원이라 했을까?
남명은 일생토록 벼슬길에 나가지 아니하고
지리산이 올려다 보이는 양단수 언저리에 산천재를 열고
<안으로 바른 마음을 기르며 밖으로 그 옳음을 실천한다.>는
경의학(敬義學)을 몸소 행하며 가르쳤다.
남명의 가르침을 받은 많은 선비들은
훗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모집해 싸웠다.
남명 문하에서 궐기한 의병장만도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를 비롯
정인홍(鄭仁弘), 최영경(崔永慶) 등 50여 명에 이르렀으니,
퇴계(退溪) 이황(李滉)으로 대표되는 영남좌도의 사상이
낙동강을 중심으로 경북 안동에서 형성됐다면,
지리산에서 발원한 덕천강은
영남우도를 대표하는 사상을 낳았다고 하겠다.
예전에 이 골짜기에는 화전밭과 숯가마터가 있었다. 그만큼 살기가 고단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덕천강도 더불어 한많은 삶을 싣고 흘렀다. 단풍철이 아닌데도 황혼에 비친 덕천강의 물결이 더욱 붉은 것은 지리산의 역사가 그만큼 아픔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지리산을 찾아든 사람들의 운명을 대신하기라도 하는 듯, 덕천강은 오늘도 굽이굽이를 돌아 낮은 곳을 찾아 흐른다. 때로는 앞을 가로막는 산자락을 헤치고 곧장 나아가고 싶어 거센 물길을 쏟아붓기도 하고, 더러는 들판을 휩쓸고 거침없이 내닫고 싶어 성난 물줄기를 흘려 보내기도 하지만, 마지막에는 낮은 곳으로 흘러 내린다. 그래서 덕천강은 아픔의 강이자 사람의 강이다.
* 덕천강은 산청에서 발원해 산청의 정신을 맑게 씻어내는 강이며,
신라와 고려의 수호신을 모신 성전과
조선의 개국을 반대한 지리산의 신비로움을 간직한 강이다.
지리산 천왕봉 아래서 샘솟는 천왕샘을 비롯,
지리산의 신령스러움을 모셨던 제석천과
호야와 연진의 전설을 낳은 음양수샘에서 시작한 중산리계곡의 물이
스스로 무지개를 피운다는 무제치기폭포와
청정 비구니들의 독경소리 고요한 대원사에서 흘러온 물과 만나는
덕천 양단수에서부터 진양호에 닿기까지 큰 산의 한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침마다 골에 물안개를 피워 올리며 지리산에서 생을 마친
수많은 생명들을 진혼하면서 새 생명을 부활 시키고,
세상의 흐른 땀을 씻어주는 한량없는 휴식처가 되고,
붉게 물든 산릉의 색깔을 실어나르며,
지리산을 덮은 눈을 녹여 땅 밑에서 숨쉬는
생명체들에게 자양분을 공급하는 덕천강.
이 강은 지리산록에서 시작한다.
해발 1,915m의 지리산정 바로 아래 있는 천왕샘과
1,808m의 제석봉에 있는 제석천,
1,653m의 장터목 아래 있는 산희샘에서 발원한 물이 모여 내를 이루는 법천계곡과
지리산 제2봉인 중봉과 써리봉 사이에 형성돼 있는 순두류계곡 물이 모여
중산리계곡을 이루면서 강의 면모를 띠기 시작한다.
여기에 다시 세석산장의 샘과 영신봉 아래 음양수샘에서 발원한 내대천에 이어
고운동계곡에서 흘러온 반천이 합류해 덕산에 이르러
대원사계곡에서 흘러온 물과 만나면서 화살처럼 빠른 시천(矢川)이 된다.
지리산 새재와 왕등재에서 시작한 대원사계곡 물은 유평을 지나면서 수량을 더해
웅석봉 밤머리재에서 흘러온 물과 합치면서 강폭을 넓혀
내원골과 장당골의 물이 만나는 대포에 이르러 강만큼 넓은 들을 펼친다.
대포부터 덕산까지 지리산 쪽으로 들녘이 형성되고,
웅석봉 쪽으로는 도로가 있어 다리가 놓여지기 전까지만 해도 나룻배를 타고 건너야 했다.
강 양쪽에 줄을 이어 노 대신 줄을 당겨 오가는 줄배와 사공이 직접 노를 젓는 배가 있었다.
덕산 장날이나 추수철이 되면 배가 오가는 나룻목은
모처럼 말쑥한 차림을 한 사람들로 붐볐다.
반면 여름에 큰비라도 내리면 대하리 일대는 섬 아닌 섬이 되었다.
중산리계곡에서 흘러온 물과
대원사계곡에서 흘러온 물이 만나는 지점이 양단수다.
물이 얼마나 맑고 주변 경치가 좋았으면 무릉도원이라 했을까?
남명은 일생토록 벼슬길에 나가지 아니하고
지리산이 올려다 보이는 양단수 언저리에 산천재를 열고
<안으로 바른 마음을 기르며 밖으로 그 옳음을 실천한다.>는
경의학(敬義學)을 몸소 행하며 가르쳤다.
남명의 가르침을 받은 많은 선비들은
훗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모집해 싸웠다.
남명 문하에서 궐기한 의병장만도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를 비롯
정인홍(鄭仁弘), 최영경(崔永慶) 등 50여 명에 이르렀으니,
퇴계(退溪) 이황(李滉)으로 대표되는 영남좌도의 사상이
낙동강을 중심으로 경북 안동에서 형성됐다면,
지리산에서 발원한 덕천강은
영남우도를 대표하는 사상을 낳았다고 하겠다.
덕산을 지나서는 웅석봉 아래 마근담에서 흘러온 물과
덕산에서 하동을 넘는 갈치재에서 흘러온
중태천이 물을 보태면서 자양들을 일군다.
덕천강의 풍부한 수량과 지리산에서 흘러온
비옥한 퇴적물로 하여 자양들은 언제나 풍요롭다.
자양들에 물을 보내기 위해 막아둔 자양보는
자연발생유원지로 여름이면 피서객들로 붐빈다.
자양보 아래로 내려오면 백운계곡 물을 보태고는 이내 하동 옥종으로 흘러간다.
옥종을 거쳐 진주 수곡으로 해서 진양호로 흘러든 덕천강은
산청읍을 지나온 경호강을 만나서는 남강으로 흘렀다가,
다시 강원도 태백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에 합류하면서 남강 5백리의 여정을 마감한다.
덕천강은 지리산의 강이다.
천왕봉을 중심으로 제석봉과 연하봉, 촛대봉,
영신봉을 거쳐 삼신봉에 이르는 남부능선이 만든 법천계곡,
청내골, 도장골, 거림골, 고운동계곡에 이어
중봉에서 갈라져 나온 구곡산능선과 치밭목능선이 만든 순두류계곡,
천지암골, 내원골, 장당골뿐만 아니라
천왕봉에서 중봉을 거쳐 하봉과 쑥밭재, 새재, 깃대봉, 밤머리재,
웅석봉으로 이어지는 왕등재능선과 웅석봉능선이 만든 조개골,
대원사계곡, 딱밭실골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여 만든 강이 덕천강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이 골짜기에는 화전밭과 숯가마터가 있었다.
그만큼 살기가 고단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덕천강도 더불어 한많은 삶을 싣고 흘렀다.
한때는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들이 골짜기를 메우면서
그들의 못다한 삶을 씻어내렸다.
단풍철이 아닌데도 황혼에 비친 덕천강의 물결이 더욱 붉은 것은
지리산의 역사가 그만큼 아픔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지리산을 찾아든 사람들의 운명을 대신하기라도 하는 듯,
덕천강은 오늘도 굽이굽이를 돌아 낮은 곳을 찾아 흐른다.
때로는 앞을 가로막는 산자락을 헤치고
곧장 나아가고 싶어 거센 물길을 쏟아붓기도 하고,
더러는 들판을 휩쓸고 거침없이 내닫고 싶어
성난 물줄기를 흘려 보내기도 하지만,
마지막에는 낮은 곳으로 흘러 내린다.
그래서 덕천강은 아픔의 강이자 사람의 강이다.
시천면
시천면은 민족의 영산인 지리산 천왕봉이 위치한 청정지역으로
중산리, 내대계곡 등 수려한 자연환경을 자랑하고 있으며,
잠재적인 관광자원개발이 무궁무진한 고장이다.
시천면 지역에서 생산되는 곶감은
전국 최초로 자리적표시인증을 받을 정도로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명품곶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또한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산청곶감을 드시고 감탄을 하실 정도였다.
시천면은 남명 조식 선생의 얼을 계승, 발전시킬 한국선비문화연구원은
과거, 현재와 미래의 올바른 민족정신과 가치관을 창출 전승하여
새로운 정신적 지표마련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고장으로 도약하고 있다.
단성면
단성면은 산청군의 서남단에 위치, 지리산 입구에 소재하고 있으며,
진주시, 하동군과 접경하고 있고 성철 스님 생가(겁외사),
문익점 면화시배지, 단속사지, 단성향교 등의 문화유적이 있으며,
남사예담촌은 전국 최초로 아름다운 마을 제1호로 지정되어
연중 많은 탐방객이 방문하고 있다.
주요 농특산물은 밤, 딸기, 곶감, 고구마 등으로
주민들의 주소득원이 되고 있다.
자양보
단성면과 시천면의 경계지점,
시천 3km를 가리키고(16:08)
화장산
벌목봉
소리교
시무산과 수양산
소리당 입구
덕천강
덕암(德巖)
5시간 25분 만에 다시 돌아온 덕문정주차장,
묵은 길이 많은데다 발목까지 빠지는 가랑잎으로 곤욕을 치루기도 했지만,
이 일대는 나로선 결코 낯설지 않은 곳이었기에,
몇 번 엉덩방아를 찧긴 했어도 별 탈 없이 돌아오지 않았을까?
산에선 아무도 만나지 않은 고즈넉한 산행,
좋긴 참 좋았다고나,
차에 오른다.
그리곤 떠난다.
진양호 노을빛이 참 고운 내 사는 진주로(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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