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산행기

백두대간 덕산 사리가 날머리이다

큰집사람 2019. 11. 29. 20:28




백두대간(白頭大幹) 덕산 사리가 날머리이다.

백두대간(白頭大幹)의 백두는 우리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에서 유래된 말이며, 대간은 큰 줄기를 말한다.

백두대간(白頭大幹)은 백두산(白頭山)에서 시작하여

계곡이나 강을 건너지 않고 큰 줄기만으로 지리산까지 이어져 있다.

한반도의 근간을 이루는 등성마루로

1대간 1정간 13정맥으로 하나의 대간체계로 이어져 있다.

백두대간의 의의는 한반도 산지체계의 근간을 이룬다는 점이고,

지형적으로는 정간과 정맥이 우리나라 하천의 주요 발원지가 되며,

 이것을 중심으로 국토의 물줄기가 갈라지게 되어

현대적 의미에서 유역권 구분의 기본이 되고 있다.

정신적으로는 한반도의 역사가 백두대간 중심의

지맥에 뿌리를 둔다는 역사적 의미도 강한 편이며,

우리 고유의 땅의 흐름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자연관을 대표하는 개념 가운데 하나이다.


1. 백두대간의 주맥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금강산 - 설악산 -  태백산 - 소백산을

거쳐 지리산 천왕봉으로 이어지고, 천왕봉에서 수양산을 거쳐 사리로 내려온다.

<천왕봉에서 내려온 백두대간의 주맥은

웅석봉 정상 입구에서 보면 시천면 사리 쪽으로 감아 내려온다.

주맥은 항상 감아 내려온다.

전국 산악인들 중 이곳이 천왕봉의 끝머리라는 것을 많이 알고 있다.

진부령에서 설악산, 오대산, 태백산, 소백산, 문경새재를 거쳐

속리산과 삼도봉, 남덕유산, 육십령, 함양 백운산과 남원 영원재,

주천면 고기리, 고리봉, 정령치, 만복대, 노고단을 돌아

명선봉, 벽소령, 촛대봉, 연하봉, 장터목, 제석봉, 천왕봉, 중봉, 하봉, 쑥밭재,

독바위 양지, 왕등재, 밤머리재, 웅석봉삼거리, 소리당재, 사리로 이어진다.> 


2. 대간(大幹)은 계곡이나 강을 건너지 않고 큰 줄기만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의 산에서 물을 건너지 않고 다른 산으로 가는 길은 반드시 있고,

그 길은 오직 하나 뿐이다. <물을 건너지 않는다.>는 말은

결국 능선 길을 밟아 나간다는 뜻이다.

또한 그 길은 반드시 이어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도 백두대간을 타고 백두산까지 갈 수 있다는 말이다.

(인용 : 백두대간의 역사/장성규/한국학술정보)

6.25사변 당시 북한군이 북한으로 도피하면서

산더미 같은 탄약을 현재 사리회관 인근에 재어 놓고

<여기서 백두대간 따라가면 물을 건너지 않고 북한까지 간다.>고 했다.

실제로 1990년대에 지리산에서 진부령까지

(전)대한산악연맹 김구채 이사가 50m 줄자로 실측했다.



3. 백두대간의 날머리가 바로 덕산 사리(絲里)이고, 산천재는 지리산의 주맥이 감싸고 있다.

두류산(頭流山)이라는 글자는 지리산을 지칭한다.

백두산(白頭山) 정기가 흘러온 산()이기에

예로부터 지리산은 두류산이라 불렀고,

양단수(兩端水)라는 석비에 새겨진 글자는

양쪽에서 흘러들어 오는 물줄기, 두물머리를 뜻한다.

풍수에서는 두 물줄기 머리에는 산줄기 따라 흘러온

땅기운이 멈추기에 명당혈은 두물머리에 있다고 한다.

<......우리 땅의 기상인 백두대간 정기들이 모두 모여

또다시 발원하는 지리산 지령에는 양반생각이 아닌 선비정신이 흐른다......> 


산천재에서 보는 천왕봉은 단연 빼어났다.

천왕봉 지령을 담고 있는 그릇이

산천재(山天齋)라는 것은 풍수분석으로 상세히 드러난다.   

대동여지전도의 산줄기

(천왕봉에서 산천재까지 이르는 산줄기)를 풍수형국론 시야로서 잡아 보면,

전형적인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형국도 임을 알 수 있다.

조상산을 떠난 용(산줄기)이 다시 머리를 돌려

조상을 쳐다본다는 회룡고조형이 산천재의 풍수형국이다.

어린 손자(산천재)가 할아버지(천왕봉)를 쳐다보니

천왕봉이 산천재에  산기운을 듬뿍 준다는 것이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에 걸린 풍수발복 관계이기도 하다

(인용 : 서울풍수/지은이 장영훈/도서출판담디)


산천재(山天齋)

천왕봉에서 산천재까지 연결된 산줄기는 대동여지지도를 보아도 한눈에 드러난다.

천왕봉에서 산줄기는 동쪽으로 뻗어가다가

남쪽을 향해 C자 모양으로 몸을 틀어서 어느 곳에 이르는데,

그곳은 바로 산천재가 입지한 곳이다.

그러므로 천왕봉은 산천재의 조산(祖山)이 되고,

주산(主山)은 산천재를 발치에 두고 있는 배산(그곳에는 남명 묘소가 있다.)이 된다.

아래 사진을 비교하여 서로 사진을 겹치면

천왕봉과 웅석봉과 산천재의 위치가 비교적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위 사진에서 웅석봉 아래로 보면

그 끝줄기가 입덕문 약간 위로 끝나고 산천재를 휘감아 돈다.

(인용 : 영남학파 서원의 풍수지리에 관한 연구 -

퇴계와 남명의 풍수적 시추를 중심으로/2011/철학박사 논문 반오석)


4. 남명은 덕산을 백두산의 정기가 흘러 이곳에 머물러 쌓이는

곳으로 판단하고 바로 이곳을 무릉도원(武陵桃源)으로 선택했다.

남명은 일찍이 <유두류록, 流頭流錄>을 쓰기까지

덕산동 3, 청학동 3, 용유동 3, 백운동 1회 등

11회에 걸쳐 지리산을 다녀보고 난 후 덕산동(德山洞)을 선택했다.

그 첫째 이유는 웅장한 천왕봉을 항상 볼 수 있음이요,

그 둘째는 풍수지리적으로 완벽한 장풍국의 입지를 이룬

덕산동을 무릉도원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덕산은 백두대간의 끝에 위치하는 지리산 천왕봉 아래에 있고 둥글고 크고 너르다.

천왕봉에서 좌우로 두 맥이 날개를 펼치고,

중앙으로 또 하나의 맥이 나와 구곡산을 만들고 명당을 만들었다.

왕봉이 항상 보이고 산계와 수계가 일치하며,

완벽한 장풍국을 이룬 입지로 터가 넓고,

그 입구가 외부인들이 잘 찾아올 수 없는 무릉도원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남명은 덕산을 선택했고,

<두류산가, 頭流山歌>라는 시를 지어 이곳이 무릉도원이라 노래했다.


두류산(頭流山) 양단수(兩端水)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겼세라.

아해야, 무릉(武陵)이 어디메뇨, 나는 옌가 하노라. 


덕산을 무릉도원으로 택한 남명은 그 혈을 찾아 묘지로 정하고,

그 아래를 살터로 정하신 후 그 이름을 산천재(山天齋)라 하였다.

산천(山天)<주역> 대축괘(大畜卦)

<산이 하늘 위로 솟은 상이니 그 쌓음이 지극히 높다.>는 뜻이다.

대축은 간괘(艮卦)와 건괘(乾卦)로 구성되는데,

간괘가 산(), 건괘가 천()을 나타내 <산천, 山天>이라 하였다.

또한 주역에서 <산은 멈춘다()>,

<()은 하늘의 힘, 창조적인 힘>이란 뜻도 품고 있다.

그래서 이 뜻을 합쳐 <산속에서 창조적인 학문의 힘을 키운다.>

라는 큰 뜻을 품고 후학을 힘써 키웠다. 

또한 주역에 이러한 뜻도 있다.

산은 머문다()>, <()은 하늘의 힘>라는 뜻도 있다.

바로 이곳에 천왕봉의 정기가 머문다는 의미이고,

이는 백두산의 맥이 이곳에서 멈추고 머물러 그 힘이 이곳에 쌓인다.








백두대간 지도



산청군 시천면 사리가 백두대간 끝이라는 주장과 함께,

이곳을 알리는 표지석 설치와 홍보가 필요하다는 점이 제기됐다.

지리산에서 40여 년의 삶을 보낸 조재영(79) 옹은

최근 백두대간 끝머리 성역화 사업의 당위성을 강조하며,

이에 뜻을 같이하는 인사들과 자리를 같이했다.

이 자리에는 류창환 전 재진시천면향우회장과

서기선 마루원 대표이사, <본지> 성준제 주필이 함께했다. 

조재영 옹은 <백두대간 끝머리는 웅석봉 정상 아래 삼거리에서

시천면 사리로 감아 도는 산맥의 끝이 된다.>고 주장했다.

자리를 함께한 류창환 전 시천면향우회장은

<이러한 사실을 널리 알리면서 역사적 고증을 해야 한다.>고 말했으며,

서기선 마루원 대표는 <고증을 위해서는 전문가의 자문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또 성준제 주필은 <성역화 사업을 위해서는 각계각층 인사들을 추대하고

민간단체를 발족해 체계적으로 추진해 나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2018.5.10. 산청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