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과 풍경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성(2019.3.29. 금요일)

큰집사람 2019. 3. 29. 15:15

















사천 선진리성(泗川 船津里城),

임진왜란 때 왜군(倭軍)이 거점을 마련하기 위한 일본식 성곽이다.

사천읍에서 남쪽으로 6km 되는 거리로,

선진리 북쪽의 얕은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성벽의 일부가 허물어지긴 했으나 잘 남아 있는 편이다.


명(明)과 조선(朝鮮)의 기록에 의하면,

성안에는 많은 건축물이 있었고,

성밖으로도 해자(垓子)와 목책(木柵)이 시설되었다.

1597년(慶長2) 10월 29일부터 12월 27일까지

모리 부자(毛利吉成, 毛利勝英) 등 11명의 왜장(倭將)이 성을 쌓았고,

시마즈 부자(島津義弘, 島津忠恒)가 주둔했었으며,

명나라 군대와의 전투도 치러졌다.


삼면을 바다로 했던 위치 선택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우리나라의 축성에도 영향을 주었다 한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74호)















































새 천년맞이 매향비(埋香碑)



새 천년의 여명을 깨치고 시민의 웅비와 화합을 만방에 꽃피우게

매향비를 충무공의 얼이 파도치는 선진리성에 세우니 복지와 번영을 주소서


하늘과 땅이 손 맞잡아 십이만 시민의 소원을 향에 담아 묻고

와룡과 봉명의 정기를 바탕으로 우리의 융성할 천년을 여기에 아로새기니

참과 사람을 숭상하는 사천시로 열매 맺게 하소서.

지나가는 바람이 어루만지고 찬란한 태양이 쓰다듬어

사천시의 창창한 미래를 가꿀 선진 조국 통일의 초석이 되고자 함이니

후세여 그 향기 널리 떨치소서

이천년 일월 일일 시인 천덕찬 짓고

                         우천 강선규 쓰다


* 추서

이 매향비는 새천년 기념사업으로 12만 사천 시민의 뜻을 모아

각산의 돌을 기단석으로 하고 봉명산의 돌은 비석으로 하여

시민의 화합과 발전을 도모하고 후손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며 건립하였으나,

풍화작용으로 비문이 훼손됨에 따라 당초 건립 취지를 살리고자

비석을 교체하지 않고 음각 비문을 동판에 옮겨 새겨 보수하였습니다.(2012.09. ) 









































아! 장하다 조국을 위하여 순국한 공군 용사들이여!

나라에 충성을 바친 한 많은 청춘의 모든 영령들을 그 누가 공경하며,

추앙하지 않으리요.

길고 오랜 세월이 흘러도 타의 모범이며,

본보기가 되었구나!

채 피지도 못하고 꺾인 아까운 목숨이 되고 말았구나!

그대들이 세운 공과 크나큰 뜻은 만방에 찬연히 빛나며,

하늘이 다하는 그날까지 영원할지니,

그 뜻을 가슴 깊이 새기며

부디 명복을 빕니다.





천수각터(天守閣址),

천수각은 일본식 성곽의 가장 핵심이 되는 건물로써

일본의 전국시대에는 전망대, 사령탑 등으로 이용되었으며,

에도시대 이후에는 권력을 상징하는 건물로 변모되었다.

현재 이곳은 2005년 발굴조사 과정에서 다량의 기와가 확인되었으며,

성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는 것으로 보아 천수각터로 추정되며,

붕괴된 석대와 주변 성곽은 2007년 해체 후 다시 보수하였다.





충령비(忠靈碑) 안내문,

이충령비는 1950년 6.25전쟁 발발 시부터

1958년 지리산 공비토벌작전 종료 시까지

대한민국의 영공을 수호하기 위해 임무 수행 중 장렬히 산화한

66명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1958년 10월 30일

공군 제1훈련비행단(현 공군 제3훈련비행단)에서 건립한 전적기념비로서,

구국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전승유적지인

이곳 선진리성에 자리했다는 점에서 더욱 뜻깊다 하겠습니다.


최초 건립 이후, 2003년 11월까지 공군 제3훈련비행단(사천기지)에서

임무 수행 중 꽃다운 청춘을 조국의 하늘에 영원히 바친

47명의 공군 장병들의 영령을 추가 봉안함으로써,

현재 113명의 호국영령이 잠들어 있습니다.


대한민국 공군은 1982년부터 이 비(碑)를 공군 군사재(軍史財)

제12호로 지정하여 공군의 성지로 관리하고 있으며,

사천시의 협조로 2006년 12월 4일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립하였습니다.























이충무공사천해전승첩기념비



 전적문,

여기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서해를 침공하는 전진기지가 되어 왜적이 날뛰었던 곳이며,

우리 수군의 용전으로 적을 물리쳐 크게 이긴 곳이다.

1592년 4월 13일 왜병 20만 대군이 부산에 상륙하여

파죽지세로 북상하는 한편 적 수군은 거제도 등지로 침공하였다.


우리 수군의 1차 출전은 5월 7일 옥포 합포에서,

5월 8일은 적진포에서 적선 42척을 격파하였으나

부산포에 있는 적 수군은 계속하여 거제 고성 등지를 분탕질하였으며,

사천 선창에는 적의 큰 배 12척이 열박하고 4백여 명의 적병이

산 주위에 장사진을 치는 등 그 세력이 날로 더하고 있을 무렵

전라도 좌수사 이순신은 적의 세력이 증강되기 전에 쳐부셔야 한다고 판단하여

5월 29일 여수 본영을 떠나서 2차 출전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크고 작은 배 23척을 거느리고

경상도 우수사 원균의 배 3척과 합세하여 곧바로 사천 앞바다로 나아가

적선 1척을 쳐부수고 일시에 공격할 방책으로 거짓 퇴각하는 것과 같이

적을 유인하니 적군은 산 주위에서 나와 배를 지키고

일부 병졸은 언덕 아래에 진을 치고 포와 조총을 쏘아대었다.

우리 수군은 밀물 시기를 기다려 거북선을 앞세워 적선에 돌진을 하면서

각종 무기를 일제히 발사하니 포소리는 천지를 진동하고 치열한 화력전이 전개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최선두에서 지휘하던 중 적의 철환을 맏아 왼쪽 어깨를 부상당하였으나,

조금도 개의치 않고 여전히 활을 당겨 적을 쏘았다.


적병은 크게 패하여 흩어져 도주하고

적선은 모조리 불태워 버려 통쾌하게 전승을 거두었다.

이 싸움은 이순신 장군의 묘책과 용전으로

적을 격퇴하여 적의 수륙병진 계획을 막을 수 있게 되었으며,

특히 거북선을 처음으로 실전에 이용하여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는 사실은 전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1978년 12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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