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과 풍경

산청 구형왕릉(2021.4.25. 일요일)

큰집사람 2021. 4. 26. 13:50

 

 

 

 

 

 

 

 

 

 

 

 

 

신라태대각간순충장열 흥무왕김유신사대비(新羅太大角干純忠壯烈 與武王金庾信射臺碑)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구형왕릉주차장에서 구형왕릉으로 올라가는 길가에 있으며,

김유신이 어린 시절 자신의 증조부인 가락국 구형왕의 무덤 앞에서

수 년 간 시묘살이를 하며 활쏘기를 연마했던 곳이라 한다.

 

 

 

 

가락국구형왕신도비(駕洛國仇衡王神道碑)

 

 

 

 

 

류의태약수터

류의태약수터에 얽힌 전설이나 설화로는

류의태 자신이 고치지 못하는 불치의 난치병도

"천인수(千蚓水)" (만인수, 萬蚓水)라고도 함)를 먹어 고쳤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신의 류의태의 가르침 속에 무릇 물에는 서른세 가지 종류가 있고 그 약효가 달라,

의원은 약효를 내는데 물을 가려 써야 한다며 물 중에 정화수(井華水)에 이어 두 번째로 치는

여름에 차고 겨울에 온(溫)한 "한천수(寒天水)"로 장복하면 반위(反胃:胃癌)를

다스린다는 물로 왕산의 약수가 이에 해당한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눈이 내린 한겨울에도 왕산의 약수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맛이 참으로 좋은 것을 느낄수 있다.

류의태 선생 활동 시 한약 제조에 사용되었던 샘터(일명:약물통)의 약수는

돌너덜 아래 자리 잡은 서출동류수(西出東流水)로,

위장병과 피부병 등 불치병 치료에 효험이 있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즐겨 애용하는 곳이다.

 

류의태 선생은 경남 산청군 신안면 하정리 상정(옛지명:産陰縣 丁台)

마을에서 출생하여 당대 제일의 하늘이 내린 신의(神醫)로 칭송 받았다.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편술하여 의성(醫聖)으로 칭송 받은 허준의 의학적 재질과 지식을 키워준 스승이며,

특히 의술의 발전을 취해 허준에게 자신의 몸을 해부용으로 제공하여

해부학의 효시를 이룬 살신 성인의 위대한 의학자로 전해진다.

 

* "천년 두골에 천인수(千年 頭骨에 千蚓水)"는 천년 묵은 사람의 해골에 담긴 천년된 물을 이르며,

만년된 물을 만인수(萬蚓水)라 함 

 

 

 

산청(山淸)의 왕산(王山)

산청 방장산(지리산) 중 왕산은 장대한 지리산 자락의 동북쪽 끝으로,

가락국 시조대왕 김수로(駕洛國 始祖大王 金首露)의 태왕궁지(太王宮址)이다.

서기 162년 김수로대왕은 첫 번째 왕자인 거등(居登)에게 나라를 양위하고,

가락지품천 방장산 자락에 별궁을 짓고 태후와 함께 이거하여 왕의 호를 보주황태왕(普州皇太王),

왕후를 보주황태후(普州皇太后)로, 궁은 태왕궁(太王宮)으로, 산은 태왕산(太王山)으로 명명하셨다.

대왕께서는 태양원군으로 38년 간 계시다가 기묘년 3월 23일에 서거하셨다.

330여 년이 흐른 후 서기 532년 가락국의 마지막 10대 양왕(구형왕)께서 시조대왕의 태왕산으로 들어오셨다.

가락 지품천 태왕산은 구형왕(仇衡王)께서 이거한 당시에도

수정같이 맑은 물이 샘솟고 있어 궁궐 이름을 수정궁(水晶宮)이라 편액하고

수년 간 은거하다가 붕어하시니 존호를 양(讓)이라 하였다.

훗날 흥무대왕김유신대장군은 이곳에 사당을 지어 7년 동안 시능을 하였으며,

활쏘기와 무예를 연마하여 삼국통일의 바탕을 이루는 호연지기의 기상을 닦았고,

왕의 5대 외손 신라 제30대 문무대왕(휘: 법민)은 제향을 받드는 비용으로 왕산 일대 토지를 하사하셨다.

왕산심릉기(王山尋陵記)에 의하면 "산양현 서쪽 모퉁이 방장산 동쪽 기슭에 산이 있고 절이 있는데,

위에는 왕대가 있고 아래에는 왕릉이 있다.

무릇 릉은 가락국 10대 구형왕의 능침이고,

태자 대각간 서현(舒玄)과 증손 대장군 유신(庾信)이 왕대에 시조대왕의 묘우(廟宇)를 추봉하고,

이 절에 구형왕사를 세워 왕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삼았다.

왕산이라 지명한 것은 이 사적에서 비롯되었다." 라고 기록 되어 있다.

가락국 태왕산에서 유래가 되어 '왕산'으로 불리어지고 있는 산청의 왕산은,

가락국 시조(김수로대왕)의 사적이 있고,

양왕(구형왕)과 흥무대왕(김유신대장군)의 역사가 깃든 "가락국 삼왕의 고적지" 이다.

 

*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한 가락국의 영토는 "동으로 황산강이요,

서남으로 창해에 이르고, 서북으로 지리산 끝까지를,

동북으로 가야산을 경계로 두고 국호를 대가락이라 하였다." 라고 되어 있다.

 

* 현치연혁(縣治沿革)에서 "산청은 옛 변한(弁韓) 땅 가락지품천(駕洛知品川)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산양현(山陽縣)으로 고치고,

고려 말에 산음현(山陰縣), 조선시대 영조는 산청현(山淸縣)으로 바꾸었는데,

날엔 왕산(王山) 아래 금계(錦溪)의 위에 있었고,

조선시대에 와서 회계(會稽) 아래 경호(鏡湖) 위로 옮겼다." 하고,

 "왕산의 옛 이름은 방장산(方丈山) 중 가락(駕洛) 태왕산(太王山)으로 고려시대에는 모락산(帽落山),

조선시대에는 왕산(王山)으로 불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구형왕릉

 

 

 

 

산청 왕산 구형왕릉(山淸 王山 仇衡王陵, 국가사적 제214호)

구형왕릉은 가락국 제10대 임금인 양왕(讓王)의 능이다.

국내 유일의 피라밋형 석릉(石陵)으로 일반 봉토 무덤과는 달리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산기슭 경사면에 크고 작은 암석을 쌓아,

총 일곱 단의 층을 이루며 정상부는 타원형이다.

 

전면 중앙에서부터 높이 1m 내외의 담이 둘러져 왕릉을 보호하고 있으며,

앞면 전체의 높이가 7.15m로 하단 길이는 25m이며,

동쪽 4단 중앙에 가로 · 세로 40cm · 깊이 68cm의 석문이 마련되어 있다.

구형왕릉에 대한 역사기록으로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산청현읍지(山淸縣邑志),

대동지지(大東地志),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등이 있으며

능의 심릉 사실로는 조선시대 문신 이행(李荇)의 왕산조릉기(王山弔陵記),

승려 탄영(坦瑛)의 왕산사 목함기(王山寺 木函記), 문인 홍의영(洪義泳)의 왕산심릉기(王山尋陵記)

등에 그 내용이 남아 있다.
왕릉 주위에 흥무대왕 김유신 장군의 ‘시능터(侍陵趾)와 ’사대비(射臺碑)‘가 있고,

주변의 암석에는 장보암(藏譜巖)을 비롯하여 구형왕릉임을 알려주는 각석들이 있으며,

왕산 아래 가락국양왕덕양전(駕洛國讓王德讓殿)에서는

한 해 두 차례 왕과 왕후의 음덕을 기리는 춘추대제가 봉행된다.

 

왕릉 주위에 흥무대왕 김유신 장군의 시능터(侍陵址)와 사대비(射臺碑)가 있고

주변의 암석에는 장보암을 비롯하여 구형왕릉임을 알려주는 각석들이 있으며

왕산 아래 가락국왕 덕양전에서는 한해 두 차례 왕과 왕후의 음덕을 기리는 춘추대제가 봉향된다.

1971년 2월 9일 사적 제214호로 지정되었다.

 

구형왕(仇衡王, 521년 ~ 532년)
가락국 제10대 구형왕은 가락국 시조 김수로대왕(駕洛國 始祖 金首露大王)의 10세손으로,

가락국(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이시다.

가락국 제9대 겸지왕(鉗知王, 491년~521년)의 아들로,

서기 521년에 가락국 제10대 대왕으로 등극하셨다.

휘는 구형(仇衡)이시며 존호는 양(讓)으로 계화왕후(桂花王后)와

세종, 무력, 무득 세 아들과 증손으로 흥무대왕(興武大王) 김유신(金庾信)과

5대 외손으로 신라 제30대 문무대왕(휘:법민)을 두셨다.

서기 532년(법흥왕 19년)에 전쟁의 피해에서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신라에 나라를 선양(禪讓)하고,

가락 지품천 방장산 속 ‘태왕산’으로 들어 오셨다.

나라를 내어준 까닭에 ‘돌무덤으로 장례를 치르라.’

하신 유언으로 산 아래 경좌의 언덕 석릉에 영면하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