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마을은 수많은 선비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가문을 빛냈던 학문의 고장으로,
공자가 탄생하였던 니구산(尼丘山)과 사수(泗水)를 이곳 지명에 비유할 만큼
예로부터 학문을 숭상하는 마을로 유명합니다.
2003년 농촌전통 테마마을로 지정된 <남사 예담촌>은
고즈넉한 담장 너머 우리 전통 한옥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어
표면적으로는 옛 담 마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내면적으로는 담장 너머 그 옛날 선비들의
기상과 예절을 닮아가자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2011년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제1호로 선정된 남사 예담촌은
변화하는 현재 속에서 옛 것을 소중히 여기고
지켜나가는 아름다운 마을로 자리하고자 합니다.
한옥 풍경이 어우러진 전통문화 배움터 남사 예담촌에 오셔서
아름다움과 배움이 있는 휴식을 충전해 가시기 바랍니다.
남사마을 돌담길
이 오래된 마을의 돌담길은 향촌마을의 아름다운 정서를 고이 간직하고 있어
이를 잘 가꾸어 후손들에게 넘겨주고자 등록문화재로 등재하여 보존 관리하고 있습니다.
2006.12.4 문화재청장
남사리연혁비(南沙里沿革碑)
삶의 지혜가 소통하는 남사예담촌
지리산의 정기가 동으로 뻗은 곳에 예(禮)를 상징하는
니구산(尼丘山)과 사수(泗水)가 닿아 만든 반달 모양의 남사 예담촌은
예부터 선비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숫룡의 머리를 한 마을 앞 당산과
암룡의 머리를 한 니구산이 서로의 머리와 꼬리를 무는
쌍룡교구(雙龍交媾)를 이루는 곳에 연꽃 모양의 산이 둘러싸고 있어
맑고 어린 기운이 마을을 수호(守護)하고 있다.
신의(信義)와 청렴(淸廉)을 지키는 선비의 고장답게
단아산 기품(氣品)과 예절을 품고 있는 전통한옥과 옛 토담,
효심으로 심은 수령 700년이 넘는 나무와 수많은 역사문화자원들이
한 폭의 동양화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절세(絶世) 풍광(風光)이다.
옛 것을 통해 겸손(謙遜)과 겸양(謙讓)의 지혜를 배워 감사의 마음을 알게 하는 남사예담촌은
2003년 농촌전통테마마을로 지정되어 한국인의 멋과 맛을 오감(五感)으로 체득할 수 있는
진정한 휴식처로 자리하고 있다.
남호정사(南湖精舍)
경화당(敬和堂)
산청 남사마을 옛 담장
지리산 길목에 있는 산청 남사마을에는
18세기 ~ 20세기 초에 지은 전통한옥 40여 채가 남아 있다.
현재 남사마을에는 최씨고가(문화재자료 제117호), 이씨고가(문화재자료 제118호),
이사재(문화재자료 제328호), 사양정사(문화재자료 제453호) 등 많은 한옥들이 있는데,
한옥과 담장이 어우러져 고풍스러워 보인다.
옛 담장은 돌과 진흙을 번갈아 쌓아 1.2 ~ 2m 정도로 높게 만들었으며,
그 위에 기와나 널돌을 올려 비로 담이 붕괴되지 않도록 했다.
옛 담장은 마을 주민들이 남사천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돌을 사용해 주택의 밖과 밭 주위에 쌓은 것으로,
경남 서부 지방의 담장 형식을 잘 보여 준다.
남사마을회관
남학재(南鶴齋, 남사마을회관)
정유 중추 남은(丁酉(2017년) 仲秋 南隱)
최씨고가
산청 남사리 최씨고가(山淸 南沙里 崔氏古家)
이 고택은 전통적인 남부지방의 사대부 한옥이다.
건물은 안채를 중심으로 사랑채, 익랑채가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사랑채 좌우에는 중문이 두 곳 설치되어 있다.
동쪽 중문을 통과하면 안채가 한눈에 들어오지만,
서쪽 중문을 지날 경우 ㄱ자 담으로 차단되어
안채와 익랑채가 보이지 않게 되어 있다.
전통적인 유교 사상에 따라
남녀의 생활상의 공간 분화를 분명히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인채는 정면 6칸 · 측면 3칸 규모에 앞뒤 툇간이 있고,
들보 5량(樑)으로 조성된 높은 팔작지붕 건물이다.
뒤 툇간은 폭이 넓어 수장기능의 벽장이 설치되거나 방으로 분할되고 있으며,
겹집형식으로 변모되고 있다.
건물의 사용 자재들은 견실하고 이중 방문의 조각 장식도 섬세하고 아름답다.
사랑채는 정면 5칸 · 측면 3칸 규모에 앞뒤 툇간이 있으며,
들보 5량(樑)으로 조성된 팔작지붕 건물이다.
안채와 마찬가지로 겹집형식으로 취하고 있다.
최씨고가의 매화나무(최씨매)
최씨매는 최씨고가 대문 옆에 있던
400년 된 매화나무가 고사(枯死)한 뒤 심은 후계목으로,
매화꽃이 필 무렵이면 매화향이 고가의 운치를 더한다.
남학정
남학정(南鶴亭)
정유 중추 남은(丁酉 仲秋 南隱)
부부 회화나무
선비나무로 불리는 두 그루의 회화나무는
서로에게 빛을 더 잘 들게 하려고 몸을 구부리며 자랐고,
부부가 나무 아래로 통과하면 금실 좋게
백년해로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부부나무로 불린다.
중국 주(周)나라 시대에 회화나무 아래 삼공이 모여
정사를 논의한 것에서 유래되어 학자나무라고도 불린다.
이씨고가
산청 남사리 이씨고가(山淸 南沙里 李氏古家)
산청 남사리 이씨고가는 남사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으로,
1700년대에 세운 전통적인 남부지방 사대부 가옥이다.
남북으로 긴 대지에
사랑채, 외양간채와 곳간채가 안채를 중심으로 ㅁ자 모양이다.
안채는 앞면 7칸 · 옆면 3칸 규모이며,
남부지방에서 가장 잘 나타나는 일(一)자 모양의 건물이다.
사랑채는 앞면 앞면 4칸 · 옆면 3칸 규모이며,
안채와 앞뒤로 나란히 있다.
일반적으로 사랑채는 바깥주인이 살며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이나,
이씨고가의 사랑채는 안채처럼 주로 주거 용도로 쓰였다.
사랑채의 내부는 안채의 내부와 비슷한데,
지붕 아래에 방을 두 줄로 배열하여 앞쪽으로는 생활하는 공간을 두고,
뒤쪽으로는 생활용품이나 가재도구 등을 보관하는 공간을 둔 겹집으로 꾸몄다.
사당은 담장을 둘러 독립적으로 배치하였다.
사당은 안채의 부엌에서부터 먼 곳에 두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고가에서는 가깝게 둔 것이 특이하다.
이씨고가의 회화나무
마을에서 가장 키가 큰 나무로써
줄기의 커다란 구멍이 배꼽을 닮아 삼신할머니 나무로 불린다.
아기를 가지고자 원하는 여인은
구멍에 손을 넣고 소원을 빌면 애기를 갖게 된다는 설이 있다.
여사정(餘沙亭)
이제개국공신교서(李濟開國功臣敎書)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운 경무공(景武公) 이제(李濟)에게 내린 태조의 교서.
이제(1365? - 1398)는 태조의 셋째 사위로 조선의 개국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開國功臣) 1등으로 흥안군(興安君)에 봉해지고,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가 되었다.
이 교서는 1392년(태조 원년)에 내려진 것이다.
영모재(永慕齋)
이인립(李仁立)의 아들이요 이인임(李仁任)의 조카로,
태조 이성계의 셋째딸 경순공주(慶順公主)와 결혼한
경무공 이제(景武公 李濟, 1365 ~ 1398)를 모신 성주이씨 재실이다.
사효재 귀후문(思孝齋 歸厚門)
돌아가신 분을 소중히 하면 후덕한 곳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사효재(思孝齋)의 향나무
사효재는 1706년(숙종 32년) 피접(避接) 중인 아버지를
해치려는 화적의 칼을 자신의 몸으로 막아낸
영모당 이윤현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지은 것이다.
향나무는 사효재를 짓기 전에 심겨져 있었으며,
재례를 올릴 때 향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 피접(避接)이란 병 등으로 살던 집을 피해 요양하는 것을 말한다.
옛 담장 식생
* 담쟁이덩굴 : 담을 기어오른다 하여 담쟁이덩굴이라 이름 붙여졌다.
가을철 붉은 단풍이 아름답다.
열매는 야생동물의 먹이가 되기도 한다.
* 사위질빵 : 7 ~ 9월 하얀꽃을 피우는 덩굴식물로 산과 들 어디서든 잘 자란다.
사위에게 튼튼하지 않은 사위질빵의 줄기로 지게멜빵을 만들어 주어,
짐을 적게 짊어지게 했다는 이야기가 이름 속에 담겨 있다.
* 푼지나무 : 우리나라 각지에서 자라는 덩굴식물로 노박덩굴과 유사하나,
갈고리 모양으로 변한 떡잎이 매우 날카롭다.
산청 남사마을 옛 담장
남사마을의 옛 담장은
마을 주민들이 남사천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강돌을 사용하여 쌓았다
담장 하부에 길이 50 ~ 60cm 정도의 큰 막돌로 2 ~ 3층을 쌓은 다음
그 위에 돌과 진흙을 교대로 쌓아올렸다.
담 높이는 2m정도로 높은 편이다
지리산 길목에 있는 남사마을은 18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지은 전통한옥
40여 채가 남아 있어 담장과 한옥이 어우러져 고풍스러운 풍경을 자랑한다.
이사교(尼泗橋)
이사재(유숙지)
이곳은 이순신 장군이 권율 도원수부가 있는
합천(율곡)으로 가던 길에 하룻밤 유숙한 곳이다.
정유년(1597년) 6월 1일 이순신 장군은 억수처럼 내리는 빗속에서 청수역을 떠나
단성에 이르러 박호원의 농사를 짓는 이곳의 노비 집에서 하루를 묵었다.
이순신 장군은 이 지역의 유력한 집안인 박호원의 내력을 알고
이곳에서 유숙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밤새도록 내리는 빗속에 방마저 좋지 않아 선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장군은 아침 일찍 삼가현을 향해 출발하였다.
박호원의 본관은 밀양, 호는 송월당이다.
그는 1562년(명종 17) 임꺽정 등 도적을 진압한 공을 세우기도 했고,
호조판서 · 참판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사재는 박호원의 재실이며,
현재 이 지역에는 후손들이 살고 있다.
산청 이사재(山淸 尼泗齋)
이사재는 조선 전기 토포사(討捕使)의 종사관으로 임꺽정의 난 진압에 공을 세우고
대사헌, 호조참판 등을 지낸 송월당(松月堂) 박호원(朴好元, 1527 ~ ?)의 재실이다
상량문에 '세정사팔월(歲丁巳八月)'로 기록되어 있어 1857년에 건립된 것을 알 수 있으며,
정문 앞에는 이충무공이 백의종군 중 이곳을 지났다는 행로표석이 있다.
전후면의 반 칸씩을 퇴간으로 한 정면 4칸 · 측면 2칸의 규모이며,
실은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 각 1칸씩에 방을 들이고,
좌우 각 반 칸은 마루로 꾸몄다.
마루부분에는 모두 계자난간을 시설하였고,
그 상부에는 모두 소로를 끼워 장식하였으며,
정면 어칸의 툇마루는 한 단 낮게 시설하여 출입이 용이토록 하였다.
5량으로 가구하였고 서까래만 쓴 홑처마 형식에 지붕은 팔작지붕 형식으로
전후 퇴칸 적용, 활주 사용, 문짝 구성, 광창 시설 등 조선 후기
건축양식의 특징들이 잘 적용된 건축물이다.
거유문(居由門)
이사재(尼沙齋)
송주(松州) 하도(河圖)의 글씨라고 한다.
이사재기(尼泗齋記)
박호원의 후손 입암 박헌수(立庵 朴憲修, 1873 ~ 1959)가 짓고,
재령(載寧) 이현덕(李鉉德)이 썼다.
이사재의 매화나무(박씨매)
이사재(尼泗齋)는 입향조 박호원(朴好元)을 기리기 위한 재실이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 시 박호원 농노의 집에 유숙할 때
매화나무를 보고 위안을 삼았다는 유래에서 후계목으로 가꾸어 오고 있다.
이사재의 배롱나무
이사재의 배롱나무 가지에는 연리지가 많다.
연리지는 남녀 사이 혹은 부부애가 좋은 것으로 비유된다.
예전에는 효성이 지극한 부모와 자식을 이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이 나무의 연리지를 보는 연인은
결혼하여 행복하게 잘 산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순신 백의종군로 도보탐방로 제1코스 고난의 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일본군의 모략과 선조 임금의 오해(오판)로
직책을 박탈당하고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우의정 정탁(鄭琢)의 청원으로 정유년(1597년) 4월 1일 출옥하여
권율 장군의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을 받고
서울을 떠나 합천(율곡)으로 향한다.
제1코스 고난의 길은 도원수 권율 장군의 진영으로 가는 길과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이 대패한 후 남해안의 정찰을 위해 떠나기도 했던 길이기도 했으며,
장군은 옥고를 치른 아픈 몸과 어머님의 죽음이 겹쳐 가누기 힘든 몸과 마음을 이끌고
비 내리는 긴 여정 중 산청군 단성면을 지났기에 고난의 길이라 이름하였다.
이사정(尼泗亭)
기산 박헌봉 선생(1906 ~ 1977) 생가 기산국악당
이곳은 국악교육의 선각자 기산 박헌봉 선생의 생가이다.
박성호의 2남으로 태어나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6세에 상경하여 한성강습소를 거쳐 중동중학교 고등과를 졸업하였다.
송포정(松浦亭)
국악계 큰 스승 기산 박헌봉 선생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기산국악당에
전통 5음계의 의미를 담은 오각정자 <송포정>이 지어졌다.
산청군은 2019년 10월 11일 기산국악당에서
오각정자 건립을 기념하는 제막식과 축하공연을 개최했다.
이날 제막식에는 이재근 산청군수와 이만규 군의회 의장, 군의원,
지역 기관단체장을 비롯해
최종실 기산국악제전위원장과 위원회, 지역주민 등이 참석했다.
특히 이번 기념행사에서는 홍윤식 동국대 명예교수가 쓰고
심목 양한식 국가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장 이수자가 새긴
기문을 소개하는 자리도 마련됐다.
기문은 이애주 경기도예술의전당 이사장이 낭독했다.
기문에는 <송포정>의 건립 의의와 이곳에 담긴 의미가 담겼다.
이와 함께 제9회 박헌봉 국악상 수상자인 임병대
전 한국문화원연합회 사무총장이 시상금 500만 원을 기부해 의미를 더했다.
기부금 전달 이후 이어진 1부 축하공연은 기산국악당 뒤편 대밭극장에서 진행됐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1970년대를 풍미했던 가수 홍민이 무대에 올라
자신의 대표곡 <고별>과 <석별>, <망향>등을 선보였다.
2부 축하무대는 새로 건립된 오각정자 송포정에서
국악자매 앙상블 <소공>의 공연이 진행됐다.
<소공>은 <춘향가>와 <뱃노래>를 비롯해 박목월 시인이
박헌봉 선생의 수연(壽宴)에 헌사한 축시
<누구의 것이랄 것도 없는>을 자신들의 색깔로 선보였다.
송포정의 <송포>는 최종실 기산국악제전위원장의 스승인
기산 박헌봉 선생이 지어준 최 위원장의 아호다.
기산선생의 유지를 잇고 있는 박헌봉 선생의 제자들이 뜻을 모아
수제자인 최 위원장의 아호로 정자 이름을 정했다.
기산국악제전위원회는 송포정을 우리 민족의
풍류문화를 재현하는 연희 공연장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최종실 제전위원장은
<기산 박헌봉 선생께서는 우리 민족의 정서를 담은 민족음악이
‘광대들에 의해 전승돼 왔다’고 하는 그릇된 인식을 국악이라는 개념으로 재정립하고
이를 계승하는 국악예술학교를 설립, 초대 교장을 지내신 분>이라며,
<앞으로 기산국악당과 송포정을 중심으로 산청에서
국악의 르네상스를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말했다.
기문
기산국악당 오각정자 송포정은 광대들에 의해 전승되어 왔다고 하는
우리 문화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국악이라고 하는 승화된 개념을 정립하여
학교 교육의 정규과목으로 설정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국악예술학교를 설립해
초대 교장으로 국악교육에 헌신하신 우리 국악계의 큰 스승 기산 박헌봉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산청군은 국악의 오음음계 궁상각치우의 의미를 담아
옛 선비들이 즐겼던 풍류문화를 재현하는 연희 공연장 오각정자를 건립해
지역 문화관광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산청군은 기산 선생의 유지와 정신을 이어받아
기산 국악제전을 설립하여 전통 예술발전에 큰 공을 세운
기산 선생 제자들의 뜻을 모아 수제자 송포 최종실 기산국악제전위원장의
아호를 붙여 현판을 송포정이라 명하여 건립하였다.
이천십구년 십월 십일일
글쓴이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홍윤식 박사
국가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장 이수자 실목 양한식 새김
누구의 것이랄 것도 없는
- 기산 박헌봉 선생 수연에(박목월) -
누구의 것이랄 것도 없는 겨레의 가락을 보듬으며
그분은 한평생 살았네
절로 웃즐거리는 겨레의 신명과 흐느끼는 겨레의 하소연
구름이 개이면 하늘이 푸르듯 넘실거리는 가락을 보듬으며
그분은 한평생 살았네
이 골짜기의 샘물과 저 들판의 바람결 같이
누구의 것이랄 것도 없는 겨레의 선물 그 창창한
누구의 것이랄 것도 없는 그 낭낭한 박자를 보듬으며
한평생 수긋하게 그분은 살았네
무심한 듯 깊은 그분의 길 우리 것을 보듬어
한평생을 고스란히 살았네
잠결에는 엿듣는 그 가락 그 노래
이제 빛나는 은빛 머리칼에 우리 겨레의 해빛이 야른거리네
누구의 것이랄 것도 없는 겨레의 가락을 보듬어
그분은 한평생 살았네
천구백육십육년 십이월 십칠일 축시
실목 양한식 새김
대바람 소리(김홍신)
하늘에게 어찌 살라느냐 물었더니
대나무처럼 살라 하네요
대나무는 가늘고 길어도 쓰러지지 않지요
마디가 있고 속이 비어서 그렇다더라
인생의 고비가 마디요
속을 비우는 건 마음 내려놓는 거라네요
아 - 그 울림의 소리는 대바람 소리
대나무에게 어찌 살라느냐 물었더니
바람처럼 살라 하네요
바람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다지요
걸림이 없고 자유로워서 그렇다더라
사랑과 용서로 짠 그물에는
바람도 걸리고 하늘도 웃는다네요
아 - 그 울림의 소리는 대바람 소리
이천십구년 오월 삼일 기산국악당 대밭극장 개관 기념 축시
실목 양한식 새김
대밭극장
국악의 노래
고운 산과 맑은 물
금수강산 이 나라
예의미풍 노래하니
문화민족이 이 아니냐
박차여라 나아가세
어두운 거리에
횃불을 밝혀라
잃었던 국악을 다시 찾자
씩씩하고 순결하게
삼천만 겨레의 피가 뛴다
같은 혈맥 나의 겨레
웃음의 융화도 우리국악
박차여라 나아가세
어두운 거리에 횃불을 밝혀라
잃었던 국악을 다시 찾자
박차여라! 나아가세!
이곳 산청 출신 기산(岐山) 박헌봉(朴憲鳳) 선생은
우리 민족 음악의 발전에 기여한 선구자이시다.
이 노래는 학문적인 경지가 수승한 기산 선생이 작사하고,
국악의 음률에 능통한 향사(香史) 박귀희(朴貴姬, 1921 - 1973) 선생이 작곡하여
국악의 진수를 잘 나타내고 있다.
이제 후학들은 국악이 내포하고 있는
이와 같은 정신과 기법을 잘 보존하고 가꾸어 가야 할 것이다.
2018년 9월 28일
기산박헌봉선생추모비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 최종실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 교장 왕기철
글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홍윤식
글씨 계명대학교 명예교수 김양동
예담길
양쪽에 장암(丈岩)과 우암(友岩)이란 거북바위가 웅크리고 있는데,
어른 장(丈)자를 쓰는 장암(丈岩)은 부모 거북,
벗 우(友)자를 쓰는 우암(友岩)은 두 마리 새끼 거북을 상징합니다.
부모 거북바위는 항상 새끼 거북바위를 바라보며 챙기고 보살핀다고 합니다.
거기엔 자식이 장성해 아무리 큰 인물이 되더라도
부모의 보살핌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새끼 거북 형제는 서로 우애하라는 뜻에서 우암이라는 이름을 붙인 듯하다.
돋을새김을 한 장암(丈岩)
오목새김을 한 우암(友岩)
다정가(多情歌)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 배꽃이 하얗게 피어난 가지에 밝은 달이 비치니 더욱 희게 보이고
은하수 위치를 살피니 바로 한밤중이다
이 배꽃 가지에 서려 있는 봄 뜻을 소쩍새 따위야 알랴마는
나의 이렇듯 다정다감함도 무슨 병과도 같아서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구나
샘
용소바위
배움의 길(15세, 지학, 志學)
玉不琢이면 不成器하고 옥은 다듬지 않으면 그릇이 되지 못하고
人不學이면 不知義니라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의를 알지 못하느니라
초포정(草浦亭)
초포동교(草浦洞橋)
초포정사(草浦亭舍)
월포 이우빈(月浦 李佑贇, 1792 - 1855) 선생이 1822년(순조 22)에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고 성리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한 곳이라는 걸.
이동서당(尼東書堂)
산청 이동서당(山淸 尼東書堂)
면우 곽종석 선생은 1846년 6월24일에 단성면 사월리 초포동에서 태어나,
유학을 부흥시키고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1919년에는 유림을 대표하여 파리평화회의에 보낼 파리장서를 작성하고 전달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른 뒤 돌아가셨다.
1920년에 제자와 유림들이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이동서당(尼東書堂)을 건립하였다.
강당은 정면 5칸 · 측면 1.5칸의 규모에 팔자 모양의 팔작지붕을 얹었고,
서재는 정면 3칸 ·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을 얹었다.
1984년에 선생을 기리는 유허비(遺墟碑)가 세워지고,
1991년에는 정면 3칸 · 측면 1.5칸에 맞배지붕을 올린 사당을 건립하였다.
면우곽선생유허비(俛宇郭先生遺墟碑)
초포정
자립의 길(30세, 이입,而立)
근위무가지보(勤爲無價之寶)요 부지런히 일하는 것은 더 없이 귀중한 것이 될 것이요
신시호신지부(愼是護身之符)니라 정성스럽게 하는 것은 이 몸을 보호하는 부적이니라
초포동교
초포동교
포구정(浦口亭)
선명당의 단풍나무
선명당 앞에 심겨진 단풍나무는 겨울 채비를 걱정하는
종갓집 며느리를 가여워하던 시아버지가 심은 것으로
붉에 물든 단풍을 보며 잠시 시름을 잊으라는 뜻으로 심겨졌다.
선명당의 매화나무(정씨매)
정씨매는 남사예담촌에서 가장 늦게 꽃을 피우는 매화나무로,
최씨고가를 방문하는 손님들이 최씨고가 대문에 들어오기 전
담장 너머로 보이는 정씨매화의 아름다움에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선명당(善鳴堂)
은초 정명수(隱樵 鄭命壽, 1909 - 2001) 선생의 글씨이다.
사양정사의 배롱나무
배롱나무는 100일 동안 꽃이 번갈아 피고 져서 오랫동안 볼 수 있는 나무로,
선비의 학문 수양과 조상의 은덕이 거듭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심었다.
사양정사
산청 사양정사(山淸 泗陽精舍)
사양정사는 한말의 유학자 계제(溪濟) 정제용(鄭濟鎔, 1865 - 1907)의
아들 정덕영과 장손 정종화가 남사로 이전한 후
선친을 추모하기 위하여 마련한 정사(精舍)로 1920년대에 지어졌다.
정제용은 포은 정몽주의 후손으로 한말의 유학자인 후산(後山) 허유(許愈)와
유림을 대표하여 파리장서(巴里長書)를 작성한 면우(免宇) 곽종석(郭鍾錫)의 문인이다.
사양정사란 ‘泗水’ 남쪽의 학문을 연마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여기서의 ‘사수’는 공자의 고향인 중국 산동성 곡부(曲阜)에 있는 강 이름인데,
공자를 흠모하는 뜻으로 남사마을 뒤에 있는 개울을 사수라 부르고,
정사가 개울의 남쪽에 있어 사양정사라 이름하였던 것이다.
건립 이후 주로 자손을 교육하고 문객을 맞아 교유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사양정사는 정면 7칸 ·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으로서
천장이 높고 부재가 튼실하며 치목이 정교할 뿐 아니라
다락과 벽장 등 수납공간을 풍부하게 설치하였으며,
또한 당시로서는 새로운 건축 재료인 유리를 사용하여
근대기 한옥의 변화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4칸의 광을 넣어 7칸의 장대한 규모로 구성한 대문채에는
충절을 상징하는 홍살 넣은 솟을대문을 달아
사양정사의 품격과 풍부한 경제력을 나타내었다.
하씨고가의 감나무
고려 말 원정공(元正公) 하즙(河楫)의 손자 하연(河演, 1376 ~ 1453)이
어릴(7살) 때 어머니에게 홍시를 드리기 위해 심은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감나무이다.
토종 반시감으로 산청곶감의 원종이기도 하며,
현재에도 감이 열리고 있다.
문효공경재선생식수시목(文孝公敬齋先生樹植柿木)
수령(樹齡) 약 580년
서기 1986년 병인(丙寅) 10월 일
예담정
예담정에서 내려다본 원정매
엄나무
남학정(南鶴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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