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 선황사와 성황당산(2021.5.23. 일요일)
사천시 정동면 예수리 침곡저수지 위 삼거리,
선황사와 대승정사로 가는 길이 나뉘는 곳이자,
이구산과 성황당산 등산로 입구이기도 하고
성황당성지비(城隍堂城址碑)
이곳은 해발(海拔) 209m의 이구산(尼丘山)이며,
성(城)은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축조(築造)되었다 한다.
성내(城內)에는 군창(軍倉)을 비롯하여 성황단사(城隍壇祠)도 있었으며
식수(食水)로 쓰여진 샘과 물을 저장(貯藏)하던 웅덩이에 황토(黃土)와 진흙으로 다진 흔적도 보인다.
성(城) 둘레는 1,109m에 달(達)하며,
성벽(城壁)의 기초 부분은 군데군데 사각(四角)의 석재(石材)로 보강한 흔적이 있고,
성(城)의 남서쪽 낮은 곳에 건물(建物)의 초석(礎石)이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와편(瓦片)만 산재(散在)한다.
우리들은 조상(祖上)들이 남긴 문화유산(文化遺産)을 소중(所重)히 여기고,
향토사적(鄕土史的) 차원(次元)에서 문화재(文化財)로 발굴(發掘) 보호(保護)하여
후세(後世)에 길이 전(傳)하고자 표석(標石)을 세운다.
1989년 9월 일
사천문화원(泗川文化院) 입(立)
선황사(仙隍寺),
1968년도에 설립된 사찰이라 하고
성황당산(209.3m)
성황당산 삼각점(경남-247호)
자료사진
성황당산성 내 단군상(檀君像, 자료사진)
성황당산성 내 제단(祭壇)
사천 성황당산성( 泗川 城隍堂山城, 경상남도 기념물 제132호)
사천 성황당산성은 성황산(城隍山)의 맨 꼭대기 부분을 흙과 돌로 둘러쌓은 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성벽의 둘레는 1,500m이고,
높이는 약 5m이며, 성안에 우물 1개와 연못 1개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토성과 석축이 남아 있고, 우물의 흔적이 있다.
성안에는 성황당 터가 남아 있다.
산성을 쌓은 시기는 발굴된 유물 등을 고려하면 명확하지 않지만 신라시대로 짐작된다.
그러나 성벽을 쌓은 방법 등으로 볼 때 고려 말이 조선 초에 다시 고쳐 쌓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 성은 고읍성(古邑城)이라고도 불리는데,
그 이유는 옛 사천 고을의 중심인 읍 소재지가 산성과 가까운 정동면 고읍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고려사절요, 高麗史節要>에는 왕건(王建)의 아들 왕욱(王郁)이 사천에 귀양을 와서 살았는데,
그가 이곳에서 죽을 때 성황당 귀룡동(歸龍洞)에 묻어 달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성황당이라는 단어가 기록물에 나왔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1993년 12월 7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132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