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과 풍경

신록으로 물들어 가는 진양호공원 1(2021.4.14. 수요일)

큰집사람 2021. 4. 14. 20:46

 

 

 

 

 

진양호공원 입구

 

 

진양호공원 정문

 

 

 

 

 

 

 

 

6·25전쟁 및 월남전쟁 참전기념비

 

 

충혼탑

 

 

 

 

 

 

 

 

 

 

 

 

 

 

 

 

 

 

 

 

 

 

 

 

 

 

 

 

 

 

 

* 1코스(15.3km, 약 5시간)

  진양호공원정문 - 1.40km(21분) - 진양호전망대 - 1.07km(30분) - 양마산팔각정 - 1.31km(33분) - 수변탐조대 -

  1.69km (35분) - 명석가는길(쉼터) - 0.87km(20분) - 2코스갈림길 - 2.62km(60분) - 가화버스정류장 - 1.80km(26분) -  

  상촌삼거리 - 3.20km(47분) - 진양호공원후문 - 1.30km(19분) - 진양호공원정문

 

* 2코스(10.8km, 약 3시간 40분)

  진양호공원정문 - 1.40km(21분) - 진양호전망대 - 1.07km(30분) - 양마산팔각정 - 1.31km(33분) - 수변탐조대 -

  1.69km (35분) - 명석가는길(쉼터) - 0.87km(20분) - 1코스갈림길 - 1.72km(48분) - 상락원 -  1.40km(20분) -

  진양호공원후문 - 1.30km(19분) - 진양호공원정문

 

 

 

 

 

 

 

 

 

 

망향비

 

 

 

 

 

귀곡동 승선장

 

 

 

 

 

 

 

 

 

 

 

남강댐 물문화관

 

 

 

 

 

 

 

 

 

 

 

 

 

 

 

 

 

상수원 보호구역 감시선

 

 

 

 

 

 

 

 

가곡호

 

 

 

 

 

 

 

 

 

 

 

 

 

 

 

 

 

 

 

 

 

 

 

 

 

 

귀곡동 일원

 

 

 

 

 

 

 

 

 

 

 

 

 

 

 

 

 

 

 

 

 

 

 

 

 

 

 

 

 

 

 

 

 

 

 

 

 

 

 

 

 

가요황제 남인수 동상

최창수, 강문수, 남인수,

이 세 개의 이름이 드러내는 공통점은 하나다.

이름의 마지막 글자가 ‘수’자라는 것.

그러나 재미있게도 이 세 개의 성과 이름은 한 사람의 것이다.

최씨 집안에서 태어나 최창수(崔昌洙)란 이름을 얻었고,

개가(改嫁)한 어머니를 따라 진주 강씨 문중으로 들어가면서 강문수(姜文秀)로 바뀌었고,

불세출의 가요황제로서 온 국민의 사랑을 받은 이름이 작사가 강사랑이 지어준 남인수(南仁樹)이다.

그러니까 원명은 최창수요 본명(개명)은 강문수이고 남인수는 예명인 셈이다.


남인수(南仁樹, 1918.10.18.~1962.6.26.)는 한 일간신문이 평론가 등

대중음악 전문가 18명을 대상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중음악 50년사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음악인을 설문 조사한 결과

조용필, 이미자, 나훈아, 서태지와 아이들에 이어 다섯 번째로 그 이름을 올렸다.

모두가 현역가수인 반면 남인수는 이미 40년 전에 작고한 가수라는 점을 감안하면,

남인수라는 가수가 우리나라 가요사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남인수에게는 당연히 최고의 찬사들이 따라 다닌다.

“가요황제”, “국민가수”, “불멸의가수”, “우리 가요계 사상 최고의 미성(美聲) 가수”,

“백년이 지나도 나올 수 없는 하늘이 내린 목소리” 등등.

1962년 6월 26일 남인수가 불과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던 날,

명콤비였던 작곡가 박시춘은

“이제 내 평생 남인수와 같은 가수는 두 번 다시 얻지 못할 것 같다.”며

그의 요절을 참으로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남인수에게 찬사만 바쳐졌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돈 관리에 인색해 붙은 별명 ‘돈인수’외에 그에게는 ‘여인수’라는 별명이 하나 더 붙어 있다.

가요계의 기린아가 된 남인수의 인기는

극장 공연 때 기생들이 보낸 인력거가 극장 앞에 진을 칠 정도였고,

공연이 끝날 즈음에는 인력거꾼들이 남인수 모셔가기 쟁탈전을 벌여

그를 요정으로 데려가면 기생들이 버선발로 뛰쳐나와

칙사대접을 했을 만큼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당시 전국의 어느 기생이 남인수의 애인인가가 화제가 되기까지 했다고 한다.

뭇 여성들로부터 얼만큼 사랑을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빠부대’의 원조가 그 기생들은 아니었을까?

‘여인수’에 관한 이야기는 아마도 ‘목포의 눈물’을 불러 남인수 못지않은

명성을 날리고 있던 여가수 이난영과의 사랑에서 기인한 바도 적지 않았다.

남인수는 김은하와 결혼하여 2남 2녀의 자녀가 있는 가정을 가지고 있었으나,

남편인 작곡가 김해송이 납북되어 홀로된 가수 이난영을 지극정성으로 도왔다.

이난영은 홀로 7남매를 키우고 있었다.

여리고 착한 여성 동료인 이난영을 돌보던 동료애가

결국은 애정으로 변하여 한 시대의 로맨스를 꽃피웠다.

이난영 역시 남인수가 폐병을 앓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뜨거운 헌신과 사랑으로 남인수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노력했다.

남인수가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 같이 있었던 사람도 이난영이었다.

남인수가 부른 노래가 모두 몇 곡인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광복 전에 800여곡을 취입했고 광복 후에 200여곡을 불렀다니,

도합 1,000여 곡이 넘는 노래를 부른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그 중에서도 우리에게 익숙한 노래들이라면

‘애수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정거장’, ‘감격시대’ 등일 것이다.

그 중 ‘애수의 소야곡’은 그의 데뷔곡인 ‘눈물의 해협’ 멜로디에

이부풍이라는 사람이 신작가사를 붙여 재 발표한 곡인데,

이 음반의 발표로 남인수는 인기 정상으로 향하는 첫발을 내딛게 된다.

그의 이름을 불멸의 것으로 만든 이 '애수의 소야곡'은 놀라운 판매 실적을 올렸는데,

음반이 출시되자 마자 순식간에 매진되는 바람에 팔다 남은 레코드라도 구하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든 상인들로 레코드사 일대의 여관에 빈방을 구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장례식 때 장송곡 대신 조계사에 울려퍼졌던 음악도 바로 이 ‘애수의 소야곡’이었다.

‘이별의 부산정거장’은 1953년 부산 임시수도에서 서울로 환도한 후 박시춘이 처음으로 만든 작품으로,

피난민의 애환을 노래하면서 환도 시기의 이별의 아픔과 서러움을 그대로 진솔하게 노래한 명작으로 꼽힌다.

가사와 곡조, 노래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삼위일체의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는데,

남인수의 애간장을 끊어내는 듯한 창법이 어우러져 우리 가요사의 절창(絶唱)으로 기억되고 있다.

한 인생에 그림자가 없을 것인가?

그 역시 시대의 아픔에서 비켜설 수 없었을 것이고,

당시 많은 문인들이 자의든 타의든 친일시를 썼고 일본 군국주의를 찬양했듯,

그 역시 친일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 대표적인 노래로 꼽히는 것이 ‘감격시대’인데,

이 노래는 문민정부 시절 광복절 기념행사를 하면서 중앙청(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허물 때 울려퍼져 여론의 질타를 받은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1932년 만주침략 때 일제의 정책을 고무 찬양한 노래가 아니냐는 비판이었다.

일제통치 35년의 상징적 건물을 허물면서 친일노래를 틀었다면,

참으로 황당하고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 노래가 친일과는 상관없다는 주장도 있다.

하여간 당시 이 노래를 튼 방송 관계자가 이 ‘감격시대’가

해방 전에 불리워졌던 것을 모른데서 일어난 해프닝(happening)이었다.

치욕의 역사를 안고 있는 건물을 부순 사건이 그저 ‘감격’스럽기만 한 탓이었을까?

남인수는 1918년 10월 18일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1926년 진주공립제2보통학교(현 봉래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932년 3월 졸업한 것이 그가 받은 제도권 교육의 전부이다.

한국연예인협회 부이사장과 대한가수협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1962년 6월 26일 그는 45세의 일기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폐병이 그 원인이었다.

그의 장례식은 한국연예협회 주관으로 서울 조계사에서

‘애수의 소야곡’이 장송곡 대신 흐르는 가운데 거행되었다.

그리고 그토록 그리워하던 고향 진주(하촌동)에 묻혔다.

2001년 6월 26일 진양호 언덕에는 그의 39주기를 맞아

예전에 있던 노래비(내 고향 진주, 반야월 작사)를 뜯어낸 자리에

‘가요황제 남인수’ 동상과 새로운 노래비(애수의 소야곡, 이부풍 작사)가 나란히 세워졌다.

일찍이 ‘남진주 북평양’이라 했을 만큼 널리 알려진

풍류의 고장 진주가 낳은 한 위대한 대중음악가의 예술혼은

오늘도 진양호의 잔잔한 물결처럼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을 흐르고 있다.

 

 

 

 

일년계단(소원계단)

 

 

 

 

 

 

 

 

 

 

 

 

 

 

 

 

 

 

 

 

 

 

 

 

 

 

 

 

 

 

 

 

 

 

 

 

 

 

 

 

 

 

 

 

 

 

 

 

 

 

 

 

 

 

 

 

 

 

 

 

 

 

 

 

 

 

 

 

 

 

 

 

 

 

 

 

 

 

 

 

 

 

 

 

 

 

 

 

 

 

 

 

 

 

 

 

 

 

월아산 국사봉과 장군대봉

 

 

 

 

 

 

 

 

진양호 호반전망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