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과 풍경

오랜만에 찾은 사천 다솔사(2020.2.8. 토요일)

큰집사람 2020. 2. 9. 11:35






다솔사(多率寺)

사천시 곤명면 다솔사길 417(용산리 86)에 자리 잡고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인 범어사(梵魚寺)의 말사이다.


503년(지증왕 4년)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하여 영악사(靈嶽寺)라 하였고,

636년(선덕여왕 5년) 건물 2동을 신축하고 다솔사로 개칭하였다.

676년(문무왕 16년) 의상대사(義湘大師가 다시 영봉사(靈鳳寺)라고 고쳐 부른 뒤,

신라 말기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중건하고 다솔사라고 하였다.

1326년(충숙왕 13년) 나옹(懶翁)이 중수하였고,

조선 초기에 영일 · 효익 등이 중수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1686년(숙종 12년) 복원하였다.

1748년(영조 24년) 당우(堂宇)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1758년 명부전 · 사왕문 · 대양루 등을 중건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대양루를 제외하고

1914년의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 재건한 것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된 대양루(大陽樓)를 비롯하여,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8호인 극락전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9호인 응진전,

극락보전 · 나한전(羅漢殿) · 천왕전(天王殿) · 요사채 등 10여 동의 건물이 있다.

대양루는 1749년(영조 25년) 건립된 2층 맞배집으로서, 건평 106평의 큰 건물이다.

1958년에 중건하고, 1986년에 수리하였으며, 2000년 1월에 다시 보수를 마쳤다.

1978년 2월 8일에 있었던 대웅전 삼존불상 개금불사(改金佛事) 때

후불탱화 속에서 108개의 사리가 발견됨에 따라,

다솔사에서는 익산 미륵사지의 석탑을 본뜬 높이 23m,

30평 정도의 성보법당(聖寶法堂)을 탑 안에 설치하여

적멸보궁사리탑(寂滅寶宮舍利塔)을 건립하였다.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마멸이 심한 마애불(磨崖佛)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9호인 보안암석굴(普安庵石窟), 부도군(浮屠群) 등이 있다.

보안암석굴은 고려 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하여지며,

경주 석굴암의 형태와 비슷하다.

석굴 안의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은 코부분이 깨어져 있으며,

본존불을 중심으로 하여 1.3m 내외의 석불좌상 16구가 안치되어 있는데,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선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부도군에는 도명(道明) · 낙화(樂華) · 성진(聖眞) ·

풍운(風雲) · 세진(洗塵) 등 5인의 부도가 있다.

다솔사는 일제 때 한용운(韓龍雲)이 머물러 수도하던 곳이며,

소설가 김동리(金東里)가 『등신불(等身佛)』을 쓴 곳이기도 하다.

절 주위에서 재배되는 죽로차(竹露茶)는

반야로(般若露)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명차이다.






























어금혈 봉표



어금혈 봉표(御禁穴 封表)

그 옆에는 광서 십일년 을유 구월(光緖 十一年 乙酉 九月)이라 각자되어 있는데,

광서는 중국의 청나라 덕종 광서제의 연호(年號)로,

광서 11년은 1885년(고종 22년)을 뜻한다.














다솔사차문화관






























대양루





















해우소












적멸보궁



대양루















만덕산왕위(萬德山王位)



적멸보궁















산신각















부처님 사리탑


















응진전과 극락전



응진전






극락전










































만해 한용운 선생 친식수(卍海 韓龍雲 先生 親植樹),

1939년 8월 29일 회갑 기념으로 황금공작편백나무 3그루를 심었다 하고





안심료(安心寮)

일제 강점기 때 불교계 항일운동의 거점으로 민족정신을 일깨운 곳으로,

만해 한용운 스님이 은거한 1930년대에 지은 단층의 평범한 요사채이다.

만해 스님은 이곳에 12년 간 은거하면서 항일비밀결사단체인  

만당(卍黨)을 조직하고 계몽운동과 불고정화운동 등을 펼쳤다.

백용성 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19193.1독립선언에 참여했던 만해 스님, 

지인들과 교류하면서 독립선언문 초안을 작성했던 역사적인 장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