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권 산행기

북천역을 축으로 계명산 - 이명산 - 시루봉 원점산행

큰집사람 2019. 10. 10. 21:39


* 날    짜 : 2019년 10월 10일(목요일)

* 날    씨 : 맑음

* 산 행 지 : 직전1건널목 - 계명산 - 마애석조여래좌상 - 이명산 - 시루봉 - 살티재 - 직전1건널목

* 산행시간 : 5시간 15분(운행시간 3시간 47분 + 휴식시간 1시간 28분)

* 산행속도 : 보통 걸음

* 산행인원 : 1명(나 홀로)







* 산행일정

10:00          직전1건널목

10:30 - 10:40  계명산(381.9m) 

11:15          안골고개

11:25 - 12:15  이명산 석불사지 및 마애석조여래좌상(400m)

12:23 - 12:27  이명산 9지점 삼거리(상사봉 - 시루봉 갈림길, 460m)

12:39 - 12:49  이명산 상사봉(창원 310, 570.1m)

12:58          이명산 9지점 삼거리(상사봉 - 시루봉 갈림길, 460m)


13:02          뿔당고개

13:15          491m봉(이명산 8지점)

13:36 - 13:50  이명산 시루봉(547.5m)

14:03          476.7m봉(곤양 441)

14:22          살티재

14:41          직전3건널목

14:55          나들교

15:00          직전교

15:15          직전1건널목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 직전1건널목,

이병주문학관 2.5km · 하동레일바이크 0.88km요,

이명산 등산로 입구를 가리키는 거리 표시 없는 이정표가 서 있고

바로 옆엔 옛국도 2호선 경서대로가 지나는가 하면 새로운 경전선 북천역이 자리 잡고 있으며,

옛 경전선 철로를 이용하여 2017년 5월 13일 개통한 하동레일바이크가 지나는 곳으로,

하동레일바이크 운행구간은 북천역에서 양보역까지 5.3km(이명터널 1.2km)라던가?

제13회 하동북천코스모스 · 메밀꽃축제(9.20 - 10.6)는 끝나고 말았지만,

코스모스는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고운 자태를 자랑하고 있는데,

아직은 인연이 닿지 않은 계명산으로 올라,

지난 9월 10일 참말로 오랜만에 다녀온 이명산 상사봉,

그때 가지 못한 이명산 시루봉을 거쳐 살티재로 내려서서,

직전3건널목을 지나 농로와 국도 2호선을 따라 돌아오는 환종주,

그 누구랑도 아닌 나 홀로 나서기로,

거의 언제라도 그러하듯이,

어차피 인생이란 혼자가 아니던가?(10:00)





북천역












4분 남짓 지났을까,

외딴집을 지나자마자 산길로 들어서는데,

계명산 정상까지는 쭉 오르막길이 이어지고




















계명산 정상부,

쭉쭉 뻗은 편백나무가 둘러싸고 있어 조망이라곤 없으며,

<포항 근교산 마카다 오르기> 달전 아이리시어학원 손경호 씨의 코팅지가 걸려 있을 뿐이요,

봄과 가을이면 꽃양귀비 및 코스모스 · 메밀꽃 축제와 연계하여 전국에서 많은 산꾼들이 찾는데,

하동군이나 북천면에서 자그마한 정상석이라도 세우면 좋지 않을까?

이명산 상사봉에는 정상석이 3개나 되고,

이명산 시루봉에도 2개인데(10:30 - 10:40, 381.9m)








참호 흔적인 듯?



안부 사거리,

지난 9월 10일 부일수련원 아래 이정표에서 올라선 곳이고(10:55)





노전처사강성문공지묘(老田處士江城文公之墓)



삼거리,

마애불 1.2km · 코스모스축제장(직전마을) 2.2km를 가리키고(11:04)


안골고개 사거리,

마애불 0.7km · 코스모스축제장(직전마을) 2.7km · 부일수련원 0.1km를 가리키고(11:15)












돌아본 계명산



천왕봉과 중봉을 비롯한 지리산 일대
























이명산 석불사지,

이명산 석불사지(理名山 石佛寺址)는 옛 절터로,
개금사지(開錦寺址) 또는 화곡사지(火谷寺址)라고도 하며,
이명사지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28호,
마애석조여래좌상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6호로 지정되었다.(11:25 - 12:15)



고세대(高世臺),

가로로 <고세대(高世臺)>라는 큰 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 세로로 작게<문철호(文澈鎬), 최경병(崔瓊秉), 권상연(權相淵)>이란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해 이곳에 모여 시와 창을 즐겼다 한다.















이명산 석불사지(理明山 石佛寺址),

이명산(理明山, 일명 山) ) 북쪽 산정 가까이에 위치한 이곳

석불사 절터에는 파괴된 석굴 2기와 암벽에 조각된 마애불상이 있다.

석굴은 이명산을 사이에 두고 사천시 곤양 다솔사(多率寺)의

보안암(普安庵)의 석굴과 남북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다.  

석굴의 벽과 천장이 모두 무너져 원형을 잃었으나,

다솔사 보안암의 석굴과 마찬가지로 자연석을 쌓아 올려

무덤(積石塚, 적석총)처럼 만든 형태였으리라 추정된다.

그 중 마애불상이 있는 석굴은 보안암 석굴보다 훨씬 큰 규모이다.

석굴의 크기나 정확한 구조는 잘 알 수 없지만,

보기 드문 석굴사원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곳의 마애불상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현의 북쪽 20리에 있는 이명산은 동경(東京, 즉 경주)의 비보산 (襣補山)인데,

산 정상에 용이 사는 연못이 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눈이 멀게 되어 고통을 받고 있다.

그리하여 화철석(火鐵石)을 그곳에 담갔더니

용이 곤양의 진교(辰橋) 아래 깊은 소(沼)로 옮겨갔다.

그 다음부터 사람들이 소경이 되지 않았다.>라는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언뜻 들으면 허무맹랑한 전설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명산을 동경의 비보산이라 부르고 있고,

경주의 석굴암과 비슷한 석굴사원이 이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이명산과 그곳에 있는 석굴이

경주와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1974년 12월 28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28호 지정)





이명산 시루봉









천왕봉과 중봉을 비롯한 지리산 일대









이명산 마애석조여래좌상,

쉼터 0.7km · 부일수련원 0.7km · 이명산 0.6km를 가리키고(400m)

















이건 아닌데?

이명산 마애석조여래좌상을 소개해야 하는 걸,

여기도 석불사지가 맞긴 하지만,

석불사지 안내판은 조금 전에 보고 왔는데,

낡은 걸 새로이 바꾸면서 착오가 생긴 듯?


이명산 마애석조여래좌상(理明山 磨崖石造如來坐像),

이 석조여래좌상은

자연 암벽을 다듬어 작은방(龕室, 감실)을 만들고 그 자리에 불상을 조각한 것이다.

머리 부분은 몸체에 비해 훨씬 도드라지게 새겨 아주 뚜렷하게 표현하였으나,

목 이하는 벽면에 선으로 간단하게 윤곽선만을 묘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머리 아래 부분은 비바람에 쓸려 나가버려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려운 상태이지만, 얼굴만은 그 모습이 분명하게 남아 있다.

머리는 민머리(素髮, 소발)이며 상투 모양의 육계(肉髻)는 크고 높다.


얼굴은 둥글고 풍만한 편이나,

두툼한 턱, 가늘게 뜬 눈, 꼭 다문 입 등을 보면 매우 근엄하게 보인다.

오른손은 들어올리고, 왼손은 팔을 굽혀 무릎 위에 올려놓은 듯한데,

이런 표현 방식은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의 아흡 가지 손 모양(九品定印) 중 하나이다.

그런 점에서 이 불상은 서방의 극락세계를 다스리는 아미타여래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불교에서는 극락세계를 아홉 가지의 등급으로 표현하며,

각각의 극락을 다스리는 아미타불도 아홉 가지의 손 모양으로 차이를 두어 표현하였다.

이 불상은 전체적인 조각기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1974년 12월 28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6호 지정

























































이명산 9지점 삼거리,

이명산 상사봉과 시루봉 갈림길이기도 하며,

상사봉부터 올라갔다 내려와서 시루봉으로 가기로 하는데,

카메라 배터리를 갈아끼우고 목을 축이느라 잠깐 머물 수밖에,

마애불 0.17km·이명산 0.5km·황토재 5.5km를 가리키고(12:23 - 12:27, 460m)




















이명산 상사봉,

정상석이 셋이나 되는 행복한(?) 봉우리인데,

아예 없는 산도 많고 계명산에도 없던데 이래야 하는 걸까?

무고재 1.5km·황토재 6.0km·시루봉 1.9km를 가리키고(12:39 - 12:49, 570.1m)





경남정보고OB산악회에서 세운 정상석,

이게 원조라고나 할까?


하동군에서 2018년 1월 세운 거고



한가운데 자리 잡은 정상석,

사천시 곤양산악회에서 세운 거고




















사천읍



와룡산



이명산 전망대는 주춧돌만 남아 있고



이명산 전망대(자료사진)






금오산



숲속에 널브러진 육각정 부스러기들



이명산 상사봉 삼각점(창원 310)






그전엔 있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사라지고 없고








다시 돌아온 이명산 9지점 삼거리,

이제 마애불 아닌 시루봉으로 가고자 뿔당고개로 내려가는데,

마애불 0.17km·이명산 0.5km·황토재 5.5km를 가리키고(12:58, 460m)








뿔당고개,

월운임도 쪽은 그런대로 길이 보이지만,

직전리 안골 쪽으론 잡목만 무성할 뿐 길은 사라지고 없는 듯,

시루봉정상 1.1km·상사봉정상 0.6km·월운임도 0.4km를 가리키고(13:02)  





삼지송(三枝松)



이명산 8지점,

아까 지난 뿔당고개라 되어 있지만,

그게 아닌 491m봉이고(13:15)


코앞으로 다가서는 시루봉












하동 진교와 금오산



지나온 491m봉






491m봉과 상사봉






이명산 7지점(13:28)






청미래



철부지 철쭉









이명산 시루봉,

2001년 5월 양보 이명산악회에서 세운 아담한 정상석과 돌탑,

그리고 달구봉(계봉, 鷄峰)이란 또 하나의 정상석이 있는데,

닭을 가리켜 달구라 하니 닭봉우리란 뜻이요,

한자로 옮기다 보니 계봉으로 바뀌게 된 셈이며,

국토지리정보원 지형도엔 계봉(548m)으로 되어 있는 걸,

이명산(理明山)에 대한 전설을 옮기면,

<달구봉 정상 깊은 용지(龍池)에 용이 살고 있어

경주에 사는 사람들이 갑자기 맹인(盲人)이 되는 등

고통을 받자 돌을 불에 달구어 못에 넣으니,

용이 진교(辰橋) 아래로 옮겨간 뒤로는

맹인들도 다시 광명(光明)을 찾게 되자

이맹산(理盲山)을 이명산(理明山)으로 고쳐 부르게 됐다.>

황토재 3.6km · 상사봉 1.7km를 가리키지만,

여기저기 서 있는 이정표가 제각각이라 믿을 수가 없는데,

제대로 통일을 시킬 순 없는 걸까?(13:36 - 13:50, 547.5m)








금오산



진교


















달구봉 정상 깊은 못에 용이 살고 있어

경주 사람들이 갑자기 맹인(盲人)이 되고 고통을 받자,

돌을 불에 달구어 못에 넣으니 용이 진교 아래 깊은 못으로 옮겨간 뒤로는,

맹인들도 광명을 찾아서 이맹산(理盲山)

이명산(理明山)으로 개칭하였다는 전설이 서려 있음.

2002.11.

진교면지 편찬위원회














지리산



백운산



형제봉



























이명산 6지점(13:56)









476.7m봉,

삼각점(곤양 441)이 자리 잡고 있지만,

억새 속에 숨은 삼각점은 아예 보이지도 않으며,

이명산 5지점이기도 한데,

황토재 2.8km · 시루봉 0.8km를 가리키고(14:03)





이명산 4지점(14:10)






이명산 3지점(14:17)






살티재,

그전엔 경전선 이명터널이 이 부근으로 지났다고 하는데,

하동군 북천면 사평리와 양보면 우복리를 잇는 고개지만,

산꾼들이 다닐 뿐 고개를 오가는 이들은 거의 없지 않을는지?
시루봉에서 함께하던 백두대간 우듬지 산줄기에서 벗어나,
희미한 길을 따라 북천면 사평리 쪽으로 내려가고(14:22)





밤나무단지가 이어지고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가고(14:30)









삼거리,

위 아닌 아래로 가고



































직전3건널목,

2차선 아스팔트 포장도로 배안골길을 따라가고(14:41)




















사평마을에 이르기에 앞서 2차선 아스팔트 포장도로에서 벗어나,

오른쪽으로 난 콘크리트 포장농로를 따라 내려가고(14:45)





돌아보고



























국도 2호선이 지나는 직전터널






직전마을과 계명산



나들교(14:55)



나들교를 건너자마자 옛 국도 2호선 경서대로를 따라가고



























직전교를 건너고(15:00)



직전마을,

삼우당 문익점 선생의 10세 손인 직하재 문헌상(1652 ~ 1722) 선생이

벼슬에 뜻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조선 숙종 5년(1679년)에 이사와

정착한 이래 강성 문씨 집성촌이 되었다 하고


강성군삼우당문선생숭모비(江城君三憂堂文先生崇慕碑, 문익점비)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 1329 ~ 1398) 선생은 강성문씨로서,

충정공(忠貞公)  문숙선(文淑宣)의 아들이다,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9년(1360)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고,

공민왕 12년(1363)에는 좌정언(左正言)으로

이공수(李公遂)를 따라 원(元)나라에 갔다.

이때 충선왕(忠宣王)의 서자(庶子)인 덕흥군(德興君) 왕혜(王譓)가

원나라에 머물고 있던 최유(崔濡)와 본국(本國)의 김용(金鏞) 등과

비밀히 음모를 꾸며 왕위(王位)에 오를 것을 원나라 순제(順帝)로부터

승낙을 얻은 후  명망(名望)이 높은 문익점 선생에게 동조할 것을 강요했으나,
선생은 이를 끝내 거절하고 절의(節義)를 지켰다.
이에 운남성(雲南省)으로 귀양을 가게 되는데,
이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귀국할 때 목화씨를 숨겨 와
장인(丈人)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재배하여 후세(後世)
의류면(衣類面)에 큰 혁신(革新)을 가져오는 공을 세웠다.

전의주부(典儀主簿),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고

강성군(江城君)에 추봉(追封)되었으며,

세조(世祖) 때에는 사당(祠堂)이 세워졌다.

호(諡號)는 충선(忠宣)이다.

묘소(墓所)는 방형분(方形墳)으로 상석(床石)과 비(碑), 문인석(文人石),

망주석(望柱石), 석등(石燈)이 갖추어져 보존(保存)되고 있다.



















































5시간 15분 만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는데,

석불사지와 그 부근에서 사진을 찍느라 꽤 지체하는 바람에,

생각했던 것보다 좀 더 많은 시간이 걸린 것 같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었을까?

꼭 1달 만에 다시 찾은 이명산,

언제 또다시 가게 될 알 수 없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갈 수 있는 데가 아니던가?

차에 오른다.

그리곤 떠난다.

진양호 노을빛이 참 고운 내 사는 진주로(1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