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무동에서 칠선계곡과 연계한 제석봉골
* 날 짜 : 2019년 7월 7일(일요일)
* 날 씨 : 구름 많음
* 산 행 지 : 백무동 - 칠선폭포 - 대륙폭포 - 제석봉골 - 소지봉 - 백무동
* 산행시간 : 9시간 50분(운행시간 6시간 25분 + 휴식시간 3시간 25분)
* 산행속도 : 보통 걸음
* 산행인원 : 7명(갑짱, 고암, 행정거사, 네츄럴, 큰골, 구름, 선함)
* 산행일정
08:00 백무동(500m)
08:18 - 08:32 창암능선 갈림길
08:57 - 09:32 창암능선 사거리(950m)
10:13 - 10:20 칠선폭포(870m)
10:29 - 10:39 대륙폭포(920m)
10:46 염주폭포(915m)
10:51 - 11:02 염주폭포 위 너럭바위
11:40 - 11:50 홈실폭포(다이아몬드폭포, 제석폭포, 1135m)
12:00 - 13:06 비박터
13:34 - 13:37 제석봉골 좌우골 합수지점(1280m)
14:04 - 14:11 휴식
15:05 - 15:10 제석봉 무덤(1720m)
15:13 - 15:33 얼굴바위(코끼리바위, 1690m)
15:52 망바위(1460m)
16:14 - 16:19 소지봉(1312m)
16:22 창암능선 갈림길
16:32 창암능선 오거리
16:47 1100m봉 삼거리
17:57 - 17:09 상백무능선 안부
17:33 산(山) 표지석 무덤
17:50 백무동탐방지원센터
함양군 마천면 강청리 백무동 다샘펜션 부근 이정표,
백무동야영장 0.4km · 두지동 2.7km를 가리키는데,
그동안 벼르고 벼르던 제석봉골,
그 제석봉골을 창암능선 및 칠선계곡과 연계하여 탐방하기로,
지리산의 수많은 골짝 가운데서도 꽤 큰 편이건만,
웬일인지 나랑은 인연이 닿질 않아 미답지로 남아 있는 미지의 세계,
가슴속에 묻어 둔 해묵은 숙제를 지난주에 해결하기로 날까지 잡았으나,
그 전날 늦게까지 장대같이 쏟아진 장맛비로 말미암아,
결국은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질 줄이야?
꿩 대신 닭이라고,
덕분에 우번암과 종석대 그리고 문수암과 노고단은 잘 다녀왔다만,
아쉬운 마음은 좀체 가라앉지 않은 채 또 1주일을 기다렸으니,
복수혈전(復讐血戰),
아니면 패자부활전(敗者復活戰)이라고나?(08:00)
지리산공비토벌루트안내도,
지리산은 민족의 기상과 혼, 정서
그리고 애환이 깃들여 우리와 함께 숨쉬어 왔습니다.
이러한 민족의 영산 지리산은 한때 우리의 역사에 있어
가장 처참하고 비극적인 빨치산사건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빨치산사건의 배경은 8.15해방 이후
공산주의 세력이 일으킨 여순반란사건(1948년)부터 시작되는데,
반란자들이 국군의 토벌작전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러나 잔여병력 약 200여명이 지리산으로 입산하여
인근 좌익세력과 함께 지리산유격대(빨치산부대)를 결성하였습니다.
이들이 빨치산으로 활동하면서 6.25한국전쟁 시 후방교란을 목적으로
경찰관서와 군부대를 습격하고 민가에 피해를 주는 등 그 폐해가 심하였으며,
휴전협정 이후 지리산에서는 1953년 8월 병단장인
이현상이 사살된 이후까지도 수년 간의 격전이 벌어졌습니다.
빨치산과 토벌대의 전투로 인하여 피로 물들었던 민족비극이 서려있는 곳 지리산.
빨치산루트에는 당시의 인민군총사령부, 야전병원, 이은조 사살지(선녀굴)을
비롯하여 빨치산들이 은신하던 비트가 아직도 남아 있으며,
벽송사, 영원사 등 유서 깊은 역사자원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기억에서조차 사라져가는 빨치산사건의 비극을
천혜의 자연환경, 역사문화자원과 함께 체험해 보시기 바랍니다.(자료사진)
인민군 총사령부가 있었던 고점동마을 옛터
고점동(古店洞),
가락국의 무기를 생산한 곳으로
가락국 이후에는 농기구 등을 제작, 판매하였던 곳으로
약 40여 가구가 정부의 소개령으로 이주할 때까지 거주하였던 마을 터임.(자료사진)
인민군 총사령부,
8.15해방 이후 공산주의 세력이 여순반란사건(1948년)을 일으켰으나,
국군의 토벌작전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러나 잔여병력 약 200여 명이 지리산으로 입산하여
인근 좌익세력들과 함께 제2병단 지리산유격대(빨치산부대)를 결성하였다.
이들 빨치산은 6.25 한국전쟁 시 후방 교란을 목적으로 경찰관서와
군부대를 습격하고 민가에 피해를 주는 등 그 폐해가 심하였다.
휴전협정 이후 지리산에서는 1953년 8월 병단장인 이현상이 사살된 이후까지
수 년 간에 걸쳐 토벌대와 빨치산 간의 격전이 벌어졌으며,
이로 인해 민족의 영산 지리산이 피로 물들었던 민족비극의 사건이 있었다.
이곳 빨치산 총사령부 터는 산중턱에 위치하면서도 자연적인 요새를 형성하고,
인근의 4개의 봉우리에서 사방을 관찰하기 좋은 천혜의 아지트입니다.
현재까지도 빨치산들이 거주하던 막사의 터가 40여 개나 발견되어
당시 총사령부가 매우 큰 규모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자료사진)
인민군 총사령부 터,
1948년 여순반란 병력과 좌익세력이 제2병단 지리산유격대를 결성하여,
6.25 한국전쟁 그리고 정전협정 이후 1953년 8월 병단장 이현상이 사살된 이후까지,
수 년 간에 걸쳐 토벌대와 빨치산과의 전투 시 빨치산 총사령부를 설치하여 작전을 지휘함.
이곳은 산중턱에 위치하면서도 자연적인 요새를 형성하고,
인근 4개의 봉우리에서 사방을 관찰하기 좋은 천혜의 아지트로,
현재까지도 빨치산들이 거주하던 막사의 터가 40여 개나 발견되어,
당시 총사령부가 매우 큰 규모였음을 알 수 있음.(자료사진)
지리 32 - 01지점,
백무동 0.5km·두지동 2.2km를 가리키던 거고(08:16, 626m)
지리 32 - 01지점에서 2분 가까이 갔을까,
기도터 갈림길을 지나자마자 두지터로 이어지는 정규 탐방로에서 벗어나,
금줄을 넘자 제1차 거시기타임을 갖는다면서 주저앉아 버리는데,
아직은 때가 아니므로 창암능선까지 올라가자고 해도 막무가내요,
잠도 안 자고 마나님이랑 밤새껏 퍼마셨다는 분,
그 후유증으로 지금도 제정신은 별로 없고 골골하는데,
급기야 혼자만 창암능선 사거리로 올라서지 못하고 엉뚱한 데로,
이건 지리산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08:18 - 08:32)
창암능선 사거리,
꽤나 가파른 길을 따라 한바탕 땀을 쏟고서야 올라서서,
숨을 고르면서 막간을 이용하여 멀지 않은 전망대도 갔다 오지만,
아까 그리가 아니라며 엉뚱한 데로 빠진 둘이 보이지 않는 걸,
그나마 맨정신인 사람은 잘못된 걸 깨닫고선 되돌아 왔다는데,
산죽 속으로 사라진 길을 개척(?)하는 제정신 아닌 사람이 걱정,
한참을 기다리자 아래가 아닌 저 위에서 인기척이 나는데,
아직도 밖으로 나간 정신이 온전하게 돌아오진 않은 듯,
그전엔 백무동 2km · 벽송사 4km란 이정표가 있었으나 사라졌고(08:57 - 09:32, 950m)
자료사진
왜 이리 안 올라오나?
고정조사구 칠선계곡 - 1지점,
비선담과 칠선폭포를 잇는 정규 탐방로로 내려서고(10:07)
칠선계곡으로 흘러드는 소지봉골(10:09)
칠선폭포 삼거리,
무심코 등산로를 따라가면 칠선폭포를 지나칠 수도,
칠선계곡으로 내려서자마자 칠선폭포가 반기는 걸.(10:12)
칠선폭포,
칠선계곡의 얼굴마담 노릇을 한다고나,
지난 6월 16일에 이어 스무하루 만에 다시 찾은 셈인가?(10:13 - 10:20, 870m)
자료사진
자료사진
대륙폭포골과 칠선계곡 본류가 만나는 합수지점,
멀지 않은 대륙폭포부터 갔다 칠선계곡 본류로 올라가기로,
예까지 와서 대륙폭포를 모른 척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나?(10:26, 905m)
합수지점 삼거리,
추성동 5.5km·대륙폭포 50m·천왕봉 4.2km를 가리키고(자료사진)
대륙폭포,
칠선계곡에선 최고의 폭포요 볼거리로 손꼽히는데,
1963년 부산일보의 후원으로 부산대륙산악회가 칠선계곡을 최초로 답사하면서,
대륙폭포란 이름을 붙인 게 지형도에도 등재되어 있다고 하며,
그다지 세차진 아니지만 그런대로 봐 줄만한 물줄기가 떨어지는데,
이만하면 제법 훌륭한 눈요깃거리가 아닌가?(10:29 - 10:39, 920m)
합수지점 삼거리,
이제 칠선계곡 본류를 따라 제석봉골 쪽으로 올라가고(10:41)
제석봉골과 만나는 합수지점의 칠선계곡 본류,
입구가 좁아서 칠선계곡과 제석봉골을 헷갈리는 이들도 있었다지만,
요즘 같이 좋은 세상에야 그럴 리가 있을까?(10:46, 905m)
제석봉골 수문장 노릇을 하는 염주폭포,
바위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마치 구슬을 꿰어 놓은 듯하여 붙은 이름이라나?
제석봉(帝釋峰)에서 발원하여 칠선계곡으로 흘러드는 제석봉골,
제석봉(1808m)은 천왕봉(1915.4m)과 중봉(1874.6m)에 이은 지리산 제3봉이니,
그만큼 골이 길고 깊으며 또 가파를 수밖에 없지 않을까?
물이 많을 땐 곧장 염주폭포로 치오르지 못하고,
칠선계곡 본류를 건너 우회하여 들어가야 하지만,
오늘따라 수량이 적당하여 아무도 빠지지 않고 치올라가는데,
나로선 처음이요 미지(未知)의 세계로 들어가는 셈인가?
염주폭포 위 너럭바위,
제2차 거시기타임을 갖고 가기로,
칠선폭포부턴 집 나간 정신이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그분(?),
그래 봤자 아직끼진 말짱하기야 하겠냐마는,
공범(?)이기도 한 마나님이 정성껏 싸준 김치김밥 몇 개를 넘기더란,
주님에 대한 내공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걸까?(10:51 - 11:02)
뒤태 전문가가 안 오니 뒤태까지도 내 몫인가?
함박꽃,
산목련이라고도 한다던가?
홈실폭포,
제석봉골에선 제일가는 폭포요 최고의 볼거리로,
폭포수의 물결이 마름모꼴 형상을 하고 있어 홈실폭포 또는 다이아몬드폭포,
또 제석봉골을 대표하는 폭포라 해서 제석폭포라 부르기도 한다는데,
협곡 사이로 가파르게 형성되어 직등을 한다는 건 도저히 무리인지라,
20m쯤 되돌아서서 우회하여 올라갈 수밖에 없는 걸로,
수량이 많으면 덮여 버릴 거고 또 적으면 감흥이 덜할 텐데,
마침맞은 물줄기가 빚어내는 그림은 지리산 산신령의 걸작품이요,
감탄이 절로 나오면서 신기하고 신비롭고 경이롭기까지 한데,
이 좋은 걸 왜 이제서야 보게 되는 건지,
누가 가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닌데,
나랑은 지지리도 인연이 아니었던 걸까?(11:40 - 11:50, 1135m)
관중
자그마한 폭포 위에 자리 잡은 비박터,
이미 때가 되었는지라 점심을 먹고 가기로 하는데,
지난해 6월 3일에도 지사모에서 점심을 먹은 곳이라던가?
그땐 열둘이었건만 오늘은 일곱이요,
열둘 중에서 셋(고암, 행정거사, 큰골)만 또다시 왔는 걸로,
나머지(?) 아홉은 이 좋은 데 안 오고 어디서 무얼 하는 걸까?
갖은 양념으로 우린 육수에다 도토리가루 반죽과 뱀사골 다슬기를 넣어 끓인 수제비,
이름은 들어 봤나?
현지인표 도토리다슬기수제비,
행정거사표 열무김치와 어우러져 그야말로 환상적이더란,
거기다 반주까지 곁들이면서 1시간이 넘도록 즐기는 오찬,
나랑은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제석봉골,
훌륭한 눈요기와 더불어 푸짐한 입요기까지,
눈과 입이 모두 호강한 하루해였다고나?(12:00 - 13:06)
이게 뭔가요?
통암반지대에 길게 이어지는 홈바위폭포,
지리산 골짝에는 수많은 홈바위폭포들이 있지만,
이만하면 어디다 견줘도 그다지 빠지진 않을 듯?
또다시 골을 가득 메우는 통암반지대,
바로 위는 제석봉골 좌골과 우골이 만나는 합수지점이고(13:33)
제석봉골 좌우골 합수지점,
망바위 부근으로 빠져나간다는 우골 아닌 좌골이 본류로,
우린 본류인 좌골을 따라 제석봉 부근으로 올라가기로 하는데,
50m 남짓 위 우골에서 수문장 노릇을 하는 무명폭포가 있다는 걸,
알고도 모른 척하고 어찌 그냥 갈 수야?(13:34 - 13:37, 1280m)
좌골
우골
좌골로 가다 잠깐 우골로 나들이,
오로지 수문장폭포 때문에
우골을 지키는 수문장폭포,
물맞이나 하면서 놀다 가면 참 좋으련만,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벌에 쏘인 듯 달아나고 없는 걸 어쩌랴?
좀 쉬었다 가세,
뭣이 그리 좋은가요?(14:04 - 14:11)
갈수록 거칠어지지만 원시미는 더해지고
계곡 탈출,
겨우 명맥만 유지한 채 서서히 사그라드는 골을 오른쪽으로 두고 올라가고(14:42)
삼거리,
왼쪽은 제석봉 정상부 쪽으로 보다 가깝게 붙는 길인 것 같은데,
우린 제석봉 정상은 포기한 채 무덤으로 탈출하고자 오른쪽으로(14:56)
2분 정도 갔을까,
나 홀로 왼쪽으로 치올라 제석봉 무덤으로 탈출하는데,
일행들은 좀 더 비스듬히 나아가 얼굴바위 부근으로 올라서는 듯,
어차피 제석봉 정상은 가지 않기로 했으니,
어디로 빠져나가든 그 무슨 상관이랴?
제석봉(帝釋峰, 1808m),
우리의 선조들은 천왕봉(天王峰)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이 봉우리의 이름을 천신(天神)을 상징하는 제석봉(帝釋峰)이라 지었으며,
그 자락에다 제석단(帝釋壇)을 만들어 천신에게 제를 올렸다는데,
지금도 제석단은 그 흔적이나마 찾아볼 수 있으며,
끊임없이 솟아나는 석간수(石間水)의 맛은 일품이라고나?(15:05 - 15:10, 1720m)
얼굴바위,
코끼리바위라고도 한다던가?
잠깐이나마 헤어졌던 일행들과 다시 만나 제4차 거시기타임,
무슨 화수분이라도 되는지 나오고 또 나오고 끝없이 나오는 보물단지,
배낭이 거덜나기엔 아직도 한참 멀었다나?(15:13 - 15:33, 1690m)
노루오줌
정규 탐방로(백무동 - 장터목)로 내려서고(15:38)
백무동코스 망바위,
천왕봉 3.2km·장터목대피소 1.5km·백무동 4.3km를 가리키고(15:52, 1460m)
소지봉,
장터목대피소 3.2km·백무동 2.6km를 가리키고(16:14 - 16:19, 1312m)
가지 말란 소지봉능선,
길도 시원찮고 가파른데다 키 큰 산죽이 골탕을 먹이는 등 고약하다는데,
오늘은 가라고 해도 안 갈 테지만
창암능선 갈림길,
정규 탐방로에서 벗어나 창암능선으로(16:22)
창암능선 오거리,
하동바위 - 창암능선 - 소지봉골(칠선폭포) - 제석봉골 갈림길이고(16:32)
참나무 결실량 측정 트랩
1100m봉 Y자 삼거리,
오른쪽은 창암능선을 쭉 이어가는 길이요,
아까 올라온 창암능선 사거리에서 백무동으로 내려가도 되지만,
상백무능선이라고도 부르는 왼쪽의 지능선을 따라 내려가고(16:47)
상백무능선 안부,
제5차 거시기타임을 가지면서 배낭털이를 하고 가기로,
마를 줄 모르고 나오던 화수분도 기어이 거덜이 나는 셈인가?(16:57 - 17:09)
산(山) 표지석이 있는 무덤,
여기에 앞서 950m봉 삼거리에서 중백무능선을 타고 가기로 했지만,
앞서간 이들이 무심코 그냥 지나치는 바람에 그만 놓쳐 버렸는데,
950m봉은 1100m봉 삼거리에서 15분 정도요,
950m봉에서 이 무덤까진 20분 정도 걸린다는 걸.(17:34)
백무동탐방지원센터와 하동바위를 잇는 정규 등산로로 내려서자,
첫 번째 나무다리 위 고사리밭이 바로 아래인데,
누군가가 <안녕하세요>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산꾼들끼리 의례히 하는 인사인지라 건성으로 대답하고선 고갤 돌리자,
낯익은 얼굴이 빙그레 미소 짓고 서 있는 걸,
그 귀한 금종(金鐘, golden bell)이 백무동 골짝에서 울릴 줄이야?
먼저 가버린 일행 대신 일행이 되어 같이 내려가는데,
혼자서 천왕봉에 갔다 오는 길이라나?(17:40)
백무동탐방지원센터 삼거리,
장터목대피소 5.8km·세석대피소 6.5km·가내소폭포 2.7km를 가리키는데,
백무동주차장까진 0.4km 남짓 된다던가?
백무동의 유래,
백무동은 옛날부터 <지리산의 지혜로운 기운을 받기 위해
백 명이 넘는 무당이 머물던 곳>이라고 하여 백무동(百巫洞)이라 하였습니다.
또한, '안개가 늘 자욱하게 끼어있는 곳' 이라고 하여 백무동(白霧洞)이라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무사(화랑)를 많이 배출한 곳'이라고 하여 백무동(白武洞)이라고 합니다.
이곳 백무동에서는 세석평전 꼭대기에서 시작된 10km의 '한신계곡'이 흐르고 있습니다.
명승 제72호로 지정될 만큼 아름다운 풍경을 뽐내는 한신계곡은
칠선계곡, 뱀사골계곡과 함께 지리산의 3대 계곡입니다.
백무동탐방지원센터,
금종의 차가 부근에 대기하고 있다기에 걸음을 멈추는데,
이제 백무동주차장까지 400m도 채 남지 않았지만,
차를 두고 모른 척하고 고집스레 걸어가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고나?
금요일부터 오늘까지 적게 걸은 것도 아닌데,
백무동에서 칠선계곡과 연계한 제석봉골,
해묵은 숙제 하날 시원스레 해결한 날,
홀가분한 마음과 함께 차에 오른다.
그리곤 떠난다.
진양호 노을빛이 참 고운 내 사는 진주로 가기에 앞서,
앞서 내려간 이들이 눈 빠지게 기다리는 백무동주차장으로(17: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