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남지개비리길
* 날 짜 : 2019년 4월 9일(화요일)
* 날 씨 : 구름 많고 흐림
* 산 행 지 : 낙동강 남지개비리길
* 산행시간 : 3시간 25분(운행시간 1시간 48분 + 휴식시간 1시간 37분)
* 산행속도 : 보통 걸음
* 산행인원 : 8명(박만길, 황의봉, 정봉근, 송문영, 한윤갑, 이영근, 이완희, 조광래)
* 산행일정
10:10 창나루주차장
10:19 - 10:34 창나루전망대
10:50 6남매 나무(삼형제 소나무)
10:55 - 10:58 마분산정상갈림길(1)
10:59 마분산(179.9m)
11:00 마분산정상갈림길(2)
11:01 목동의 이름 새긴 바위
11:03 전설의 마분송
11:05 마분산갈림길(상)
11:06 임도입구
11:13 개뚜골고개
11:17 - 11:20 영아지쉼터
11:23 - 11:46 영아지전망대
11:50 영아지목재계단
11:52 영아지주차장
11:57 개비리길입구
12:06 야생화쉼터
12:10 - 12:57 죽림쉼터
13:00 - 13:03 여양진씨 감나무 시집보내기(금천교)
13:12 마분산갈림길(하)
13:13 - 13:16 옹달샘쉼터
13:22 용산정수장쉼터
13:35 창나루주차장
이날 진주교정동우회 산악회 회원 8명은
진주교정동우회는 지난 2월까지 지리산 둘레길을
황의봉 고문은 <사람은 자연과 늘 함께하기 때문에,
창녕군 남지읍 용산리 낙동강변에 위치한 창나루주차장,
낙동강 건너엔 남강을 사이에 두고 함안군 대산면과 의령군 지정면이 마주보고,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남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이기도 한데,
진주교정동우산악회의 2019년 4월 산행지로 골라잡은 낙동강 남지개비리길,
창나루주차장에서 출발하여 마분산 - 개뚜골고개 - 영아지주차장을 거쳐,
낙동강을 끼고 다시 창나루주차장으로 돌아오는 6.4km에 이르는 길이라던가?
15시경부터 비가 올 거란 일기예보가 있긴 하지만,
그다지 서두르지 않더라도 그 안엔 충분히 마칠 수 있을 듯,
모레부터 남지체육공원 일원에서 제14회 창녕 낙동강유채축제가 열린다는데,
좀 일찍 끝나 시간이 된다면 미리 가 보는 것도 좋지 아니한가?
축제현장의 열기를 안주 삼아 하산주를 들이킬 수도 있을 거고,
슬그머니 다가오는가 싶더니 어느새 무르익은 봄,
황금백수들이 소풍을 나와 하루해를 즐기는 날이라고나,
행복은 집안이 아닌 집밖에 있다던가?(10:10)
낙동강 남지개비리길(6.4km),
용산마을에서 영아지마을 창나지나루까지 이르는
낙동강가에 있는 길로 벼량을 따라 자연적으로 조성된 길이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좁은 이 길은
수십 미터 절벽 위로 아슬아슬 이어가며,
낙동강이 그려주는 눈부신 풍광을 가슴에 수놓아 올 수 있는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걷는 시골 여행길이다.
또한 개비리길 주변은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장군과 의병들이
육지에서 첫 승리를 거둔 기음강전투의 역사적 현장이며,
한국전쟁의 낙동강 최후 방어선으로 남지철교(등록분화재 제145호)와
함께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남지개비리길의 유래,
남지 개비리길은 용산마을에서 영아지마을 창아지나루까지 이르는
낙동강가에 있는 길로 벼량을 따라 자연적으로 조성된 길이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좁은 이 길은
수십 미터 절벽 위로 아슬아슬 이어가며 낙동강이 그려주는
눈부신 풍광을 가슴에 수놓아 올 수 있는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걷는 시골 여행길이다.
또한 개비리길 주변은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장군과 의병들이
육지에서 첫 승리를 거둔 기음강전투의 역사적 현장이며,
한국전쟁의 낙동강 최후 방어선으로 남지철교(등록분화재 제145호)와
함께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개비리길 유래는 여러 이야기로 전해진다.
영아지마을에 사는 황 씨 할아버지의 개 누렁이가 11마리의 새끼를 낳았는데,
그 중에 한 마리가 유독 눈에 띄게 조그마한
조리쟁이(못나고 작아 볼품이 없다는 뜻의 지방 사투리)였다.
본시 개의 젖이 10개밖에 되지 않아 조리쟁이는 젖먹이 경쟁에서 항상 밀렸고,
황 씨 할아버지는 이를 가엾게 여겨 새끼들이 크자
10마리는 남지시장에 내다 팔았지만 조리쟁이는 집에 남겨 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등(山) 너머 시집간 황 씨 할아버지의 딸이
친정에 왔다 가면서 조리쟁이를 키우겠다며 시댁인 알개실로 데려갔다.
며칠 후 황 씨 할아버지의 딸은 깜짝 놀랐다.
친정의 누렁이가 조리쟁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누렁이가 젖을 주려고 등(山)을 넘어온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살펴보니 누렁이는 하루에 꼭 한 번씩
조리쟁이에게 젖을 먹이고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폭설이 내린 날에도 여전히 누렁이는 알개실마을에 나타났고,
마을 사람들은 누렁이가 어느 길로 왔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누렁이 뒤를 따라갔는데,
누렁이는 낙동강을 따라 있는 절벽면의 급경사로 인하여
눈이 쌓이지 못하고 강으로 떨어져 눈이 없는 곳을 따라다녔던 것을 확인하였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높은 산 고개를 넘는 수고로움을 피하고
개(누렁이)가 다닌 비리(절벽)로 다니게 되어
<개비리>라는 길 이름으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또 다른 유래로는 <개>는 강가를 말하며,
<비리>는 벼랑이란 뜻의 벼루에서 나온 말로서,
강가 절벽 위에 난 길의 뜻으로 벼랑을 따라 조성된 길을 의미한다.
창나루주차장,
마분산갈림길(하) 2.21km · 창나루전망대 0.36km · 마분산정상갈림길 1.69km를 가리키고
숨이 살짝 찰 무렵 첫 봉우리로 올라서자,
쉬었다 가라는지 나무벤치(bench) 2개가 놓여 있지만,
조금 더 가다 창나루전망대에서 쉬기로 하고(10:17)
마분산(馬墳山)과 창나리(倉津)마을,
남지개비리길을 따라가면 용산리 첫 마을인 창나리가 나오는데,
창이 있던 나루하는 뜻으로 한자로는 창진(倉津)이라 적는다.
이 마을의 뒷산은 창진산(倉津山) 또는 마분산(馬墳山)이라 불린다.
창나리마을의 유래는
신라 때 산 앞의 낙동강을 중심으로 하여 강 건너 백제와
국경을 이룸으로 이곳 마을에 군사가 주둔하면서 군사용 큰 창고가 있었다.
이로 인하여 마을 이름이 <창고가 있는 나루>라는 뜻으로
<창나리(倉津, 창진)마을>로 지금까지 불러지고 있으며,
산 이름도 <창진산, 倉津山>으로 바뀌었다가
임진왜란을 맞아 천강홍의장군 곽재우 의병장의 죽은 말의 무덤이 있는
산이라 하여 <말무덤산(馬墳山, 마분산)>으로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창나리마을 앞의 독산(獨山)에는 가야시대부터 가야진명소(伽倻津冥所)가 있었으며,
명소의 용단(龍壇)에는 조선시대 후반까지 조정에서 봄, 가을로 향촉과 재물을
영산 현감에게 보내어 국경을 지키다 순직한 병사의 명복을 빌거나
우순풍조(雨順風調)의 용왕제와 가뭄에 가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낙동강 용왕대제의 근원도 여기에 있다.
* 나리는 나루(津, 진)의 이 지방 사투리
* 독산 : 외따로 떨어져 있는 조그마한 산
* 우순풍조(雨順風調) : 바람 불고 비 오는 것이 때와 분량(分量)이 알맞음
창나루전망대,
남강과 낙동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가 보이는데,
막걸리와 간식으로 입요기를 하고 가기로,
기껏해야 6.4km인데 서둘 게 뭐 있다던가?(10:19 - 10:34)
곽재우 장군의 토성과 말무덤,
임진왜란(1592년) 때에 천강홍의장군 곽재우 의병장은
의병을 일으켜 마분산(馬墳山)에 토성을 쌓아 낙동강을 따라
오르내리는 왜적을 맞아 신출귀몰하게 싸워 백전백승하였다.
이 토성은 작은 규모이나 정상에 공간을 두어 강에서는 보이지 않게 설계되었으며,
산을 힘들게 올라온 적과의 육탄전에서 승리할 수 있게 정상 안쪽에 흙으로 성을 쌓았는데,
430여 년의 풍상에 토성(土城)은 허물어져 겨우 흔적만 남겨두고 있다.
곽재우 의병장은 왜장 하시바가 강변에서 공격을 준비하는 것을 보고
모든 것이 열세인 의병이 전면 전투로는 승산이 없음을 직감하고
자신의 말에 벌통을 매달아 적진으로 돌격하게 하여 벌떼의 공격을
받은 적군의 혼란을 틈타 기습공격으로 큰 힘을 들이지 안고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적탄에 맞아 자신의 말이 사살되자,
그 공을 높이는 뜻으로 토성 안의 의병의 무덤 뒤에 말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그로 인하여 이 산 이름이 <창진산, 倉津山>에서
<말 무덤 산(馬墳山, 마분산)으로 고쳐 부르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무덤의 둘레가 25m, 높이가 5m로 기록과 그 흔적이 남아 있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세월의 풍파와 도굴꾼에 의해 파해처져 지금은 그 자취를 찾기가 어렵다 .
두물머리
오르내림이 크지 않은 비교적 수월한 소나무 숲길이 이어지고
6남매 나무,
2016년 4월경엔가 처음으로 발견되었으며,
공모를 통하여 6자매 나무란 이름표를 달았지만,
개비리길을 가던 이가 보고 바로 곁에 3형제 소나무가 있는데,
소나무를 남성으로 봤다면 산벚나무는 여성으로 보는 게 좋을 거라는 의견에 따라,
2016년 11월경 6자매 나무에서 6남매 나무로 바뀌었다 하고(10:50)
6남매 나무(六男妹樹, 육남매수),
다섯 주간(柱幹)의 소나무 중앙에 산벚꽃 씨가 떨어져 싹을 내어
소나무의 5개 주간 사이를 통하여 땅속 깊숙이 뿌리를 내려
소나무와 함께 자라고 있기에 6남매 나무라 이름 붙였다.
산벚나무는 4월 초순에 연분홍이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향기는 없으며,
<버찌>라는 열매를 맺는데 5 - 6월에 검은빛으로 익으며,
먹기도 한다.
마분산에는 산벚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다.
6남매 나무 부근엔 삼형제 소나무도 있고
마분산정상갈림길(1),
창나루주차장 1.57km · 영아지주차장 1.7km · 영아지전망대 1.48km를 가리키고(10:55 - 10:58)
의병 무덤(義兵墓, 의병묘),
말무덤산 정상인 이곳에는 임진왜란(1592년)과 정유재란(1597년)을 맞아
곽재우 의병장과 함께 왜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이름 없는 의병들이 합장되어 있는 거대한 무덤이다.
<무덤의 둘레가 20m, 높이 5m로 내부에는 석실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기단부는 돌을 쌓아 둘렀다.
커다란 봉분을 지어 자손만대에 그들의 용맹을 기리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정신을 전하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고 기록에 전한다.
420여 년이 지나는 동안 도굴꾼에 의해 도굴되고,
전면에는 개인 무덤이 조성되어 크게 훼손되어
현재의 형태로 남아 있다.
마분산정상갈림길에서 1분쯤 올랐을까,
개인 무덤이 자리 잡은 마분산 정상이건만,
날 제외한 다른 일행들 모두가 마분산 정상을 우회하고 마는데,
마분산정상갈림길 이정표에서 마분산의 뱡향 표시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듯,
나도 혹시나 하고 올랐는데 역시나였다고나?
의병 무덤과 말 무덤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 흔적조차도 찾아보기 어려운 걸.(10:59, 179.9m)
마분산정상갈림길(2),
창나루주차장 1.89km · 창나루전망대 1.02km · 마분산갈림길(상) 1.3km를 가리키고(11:00)
목동(牧童)의 이름 새긴 돌,
흙속에 묻혀 얼굴만 내민 자연석 바위에 지금도 선명하게
<정규환, 황준순, 정호성> <진종규> <황선도, 신전, 나무심어 사태막자, 黃東淳>
<安在奎 1965.7.17. 정양호> <1970.8.2 오상태> 등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그 당시 민둥산이었던 마분산에 소를 방목하면서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6.25전쟁의 상흔인 포탄 파편과
철갑탄 탄두를 이곳 주변에서 주워 글자를 돌에 새겼다고 한다.
<나무심어 사태막자>는 글은 민둥산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숱한 목동들의 소망을 실은 낙동강 빈창나루에 달빛 푸르게 흐른다.
6.25전쟁 이후 미군의 유해 수습으로 불발탄과 파편 등을
수차례 수거해서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치산녹화(治山綠化)로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변했으나,
치열했던 전장과 민둥산을 입증하고 있다.(11:01)
삼거리봉,
영아지쉼터 1km · 창나루주차장 1.4km · 도초산 1.7km를 가리키고
전설의 마분송(11:03)
전설의 마분송(馬墳松),
마분산 주변에는 주간(柱幹)이 여러 개로
분주(分柱)하여 자라는 소나무를 쉽게 볼 수 있는데,
마분산에 자생하는 다간(多幹) 소나무를 마분송(馬墳松)이라 한다.
임진왜란(1592년) 당시 곽재우 의병장이 마분산의 나무에 의병의 옷을 입혀
허수아비로 만들어 의병의 숫자가 많은 것처럼 위장하는 전술로 왜적을 물리쳤듯이,
마분산 정상에 있는 거대한 의병의 무덤 주위의 소나무들도 임진왜란을 맞아
우리강산 우리민족을 지키기 위하여 목슴을 바친 이름 없는 의병들의 무덤을 수호하고자
주간(柱幹)을 여러 개로 분주(分柱)하여 우거진 숲으로 위풍을 당당히 하여
함부로 침입자가 범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마분산갈림길(상),
마분산정상갈림길 0.3km · 임도입구 0.08km를 가리키고(11:05)
임도입구,
개뚜골고개까지는 임도 또는 산길로 가도 되는데,
우린 보다 지루한 포장임도 아닌 산길을 따라가기로,
마분산갈림길(상) 0.08km · 영아지마을 1.05km · 영아지쉼터 0.77km를 가리키고(11:06)
개뚜골고개,
우슬봉 갈림길이기도 한데,
왕복 2km란 우슬봉은 생략하고 영아지쉼터로 내려가기로,
창나루 2km · 우슬봉 1km · 영아지쉼터 0.3km · 도초산 2.5km를 가리키고(11:13)
국토청결운동
영아지쉼터,
4대강 국토종주 낙동강 자전거길 임도와 헤어져 영아지전망대로 이어지는 산길로,
영아지마을 0.89km · 영아지전망대 0.21km · 영아지앞산 0.3km ·
임도입구 0.77km 를 가리키고(11:17 - 11:20)
영아지전망대,
낙동강이 살짝 들어오기도 하는데,
맥주와 간식으로 입요기를 하면서 쉬었다 가기로,
일기예보는 15시경부터 비가 올 거라고 하지만,
지금으로 봐선 긴가민가일 듯?(11:23 - 11:46)
낙동강전투 최후의 방어선,
마분산(馬墳山)과 남지 개비리길 일대는 한국전쟁 당시 최후 방어선으로
남지철교와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곳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전쟁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당하고 2개월도 못 되어 낙동강 북쪽이 모두 점령당하여
정부는 서울에서 대전 그리고 대구로 다시 부산으로 옮겨
국운이 백척간두(百尺竿頭)의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위급한 상황이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구축하여
창녕과 남지지역 방어를 맡은 제24사단은 낙동강 박진나루를 중심으로 적과 대치하였다.
당시 북한의 최정예부대인 제4사단은 8월 15일까지 <부산 점령>이라는
시한부 임무수행 목표를 세우고 남지 박진 – 영산 – 밀양을 거쳐
부산으로 가는 직선 최단거리 통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합천에 집결하였고,
8월 6일 야간을 틈타 박진나루를 도강하여 은밀히 기습 침투함으로써
강변을 방어하고 있던 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8월 11일에는 영산면까지도 침공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미군은 9월 15일까지 일진일퇴의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여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고 끝까지 진지를 사수하였다.
낙동강 남지전투로 9월 8일에는 남지철교(등록문화재 제145호) 중앙부가 폭파되었으며,
치열한 전투로 낙동강 물이 핏빛으로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
이 전투의 승리로 전세가 역전되어 아군이 낙동강을 건너 반격하게 되었으며,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함께 압록강까지
진격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전사에 길이 빛날 격전지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남지 박진에는
<박진전쟁기념관>과 <박진지구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영아지목재계단,
영아지전망대 0.12km · 영아지쉼터 0.43km · 영아지주차장 0.32km 를 가리키는데,
영아지쉼터만 맞을 뿐 전망대와 주차장은 엉터리인 듯,
영아지전망대는 0.22km요 영아지주차장은 0.1km가 맞지 않을는지?(11:50)
영아지주차장,
개비리길입구 0.12km · 영아지전망대 0.22km · 영아지쉼터 0.43km를 가리키는데,
영아지전망대는 0.32km요 영아지쉼터는 0.53km가 맞을 듯,
영아재목재계단과 영아지주차장의 이정표가 뒤섞여 혼란을 주는 듯?(11:52)
영아지나루터
개비리길입구,
영아지주차장 0.12km · 마분산갈림길(하) 1.51km · 영아지전망대 0.34km를 가리키고(11:57)
야생화쉼터(12:06)
죽림쉼터,
부근에 여양진씨 재실인 회락재가 있었던 곳으로,
울창한 대나무숲과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물이 볼거리를 선사하는데,
이제 그만 죽림쉼터에서 점심을 먹고 가기로,
이만큼 분위기 있는 데가 또 어디 있다던가?((12:10 - 12:57)
영험 있는 팽나무 연리목
영험(靈驗) 있는 팽나무 연리목(連理木),
팽나무는 땅속에서부터 두 그루가 마치 한 그루의 나무처럼
부둥켜 안고 삼밭의 쑥대처럼 하늘을 덮고 있는 모양이다.
현재 대숲 사이에서 그 옛날 여양진씨 <회락재, 匯洛齋>의
왕성한 기운을 간직하면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재천원작비익조(在天願作比翼鳥) 재지원위연리지(在地願爲連理枝)
<하늘에선 날개 붙은 두 마리 새가 되고,
땅에서는 가지 붙은 두 그루 나무가 되기를 소원(所願)하는>
* 당 현종황제(唐 玄宗皇帝)와 양귀비(楊貴妃)의 사랑을
노래한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長恨歌)에 나오는 구절 *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 같은 거목(巨木)이다.
연리목(連理木)은 척박한 암반 위에 자라다 보니
왜소하나 오래된 나무로 수령이 100년의 나이테를 만들었다.
낙동강을 따라 걷는 개비리길이 유일의 통행로였던 그때부터 구전설화에
팽나무 연리목에 갈절하게 기도하면 남녀 간의 사랑이 이루어지고,
금슬(琴瑟) 좋은 부부가 지극정성으로 자손(子孫)을 기원(祈願)하면 자손을 얻고,
재물(財物)을 기원(祈願)하면 부자(富者)가 되고,
환중(患中) 부모님의 무병장수(無病長壽)를 정성껏 간절히 바라면
소원을 이루어 효자상을 받은 영험 나무로 전해져 온다.
사람들의 간절한 소원 하나는 꼭 이루어 주는
아주 신령스러운 나무로 전해져서
먼 곳에서도 찾아오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으나,
오랜 세월의 풍상과 함께 인적이 끊어진 지 먼 옛날이다.
회락재 유허지
회락재 유허지(匯洛齋 遺墟址),
이곳은 회락재(匯洛齋) 재실(齋室)이 있었던 곳이다.
회락(匯洛)은 낙동강물이 돌아서 모였다가 흘러가는 곳이라는 의미로,
게실형(憩室形)에서 유래하였다고 추정된다.
회락재(匯洛齋)는 목조 단층 와가(瓦家)로
여양진씨(驪陽陣氏) 묘사(墓祀)를 지내는 재실(齋室)이다.
건축년도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100여 년 전으로 추정되고,
회락재로부터 10m 거리에 초가 한 채가 있었는데
바람과 서리에 무너졌는지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회락재(匯洛齋) 서편에 관리인이 거주하는 정면 3칸 · 측면 1칸
외줄 지붕의 살림집은 방과 주방 그리고 창고가 허물어지고,
뒤쪽 산자락에는 대나무가 무성하여
치성(致誠)을 드리는 팽나무 한 그루와
앞뜰 위토답(位土畓)의 토지가 대나무숲으로 변해버렸다.
이곳은 개비리길을 오가는 길손들의 주막처럼 쉬어 가는 곳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신작로(新作路)가 생겨나면서 개비리길에는 인적이 끊어지고,
회락재(匯洛齋) 관리인도 떠나면서 긴 세월 동안 자연 속에서 몽환을 품었다.
건물은 대숲의 중심부가 되어 햇볕이 들지 않는 그늘과 길은 습기로 황폐하게 되었으며,
관리인이 거주한 행랑채는 지붕이 무너지고 방과 부엌이 겨우 형태를 가늠할 정도였으며,
창고에는 농기구가 흩어져 부식되어 있었다.
그 후 2015년도 4대강 사업으로 <낙동강 남지개비리길>이 알려지면서
재실은 귀곡산장(鬼哭山莊)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고,
흐린 날에는 댓잎의 서걱거리는 소리가
대장부들도 간담을 서늘하게 하여 쉽게 접근하기 어려웠다.
2015년도 낙동강 남지개비리길 조성 시
풍상에 毁損(훼손)된 회락재(匯洛齋)는 복구가 어렵게 되자 건물을 철거하고,
대나무로 이루어진 숲을 자연 친화적으로 정비하여
지금의 <죽림쉼터>로 새롭게 조성되었다.
동천교
동천교(洞天橋),
이름의 유래는 하늘 동네, 신성한 곳,
신선이 사는 곳의 의미를 가진 이곳 회락동천(匯洛洞天),
낙동강 강가에 강물이 급류를 이루면서
오랜 세월 속에 만들어 놓은 모래둔치에 잘 자란 대나무숲,
옛부터 죽림칠현(竹林七賢)과 같이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선비들이 모여 살았던 것처럼 의미를 부여하여 만든 동천교,
이미 금천교를 건너면서 사악한 마음을 버리고 오셨다면 하늘에 있는 동네
즉, 신선과 선녀가 사는 신성한 이곳으로 접어드는 동천교 다리입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국토청결운동에 앞장서고
여양진씨 감나무 시집보내기와 금천교(13:00 - 13:03)
여양진씨 감나무 시집보내기,
우리 민족의 고유명절 세시풍속의 하나인 단옷날
양기가 왕성한 시기에 흉년을 대비하여 이루어졌던 것으로,
조상들이 흉년을 지혜롭게 극복한 방법이다.
단옷날에 대추나무와 감나무(蟲媒花, 충매화)는 암꽃만 피기 때문에
나뭇가지 사이에 돌을 끼워 넣어 주는(껍질을 벗기거나 철삿줄로 감아 주는 것)
감나무 시집보내기를 하면,
감나무가 위기의식을 느껴서 생존본능에 열매를 많이
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 조상님들이 지혜를 들여다볼 수 있다.
이곳 여양진씨 집 앞뜰에 심어져 있는 나무는 70여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 그 자리를 지키며 지금까지
<감나무 시집보내기>를 한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금천교(禁川橋),
이름의 유래는 조선시대(朝鮮時代) 궁궐 창덕궁(昌德宮)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을 지나 인정전(仁政殿)으로 가는 길목의
명당수를 건너는 다리 이름에서 발췌하였음.
(나라에 일을 하는 신하는 공이 아닌 사사로운 마음으로
공무를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금천교를 건널 때,
흘러가는 하천에 모든 사심을 버리고 건너 오라는 뜻)
그와 같이 풍광이 아름다운 이곳,
신성한 창녕 낙동강 남지개비리길 대나무 숲속에 회락동천(匯洛洞天)으로
들어오는 모든 분들은 사악한 마음을 금천교에서 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들어오셔서 아름다운 풍광이 있는 이곳에서
신선과 선녀가 되듯 하시면, 좋을 것 같아 다리 이름을 금천교라 붙였습니다.
여항산이 보이고
마분산갈림길(하),
영아지주차장 1.53km · 창나루주차장 2.21km를 가리키고(13:12)
옹달샘쉼터(13:13 - 13:16)
옥관자(玉貫子) 바위(巖),
옥관자 바위는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하다가
2018년 6월 21일 남지읍 동포마을 박** 씨가 수로공사 중 발견하게 되었다.
중장비로 작업을 해도 바위가 움직이지 않아 박** 씨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몇 번을 시도한 뒤에야 바위 앞부분이 보이기 시작하여 조심스레 들어내어 보니,
마치 봉황(鳳凰)새의 알처럼 타원형 모양이었으며,
크기가 오척(五尺)이 넘었다.
바위는 복되고 길한 일이 일어날 징조가 보이고 영험한 기운의 느낌이 났다.
당시 주변을 살펴보니 옹달샘에는 서광이 비치면서 맑은 샘물이 솟아나고,
주변의 산세가 마치 용이 승천하는 것처럼
자욱한 운무(雲霧)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고 한다.
매일같이 정화수 한 그릇을 떠놓고 기도를 드렸던 <옥관자(玉貫子) 바위(巖)>와
자식을 등관(登官)시킨 <층층나무>를 옆에 모셔 두어
재령이씨(載寧李氏)댁 할머니(昌原黃氏, 창원황씨)의 뜻을 기리고자 한다.
관직(官職)에 등관(登官)시킨 층층나무,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두곡마을에 살았던 재령이씨(載寧李氏) 한 집안이
1929년경 교통이 발달하지 않아 수송이 원활하지 못할 때 낙동강 수로를 이용하여
배를 띄워 사람의 이동이 편리한 수변(현 옹달샘 주변)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이곳 사람들은 농사일을 하거나 물고기를 시장에 팔아 춘궁기(春窮期)를 면했지만,
강물 범람으로 재해가 발생하면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때마다 재령이씨(載寧李氏)댁 할머니(昌原黃氏, 창원황씨)께서
북풍한설(北風寒雪) 몰아치는 꼭두새벽에 매일같이 찬물에 목욕하고,
옥관자(玉貫子) 바위 앞에 맑은 정화수(井華水) 한 그릇을 떠놓고
가정의 무사안녕을 기원하였다.
기도(祈禱)하는 100일째 되는 날 천지신명께서도 그 모습이 가련했는지
날이 샐 무렵에 백발에 긴 수염을 한 산신령께서 강무(江霧)를 타고 불현듯
꿈에 나타나 한 그루 나무를 점지해 주시고 어디론가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꿈에서 깨어 그곳으로 가 보니 나무껍질에서 광택이 나는 한 그루 나무가 서 있었다.
할머니께서는 무릎을 내리치면서 <바로 이 나무다.> 하시면서,
그날부터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아 슬하에 둔 아들이 관직에 입문하게 되었고,
관재 구설 하나 없이 고을 원까지 올라 층층나무는 영험하기로 유명해졌다.
그 후 남지읍 곳곳에 심어져 자라고 있으며,
층층나무를 집에 심어 두면 관직과 직장에 있는 사람은
막힘이 없이 관직의 층계 층계를 거쳐서 오르게 된다는
층층나무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용산정수장쉼터(13:22)
홍의장군(紅衣將軍) 붉은 돌(石) 신발,
홍의장군(紅衣將軍) 망우당(忘憂堂) 곽공 휘 재우(郭公 諱 再祐, 1552년 - 1617년),
망우당 선생은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817번지 외가에서 출생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22일 만에 현고수(懸鼓樹, 수령 520년이 넘는 느티나무)에
북을 매달아 북을 치면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 이후 첫 승전보를 기음강(남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지점 - 남지읍 용산리 창나루)
전투에서 왜구를 물리쳤으며,
의령 · 창녕 · 합천 · 함안 · 달성 일원에서 연승을 거듭하게 되었다.
그래서 왜구들이 붉은색만 보면 두려워하여 도망갔다고 한다.
어느 날 망우당 선생께서 외가에 출타를 갔다가
왜구가 기음강변에 출몰했다는 통문에 급하게 기음강을 도강(渡江)하면서,
붉은색 한쪽 신발은 낙동강 물에 떠내려가고
한쪽 신발은 창녕군 남지읍 창나루 쪽 강변에 놓이게 되었다.
망우당 선생은 <이 붉은 신을 보관만 잘해도 왜구들이 침입하지 못할 것이다.> 하셨다.
하지만 창녕군 남지읍 창나루 주민들이 붉은 신을 잘 보관해 왔으나,
일제강점기 때 왜놈들에게 빼앗겨 낙동강에 던져지고 말았다.
그 후 창나루마을 주민들은 마분산 말 무덤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어느 날 마을이장 꿈에 홍의장군 망우당 선생께서 나타나
<잃어버리지 않을 붉은색 돌신을 줄 터이니
보존을 잘해서 더 이상 왜침이 없길 바란다.>고 하셨다.
망우당 선생께서 꿈에 말씀하신 곳을 가 보니
실제로 붉은색을 띤 신 모양의 돌이 기음강 주변 땅속에서 발견되어,
창나루 주민들이 감사의 고유제를 지내고 이 자리에 모시게 되었다.
3시간 25분 만에 다시 돌아온 창나루주차장,
6.4km에 이르는 낙동강 남지개비리길,
길지 않은 거리에 비해 볼거리가 많아 눈이 호강했다고나,
낙동강과 화왕지맥의 끄트머리 마분산이 엮어내는,
무슨 사연이랑 전설은 또 그렇게나 서리서리 서려 있는지,
놀멍쉬멍 쉬엄쉬엄 나아가면서 여유롭게 즐길 수밖에 없었는지도,
차에 오른다.
그리곤 떠난다.
진양호 노을빛이 참 고운 내 사는 진주로 가기에 앞서,
제14회 창녕 낙동강유채축제(4.11 - 4.14)가 열릴 남지체육공원으로,
미리 가 보는 축제의 현장이라고나?(1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