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매산기적길로 오르내린 모산재
* 날 짜 : 2018년 3월 6일(화요일)
* 날 씨 : 맑음
* 산 행 지 : 모산재주차장 - 돛대바위 - 무지개터 - 모산재 - 국사당 - 영암사 - 모산재주차장
* 산행시간 : 3시간 15분(운행시간 2시간 07분 + 휴식시간 1시간 08분)
* 산행속도 : 보통 걸음
* 산행인원 : 1명(나 홀로)
* 산행일정
10:50 모산재주차장
11:01 - 11:05 영암사지 귀부
11:43 - 11:53 돛대바위
12:00 - 12:06 무지개터
12:14 - 12:20 모산재(767m)
12:50 - 13:00 순결바위
13:13 - 13:17 국사당
13:24 간이매점 삼거리
13:27 - 13:55 영암사(영암사지)
14:05 모산재주차장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 모산재주차장,
황매산기적길을 따라 모산재 정상을 찍고 돌아오기로,
길지 않은 산행만이 목적이 아니라 이교약수터로 물 받으러 가는 김에,
그러고 보니 모산재 일대를 둘러본 지도 꽤 된 듯,
산천은 의구하다 했거늘 별스레 변한 거야 있겠냐마는,
심심풀이 삼아 쉬엄쉬엄 눈요기나 하러 간다고나 할까?(10:50)
지방도 1089호선 황매산로에서 벗어나 모산재와 영암사지로,
모산재 1.7km · 영암사지 0.6km · 모산재주차장 0.1km를 가리키고(10:53)
영암사지는 내려올 때의 몫으로 돌리고,
돛대바위와 무지개터로 해서 모산재로 올라가기로,
모산재 1.3km · 영암사지 0.2km · 모산재주차장 0.5km를 가리키고(10:59)
등산로와 가까운 영암사지 귀부는 올라갈 때 둘러보고 가기로,
영암사지와 마찬가지로 내려올 때의 몫으로 돌려도 되지만(11:01 - 11:05)
영암사지 귀부(靈巖寺址 龜趺, 보물 제489호),
금당(金堂)터의 동서에 위치한 두 개의 비석은
비와 머리장식이 없어졌다.
동쪽 거북모양의 비석받침(귀부, 龜趺)은
용머리에 목을 곧바로 세운 힘찬 모습이다.
겹줄로 귀갑문(龜甲文)이 새겨진 등은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강인함과 율동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서쪽 거북모양의 비석받침(귀부, 龜趺)은 크기도 작고,
움츠린 목에 등도 평평한 편이다.
두 개의 비석 모두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나,
이러한 차이에서 동쪽의 비석받침이
다소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모산재 1.1km · 모산재주차장 0.7km를 가리키고(11:09)
허굴산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황매산정상 4.9km · 모산재 0.8km · 영암사지 0.7km를 가리키고(11:20)
모산재 0.6km · 모산재주차장 1.2km를 가리키고(11:27)
영암사
바위지대 위로 모산재 정상이 살짝 보이고
돛대바위,
모산재 0.4km · 모산재주차장 1.4km를 가리키고(11:43 - 11:53)
돛대바위,
황매산 자락의 하나로 억센 사내의 힘줄 같은 암봉으로 이뤄진 산이다.
풍수학자들은 시야와 생기의 흐름이 동쪽방향으로 행하고
동쪽에 기가 솟구치는 형상의 자연석이 소재한 이곳이
전국 최고의 생기의 장이라고 했다.
이 돛대바위는 오랜 세월에도 변치 않은 웅장함으로
황매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당겨본 모산재 정상부
무지개터,
황매산정상 4.4km · 모산재 0.3km · 영암사지 1.2km를 가리키는데,
그전의 이정표와 황매산기적길 이정표가 조금은 차이가 나는 듯하고(12:00 - 12:06)
무지개터와 마주보는 감암산
무지개터,
한국 제일의 명당자리로 알려져 있는 곳으로,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무지개터 앞에 용마바위가 있어
<비룡승천, 飛龍昇天>하는 지형으로, 예부터 이곳에 묘를 쓰면
천자가 태어나고 자손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리는 반면에,
온 나라가 가뭄으로 흉작이 든다 하여 명당자리일지라도
누구도 묘를 쓰지 못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황매산 모산재(767m)는 가야산에서 비롯된 산줄기가
거침없이 뻗으면서 그 기백이 모인 곳이라 한다.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지치지 않고
오히려 기운이 차오르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천하 명당자리라는 무지개터, 순결바위, 국사당,
영암사지 등 명소가 있어 모산재를 오르는 즐거움을 더한다.
창원에 사는 강명규 씨(68)의 작품인 듯?
황매산성(黃梅山城)터,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활동(義兵活動) 근거지로서
이곳에 성(城)을 쌓아 왜병과 싸운 격전지(激戰地)로 알려져 있으며,
외적(外敵)의 침략에 항거하여 호국(護國)의 일념(一念)으로 피흘리며 싸웠던 곳임.
지금도 주변에는 이곳에서 싸우다 순국(殉國)한 이들의 이름 없는 무덤들이 널려 있음.
황매산 정상부엔 상고대가 핀 듯?
모산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바위덩어리로 보이며,
각양각색의 바위와 그 바위틈에서 살아가는 소나무의 모습은,
자연스레 한 폭의 한국화가 떠오르지 않을 수가?
부암산, 감암산 등과 함께 황매산 자락의 하나라고나?(12:14 - 12:20, 767m)
모산재,
높이는 767m로 황매산군립공원 내에 자리 잡고 있으며,
합천팔경 가운데 제8경에 속한다.
주민들은 잣골덤이라고도 부르며,
'신령스런 바위산'이란 뜻의 영암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바위산에 산이나 봉이 아닌 '높은 산의 고개'라는
뜻의 재라는 글자가 붙은 것이 특이한데,
모산재의 옆과 뒤에 여러 개의 고개가 있고
재와 재를 잇는 길 가운데에 산이 위치한 탓에
산보다는 재로 인식되는 것이라는 설도 있다.
지나온 돛대바위
순결바위,
남 · 여의 순결을 시험할 수 있다는 곳으로,
이 바위는 평소 사생활이 순결치 못한 사람은 들어갈 수가 없으며,
만약 들어간다 해도 바위가 오므라들어 나올 수 없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12:50 - 13:00)
법연사
국사당(國師堂),
태조 이성계의 등극을 위하여 천지신명에게 기도를 올렸다는 곳으로,
지방관찰사로 하여금 매년 제사토록 하였으나,
그 후 고을 현감, 관내 면장으로 이어져 왔으며
지금도 음력 3월 3일에는 인근 감안주민이 제사를 올려
나라와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고 있다.
간이매점 삼거리,
황매산정상 5.5km · 모산재 1.3km · 덕만주차장 0.7km를 가리키는데,
황매산기적길을 따라 덕만주차장과는 반대쪽인 영암사지로(13:24)
영암사와 영암사지 경내로 내려서서,
천천히 돌아다니면서 찬찬히 구경을 하고 가기로,
어차피 그러려고 이리로 오질 않았던가?(13:27 - 13:55)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석등(陜川 靈岩寺址 雙獅子石燈, 보물 제353호),
영암사터에 세워진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1933년경 일본인들이 마음대로 가져가려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막아
면사무소에 보관하였다가 1959년 원래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
석등은 일반적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하여,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얹었다.
사자를 배치한 가운데 받침돌을 제외한 각 부분이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기본 형태인 8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받침돌에는 연꽃이 조각되었고 그 위로 사자 두 마리가 가슴을 맞대고 서 있다.
사자의 뒷발은 아래받침돌을 딛고 있으며, 앞발은 들어서 윗받침돌을 받들었다.
머리는 위로 향하고 갈퀴와 꼬리, 근육 등이 사실적이다.
화사석은 4면에 창이 있고 다른 4면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조각되었다.
지붕돌은 8각으로 얇고 평평하며,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자그마한 꽃조각이 솟아 있다.
각 부분의 양식이나 조각으로 보아 통일신라 전성기에 비해 다소 형식화된 면을 보이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보은 법주사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과 견줄 수 있는 걸작이라 할 수 있다.
합천 영암사지 삼층석탑(陜川 靈岩寺址 三層石塔, 보물 제480호),
이 탑은 가운데 몸돌이 무너져 있던 것을 1969년에 복원하였으며,
1차 금당지(金堂地) 앞에 서 있다.
2층의 기단(基壇) 위에 세워진 3층석탑으로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다.
기단은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다.
탑신부(塔身部)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되어 있고,
몸돌에는 모서리에 기둥을 새겼다
1층 몸돌이 약간 높은 편이며 2, 3층은 크게 줄었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4단씩이고, 처마 밑이
수평이며 지붕의 경사가 완만한 곡선으로 흘러내려
네 귀퉁이에서 살짝 치켜 올라갔다.
탑의 머리장식 부분은 전부 없어졌으나,
3층 지붕돌의 윗면에 구슬과 화려한 장식을 꽂는 쇠막대를 끼우던 구멍이 있다.
위층 기단과 1층 몸돌이 약간 높은 느낌은 있으나,
전체의 균형을 잃지 않았으며 각 부재의 짜임새 또한 간결하다.
신라석탑의 양식을 잘 이어받고 있으나,
기둥 표현이 섬약하고 지붕돌 받침수가 줄어던 점으로 보아
건립시기는 9세기 경으로 짐작된다.
합천 영암사지(陜川 靈岩寺址, 사적 제131호),
영암사지는 경상남도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 황매산 남쪽 기슭에 있는
신라시대의 절터로 그 정확한 창건 연대가 알려져 있지 않으나,
고려 때인 1014년(고려 현종 5년)에 적연선사(寂然禪師)가
이곳에서 83세로 입적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세워졌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1984년 절터 일부의 발굴조사를 통해, 불
상을 모셨던 금당(金堂)과 서금당(西金堂), 회랑(回廊)과 부속된 건물터 등이 확인되었다.
원래의 절에는 탑, 석등, 금당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었고,
금당의 동서에 각각 하나의 비석이 있어, 금당이 세 차례에 걸쳐 개축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절터에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석등(陜川 靈岩寺址 雙獅子石燈, 보물 제353호),
합천 영암사지 삼층석탑(陜川 靈岩寺址 三層石塔, 보물 제480호)과 서금당지 좌우로
합천 영암사지 귀부(陜川 靈巖寺址 龜趺, 보물 제489호) 2기가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 말부터 고려시대까지 걸쳐 기둥 초석, 각종 기와와 함께
8세기 경의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이 출토되어, 이 절의 창건 연대를 짐작할 수 있다.
영암사는 건물터는 일반 사찰 건물과 다른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금당이 있는 상단 축대의 중앙 돌출부 좌우에 무지개 모양의 계단이 있는 점,
금당 기단 면석에 얼굴모양이 조각되었고 뒷면을 제외한 3면에 신비스런 동물모양을 돋을새김한 점,
서남쪽 건물터의 기단 좌우에 계단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러한 특징과 아울러 절터 내에 흩어져 있는 석조물은 이색적인 느낌마저 준다.
아까 올라간 그 자리,
이제 모산재 소형주차장으로(13:57)
3시간 15분 만에 다시 돌아온 모산재주차장,
황매산기적길이란 걸 따라 모산재 일대를 둘러본 셈인데,
언제 가도 눈이 즐겁고 호강하는 곳이 아니던가?
좋긴 참 좋더란,
차에 오른다.
그리곤 떠난다.
진양호 노을빛이 참 고운 내 사는 진주로 가기에 앞서 이교약수터로(1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