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교정동우회

제4차 지리산 둘레길(금계마을 - 방곡마을)

큰집사람 2018. 2. 10. 22:17


* 날      짜 : 2018년 2월 10일(토요일)

* 날      씨 : 흐림

* 산 행  지 : 금계마을 - 방곡마을  

* 산행거리 : 15.5km  

* 산행시간 : 6시간 47분((운행시간 4시간 36분 + 휴식시간 2시간 11분)

* 산행속도 : 보통 걸음

* 산행인원 : 9명(황의봉, 송문영, 정봉근, 한윤갑, 조호제, 이영근, 유달수, 이완희, 조광래)





* 산행일정

10:04             함양군 마천면 의탄리 금계마을

10:08             의평마을 쉼터

10:32             추성마을(칠선계곡) 갈림길

10:38             광점동 갈림길

10:52 - 11:07  서암정사  

11:21 - 11:33  벽송사

11:57 - 12:55  모전마을 - 송대마을 갈림길 안부(점심)

13:32 - 13:43  목교  

13:51             모전마을

13:53 - 13:57  용유담

13:59             모전마을

14:29 - 14:32  세동마을

14:36             문수사 갈림길  

14:56 - 15:06  송전교

15:28 - 15:43  운서마을 쉼터

15:49             운서마을

16:00             구시락재

16:14 - 16:17  동강마을

16:31             수석대(신틀바위)

16:51             산청군 금서면 방곡리 방곡마을(산청 · 함양사건추모공원)






                                   * 금계마을 – 0.7km - 의중마을 – 2.1km - 벽송사 – 2.8km -

                                       모전마을(용유담) – 2.3km - 세동마을 – 3.3km - 운서마을

                                       0.7km - 구시락재 – 0.8km - 동강마을 - 1.3km - 수석대 -

                                       1.5km - 방곡마을(15.5km)









금계마을,

국가지원지방도 60호선 천왕봉로가 지나는 곳으로,

4차 지리산 둘레길은 서암정사와 벽송사를 거쳐 동강마을로 가는 4구간에다,

동강마을에서 5구간에 들어 있는 방곡마을까지 이어가기로,

인월 20.5km · 동강 11.0km를 가리키지만,

서암정사와 벽송사를 경유하면 1.7km가 늘어난 동강 12.7km이고(10:04)

   

마천초등학교 의탄분교 자리에 들어선 지리산 둘레길 함양안내센터,

그 뒤엔 금대산이 우뚝 솟았고





























노듸목(金鷄),

경남 함양군 마천면 의탄리이다.

냇물을 건너다니는 징검다리 노듸의 목이라는 뜻에서 노듸목이라 했다.

고려시대 의탄소가 있었던 지역으로 추성리 칠선계곡 입구에 있다.

가락국의 구형왕(양왕)이 추성리 국골에 은거하면서 이곳에서 참나무 숯을 구웠다고 하며,

인근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왕산에 양왕의 능 돌무덤이 있다.

정감록에 나오는 금대산 밑에 금계동이고

이곳이 지리산 피난민이 하나 둘 모여서 이룬 마을이다.

서쪽에는 감투바위 동쪽에는 둥둥바위

북쪽에는 맹맹이바위 물방울골 새벌들 흥골 등이 있으며,

1520년에 벽송사를 창건한 벽송대사(송지엄)가 법계정심대사 곁을 떠나다가

되돌아와서 도를 받은 살바탕(벽송정)도 있다.

6.25 직후 공비소탕 시 추성, 의탄리 주민 200여호가 이 마을로 소개되기도 했다.


임천강을 가로지르는 의탄교,

임천강은 엄천강이라 부르기도 하는 듯


지리산제1교 뒤로 삼정산이 보이고









의평마을 쉼터,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가 자리 잡고 있으며,

정상적인 지리산 둘레길은 의평마을 쉼터에서 되돌아서야 하고(10:08)




평정말(義坪),

경남 함양군 의탄리이다.

고려시대 의탄소가 있었던 지역으로 추성리 칠선곅곡 입구에 있다.

가락국의 구형왕(양왕)이 추성리 국골에 은거하면서 이곳에서 참나무 숯을 구웠다고 하며,

인근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왕산에 양왕의 능 돌무덤이 있다.

옛날 하동에서 소금장수가 벽소령과 오도재를 넘어 함양에 왔다가

일용품을 사다가 마을 입구 느티나무 아래서 장을 보게 하였다 하여 새장터란 곳도 있고,

마을 앞에는 사장터(활터)도 있었다.

음력 정월 초삼일 풍년과 마을의 풍안을 비는 당산제(평화제)를 지내왔다.

조선 선조 때 함양 박씨와 수원 백씨 · 경주 정씨가 입촌했고,

정조 때 경주 이씨가, 현종 때 의령 여씨가 입촌 정착했다.     





의평1교 앞 갈림길,

용유교 및 서암정사와 벽송사로 이어지는 지리산 둘레길

새말· 의중마을 입구 · 증말을 가리키는 쪽으로 돌아서야 하지만,

보다 경치가 좋고 시야가 활짝 열리는 의탄천을 끼고 올라가기로,

 어디로 가든 서암정사에서 만나는 게 아니던가?


의평1교와 의평2교를 건너 칠선로를 따라가도 되지만,

옛길인 의탄천을 건너지 않는 의탄길로 


의평마을회관



신사김동진방천유공비(紳士金東珍防川有功碑)



의탄천,

세 골짝(광점골, 국골, 칠선계곡)의 물이 의탄천을 이루면서 임천강으로 흘러가고








칠선로와 의탄길이 만나는 칠선교,

의탄천에 걸친 칠선교가 셋인 셈인가?(10:20)


벽송사 · 서암정사 · 광점동으로,

오른쪽은 칠선계곡 · 국골 · 추성마을로 이어지고(10:32)


광점동 갈림길,

벽송사와 서암정사로 가야만 하고(10:38)








서암정사 - 벽송사 갈림길,

서암정사부터 들렀다 벽송사로 올라가기로,

어차피 그럴 수밖에 없지 아니한가?(10:49)


한국 선불교 최고의 종가 벽송사,

벽송사(碧松寺)는 조선 중종 시대인 1520년 벽송지엄(碧松智嚴)선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수행한 유서 깊은 절이다.

조선시대 불교의 선맥(禪脈)에서 보면 벽계정심, 벽송지엄, 부용영관, 경성일선, 청허휴정(서산),

부휴선수, 송운유정(사명), 청매인오, 환성지안, 호암체정, 회암정혜, 경암용윤, 서룡상민 등

기라성 같은 정통조사들이 벽송사에서 수행 교화하여 조선 선불교 최고의 종가를 이루었다.

아울러 선교를 겸수한 대종장들을 108분이나 배출하여

일명 백팔조사 행화도량”(百八祖師 行化道場)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벽송사는 지리산의 천봉만학(千峰萬壑)을 앞뒤 동산과 정원으로 하여

부용(芙蓉 : 연꽃)이 활짝 핀 것과 같은 부용만개(芙蓉滿開),

혹은 푸른 학이 알을 품고 있다는 뜻의 청학포란(靑鶴抱卵)의 형국에 자리하고 있다.

고인이 운거천상(雲居千上 : 구름 위 하늘 세계), 별유천지(別有千地 : 인간 세상 밖에 따로 있는),

부용정토(芙蓉淨土 : 연꽃이 활짝 핀 극락정토에),

조인만대 (祖印萬代 : 조사의 깨달음을 만대에 이어지리)”라는 말로 표현하였듯이

벽송사는 만고에 수려한 풍광 속에 위치하고 있다.

벽송사를 창건한 벽송선사는 태고보우, 벽계정심선사로부터 내려오는

심인(心印)을 전해 받아 조계정문(曹溪正門)의 정통조사가 되었다.

선사는 무자화두(無字話頭)에 의해 무명(無明)을 타파하고 선요(禪要)에 의해 지혜의 병을 떨쳐버렸으니, 간화선 수행법(看話正宗)에 의해 수행하고 깨달음을 얻은 조선의 첫 번째 조사가 된다.

그래서 벽송사는 간화선의 제일 조정(組)으로서의 역사를 간직한

 한국선불교의 근본도량'이 되는 것이다.

벽송대사의 뒤를 이어 벽송산문의 제2대 조사에 오른 분이 부영영관(芙蓉靈觀)선사이다

                  부용선사는 도가 높고 학문이 깊어 배우러 오는 승속제자가 문전성시를 이루었는데,

특히 영호남 일대에 부용선사의 가르침을 받은 선비가 수없이 많아

전단향나무를 옮겨 심으니 다른 나무들도 향기가 난다.라고 하는 말이 널리 유행하였다.

부용영관 문하에 수많은 제자가 배출되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분이 서산대사라 불리는 청허휴정(靑虛休靜)과 부휴선수(浮休善修)이다.

서산대사는 깨달음을 얻은 뒤 벽송산문의 제3대 조사가 되어 지리산 일대에서 행화하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팔도도총섭이 되어 승군을 일으켜

도탄에 빠진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데 전력을 다하게 된다.


한국선문의 거장 청허휴정(서산대사)이 벽송조정의 제3대 조사라는 사실은

벽송사 사적의 백미가 아닐 수 없다.

서산대사 문하의 사명대사와 청매조사도

이곳 벽송사에서 오도하여 크게 불법을 떨치게 된다.

그리고 부용영관의 다른 한 사람의 수법 제자인 부휴선수선사 또한

벽송사에서 도를 깨닫고 벽송산문의 조사가 되어 오랫동안 지리산에서 행화하였다.

오늘날 한국불교 출가스님의 모두가 서산문파와 부휴문파에 속한다.


서산과 부휴 양대 조사가 모두 벽송사 출신이라는 사실은

벽송사가 조선불교의 종가(宗家)임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벽송사를 가리켜서, “조계조정(曹溪朝庭), 벽송총림(碧松叢林),

선교겸수(禪敎兼修), 간화도량(看話道場)”이라고 불렀다.

1704(숙종 30)에 환성지안(喚醒志安)대사가 벽송사에 주석하며 도량을 크게 중수하였다.

이때에 불당, 법당, 선당, 강당, 요사 등 30여 동의 전각이 즐비하였으며,

상주하는 스님이 300여 명에 이르렀고, 부속 암자는 10여 개가 넘었다고 전한다.

이로부터 금대암에 선원이 개설되어 수선납자가 운집하고,

벽송사 본당에는 강원이 개설되어 근세 일제강점기까지 지속되었으니,

300년 동안 조선불교 제일의 총림이 이루어져 선교겸수(禪敎兼修)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이로부터 선교를 겸한 대종장들이 벽송사에 수선안거하면서 후학들을 지도하게 되니,

강당을 거쳐간 강주(講主)스님만도 약 100인이나 되니 

학인과 납자의 수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근대에 선지식이신 경허선사도 벽송사에 주석하며 서룡선사 행적기록을 집필하였다.

특히 벽송사 강원의 마지막 강주를 역임한 초월동조(初月東照)대사는

일제강점기에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혜화전문학교의 교장을 역임하였으며,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옥고를 치르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일제 조선불교 말살정책으로 인해 400여 년 간 지속되어 온

한국불교 최고의 조정인 벽송사의 사세도 기울기 시작했다.
특히 한국전쟁으로 시작된 지리산 빨치산들의 암약

(당시 벽송사는 빨치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됨)으로 말미암아

국군에 의해 방화되어 완전히 소실되는 슬픈 역사를 맞이하게 되었다.

60년대 이후 구한원응(久閒元應)대사의 원력에 의해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옛날 선종의 최고 조정에 벽송선원을 낙성하여 을유년(2005) 하안거에 개원하여

눈 푸른 납자들이 수행 정진할 수 있는 선찰종가(禪刹宗家)로 거듭나게 되었다.


벽송사에는 신라 양식을 계승한 3층석탑(보물 제474)과 경남 유형문화재인 벽송선사진영.

경암집 책판. 묘법연화경 책판과 경남 민속자료 제2호인 목장승 등의 문화재가 보존되고 있다.

특히 목장승은 변강쇠와 옹녀의 전설이 깃들어 찾는 이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선방 뒤 탑전 앞에 천년의 세월을  묵묵히 서 있는

도인송(道人松)”미인송(美人松)”의 전설 또한 유명하다.

예로부터 목장승에 기원하면 애정이 돈독해지고,

도인송의 기운을 받으면 건강을 이루고 한가지 소원이 이루어지며,

미인송에 기원하면 미인이 된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벽송사 선방에서 도인이 유래없이 많이 나와서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한다.는 말이 여기서 생겨났다고 한다.

조선 선불교 최고의 종가인 벽송사를 참배하여

묵은 업장을 소멸하고 청복(淸)을 담아 성불인연을 가꾸어보자.

아울러 벽송사 목장승과 도인송, 미인송의 기운을 받아

건강과 소원을 성취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의중마을로 이어지는 지리산 둘레길과 만나는 서암정사,

금계 2.2km · 동강 10.5km를 가리키고(10:52 - 11:07)








서암정사(瑞庵精寺),

서암정사는 해동 삼대 명산 중의 하나인 지리산의 큰 줄기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사찰로,

        석굴법당은 원응큰스님께서 6.25전쟁의 참화로 희생된 무수한 원혼들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1989년부터 10여 년 간에 걸쳐 불사를 진행하여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석굴법당 안에는 아미타부처님상과 제불보살상 등으로

불교의 이상세계를 상징하는 극락세계가 정교하게 장엄되어 있다.

2010년에는 대웅전 지하에는 금니사경 참배관을 마련하여

원응큰스님께서 석굴법당의 원만한 불사를 염원하며

1985년부터 금니사경을 해오신 작품들을 참배할 수 있도록 하였다.

2012년도에 완공한 대웅전은 한국 전통 목조건물로는 아주 드문 아(亞)자형 건축물이며,

중층구조의 겹처마를 두어 한국 고건축의 선과 미를 극대화하였다.





사천왕상(四天王像),

사천왕은 수미산 정상의 중앙부에 있는 제석천(帝釋)을 섬기며

불법(佛法)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수호하는 호법신(護法神)이다.

동쪽의 지국천왕(持國天王). 남쪽의 증장천왕(增長天王).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을 말한다.

사대천왕(四大天王) 또는 호세사천왕(護世四天王)으로 불리며

    지국천왕은 비파(琵琶). 다문천왕은 탑().

광목천왕은 용(龍). 증장천왕은 검()을 들고 있다.

 

예로부터 한국의 사찰에서는 천연 거암에 부조하여 웅장함과 기상을 크게 높였다.

    자연 바위를 이용해 사천왕을 일렬로 배치한 것이 특징이다.

석주 쪽으로부터 증장천왕. 광목천왕.

지국천왕. 다문천왕의 순서로 부조되어 있다.

서암정사 사천왕상은 경주 석굴암의 사천왕상을 참고해 조각했다.  

경주 석굴암의 사천왕상을 본떠 놓고 조각을 하면서 느낀 것은

사천왕이 밟고 잇는 악귀들의 옷매무새가 흔히 역사서에 그려진

왜구()들의 모습이라는 인상을 지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신라인들은 신라가 추구하는 이상국가인 불국토를 괴롭히는

왜구를 불법을 방해하는 마구니로 생각했을 것이다.

더욱이 석굴암은 동해바다를 멀리 바라다보고 있으니.....

    그러므로 이런 불사의 밑바탕에는 불력(佛力)을 빌어

국가를 수호하고자 하는 신라인들의 호국신앙을 읽을 수 있겠다.


 

















이제 벽송사로 올라가고(11:10)


















벽송사,

벽송사 목장승 옆으로 지리산 둘레길은 이어지지만,

 여기까지 와서 벽송사를 둘러보지 않고 그냥 갈 수야,

모두가 황금백수들이라 별스레 바쁠 것도 서둘 것도 없는데,

어차피 하루해를 보내려고 집을 나서지 않았던가?

인월 금계 2.9km · 동강 9.8km를 가리키고(11:21 - 11:33)





























도인송(道人松),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고





미인송(美人松)



미인송과 도인송












벽송사 삼층석탑(碧松寺 三層石塔, 보물 제474호),

이 탑의 위치는 원래 벽송사 대웅전 동편에 세워 놓은 것인데

사찰이 아래로 옮겨져 탑만 남게 됐다.

2중기단 위에 방형의 3층 탑신부를 이룬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그대로 계승한 탑이지만,

사찰이 세워진 때가 조선시대(1520년)이므로 그때 탑도 세워진 것으로 판단된다.

탑의 위치가 법당 앞이 아닌 뒤편이라는 점이 특이하며

신라시대의 삼층 석탑의 모습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예로서 주목되는 탑이다.

현재 탑의 상륜부에는 복발(覆鉢)과 노반(露盤)이 남아 있으며,

탑의 높이는 3.5m이다.











함양 벽송사 목장승(咸陽 碧松寺 木長丞),

    장승에는 돌로 만든 석장승과 나무로 만든 목장승이 있다.  

장승의 기원에 대해서는 고대 성기(性器) 숭배에서 나왔다거나

사찰 토지의 표지로 이용되었다는 등 여러 설이 있다.

또 목장승은 솟대에서,

석장승은 선돌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장승이 지방에 따라 벅수. 벅시. 법수.

수살목. 당산할배 등으로도 불렀다.

장승은 소속과 위치에 따라 마을을 지키는 마을장승.

사찰의 입구나 사방 경계에 세워진 사찰장승.

지역 간의 경계. 성문. 병영. 해창(海倉). 관로(官路) 등에 서 있는 공공장승 등이 있다.


벽송사 입구에 세워진 이 장승은 사찰에 들어오는 악귀의 퇴치.

사찰 경내에서 행해지는 불법 어로와 사냥의 금지.

풍수지리상의 비보(裨補) 역할 등 다양한 목적으로 세워진 것이다.

제작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대략 일제시대 초기의 것이라고 전한다.

목장승은 노천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서 있기 때문에 오래 가지 못한다.

 

이곳의 왼쪽에 서 있는 '금호장군'(禁護將軍)

역시 커다란 왕방울 눈 하나만을 빼고는 원래의 모습을 상당 부분 잃어버렸다.

그러나 '호법대신'(護法大神)인 오른쪽 장승은

 거의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서 있다.

머리와 큰 눈. 큰 코. 일자형 입과 수염 등이 매우 인상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무서운 것 같으면서도 순박하고.

위풍당당하면서도 익살스러운 모습이라서 보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이 두 장승은 불교와 민간 신앙이 어우러져 나타난 걸작 조형물이라 할 수 있다.​​

 

* 비보(裨補) : 풍수지리상에서 나쁜 기운이 깃든 산천 등에 탑, 장승 등을 세워

    나쁜 기운을 억누르고 약한 기운을 도와 보충하는 것








벽송사에서 쭉 이어지는 가풀막으로 올라선 벽송사능선,

 벽송사 0.7km · 송대마을 2.8km를 가리키는데,

송대마을은 지리산 둘레길 아닌 마적도사 전설탐방로가 지나는 걸(11:50)














안부 사거리,

모전마을과 송대마을 및 광점동 갈림길로,

송대마을은 벽송사능선으로 좀 더 가다 왼쪽으로 내려가면 되고,

용유담과 모전마을은 여기서 왼쪽으로 내려서야 하는데,

이미 때가 되었기에 점심을 먹고 가기로,

 금계 3.8km · 동강 8.9km를 가리키고(11:57 - 12:55)


안부 아래 널브러진 옛 이정표,

함양군에서 빨치산루트를 개발하면서 세운 것으로 보이는데,

국립공원관리공단과 마찰을 빚더니 결국은 저런 신세가,

   선녀굴은 5.15km요,

1.15km를 가리키는 건 벽송사가 아닐는지?


자연보호운동,

개인마다 비닐봉투 하나씩을 들고 길가에 흩어져 있는 쓰레기들을 주워 담기로,

말할 것도 없이 우리가 머문 자리는 아니 간 듯 깨끗이


숯가마터인 듯?



묵은 논밭들이 나타나기도 하고






목교,

뒤처진 이들을 기다렸다 같이 가기로,

그래봤자 또 처질 게 뻔하지만,

더불어 사는 세상 아니던가?(13:32 - 13:43)











나무다리,

 금계 5.4km · 동강 7.3km를 가리키고(13:47)





용유교가 보이고






모전마을 지리산 둘레길 삼거리,

동강으로 가는 지리산 둘레길은 지명선원 표지석 쪽이지만, 

100m 남짓 떨어진 가까운 용유담을 모른 척하고 그냥 갈 수야,

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하지만 갈 수밖에는,

용유담이야말로 최고의 볼거리 가운데 하나가 아니던가?

 모전마을과 의중마을을 잇는 직통코스는 금계 4.1km · 동강 6.9km이며,

벽송사와 서암정사를 경유하는 순환코스는 금계 5.6km · 동강 7.1km를 가리키고(13:51)


용유담(모전마을),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금계마을, 의평마을, 의중마을,

모전마을, 세동마을과 휴천면 동강마을을 잇는 11km의 지리산 둘레길,

이 구간은 지리산 자락 깊숙이 들어온

                     산촌마을과 사찰을 지나 엄천강을 만나는 길이다.    

          

  * 용유담 : 지리산을 유람하던 선인들이 여흥을 즐기던 곳으로, 마적도사와 아홉 용의 전설이 있다.

  *    옻    : 마천은 천연도료이자 약으로 쓰이는 옻이 유명했던 곳이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으나

                      의중마을, 금계마을, 원정마을에는 겨울이 되면 아직도 옻을 생산하는 농가가 남아 있다.

 * 엄천강 : 지리산 북부지역의 물줄기가 모여 엄천강이 되며, 남강을 지나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모전교






용유담,

의중마을과 모전마을을 잇는 지리산 둘레길이 지나는 곳으로,

금계 3.9km · 동강 7.1km를 가리키고(13:53 - 13:57)





용유담(龍遊潭),

엄천강의 상류에 있는 용유담은 마천면과 휴천면의 경계인 이곳에 위치해 있다.

지리산의 아름다운 계곡들에서 흘러내린 맑은 물이 용유담에 이르러서는

해가 쨍쨍 내리쬐는 화창한 대낮에 우레소리 같은 폭포의 소리를 비롯하여

장방형의 평평한 호수를 이루게 된다.

화강암으로 된 기암괴석이 첩첩이 쌓인 험준한 봉우리는

용이 하늘로 날아 올라가는 형상이라고 하겠다.

이 용유담은 신선이 노니는 별유천지로

옛부터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았았던 곳으로

여름이 되면 각처의 피서객들이 휴식처를 찾아 모여 들어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서편의 벼랑으로는 절경을 이루는 풍치와 청아한 물빛,

거울 같은 물에 비친 산그림자,

푸른 못의 반석에 펼쳐진 모래는 가히 도원경의 경지에 이르는 듯

황홀한 풍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하염없이 도취되게 하곤 한다.

길 언덕 위에 구룡정이란 정자가 있고,

이 용유담가에는 당나귀바위와 장기판이라는 바위가 있다.

용유담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다는 전설과

마적도사와 당나귀 관련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용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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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적도사 전설탐방로 이정표인 듯,

송전(세동)마을 5.8km · 모전마을 0.36km를 가리키고


모전마을회관 삼거리,

지리산 둘레길과 엇비슷하게 나아가는 지리산 둘레길 전설탐방로를 따라가기로,

용유담 0.3km · 세동마을 2.1km를 가리키고(14:00)














지리산 둘레길 전설탐방로,

용유담 0.8km · 세동마을 1.6km를 가리키고(14:06)





용유담 1.1km · 세동마을 1.8km를 가리키는데,

이정표마다 거리가 제각각이라 믿음이 가지 않는 걸,

다른 걸로 봐선 세동마을은 1.3km가 아닐는지?(14:11)





지리산 둘레길에 합류하고(14:12)






보라,

저 아름다운 모습을


여긴 또 어떤가?

제발 좀 버리지 말자.

주울 것도 없게








멋진 소나무,

용유담 1.8km · 세동마을 0.6km를 가리키고(14:20)











함양 독바위가 보이고









세동마을,

지리산 둘레길과 지리산 둘레길 전설탐방로가 또다시 나뉘는가 하면,

송대마을을 경유하며 용유담과 세동마을을 잇는 마적도사 전설탐방로가 끝나는 곳으로,

그 또한 언젠간 가야 할 숙제가 아닐는지?

지리산 둘레길은 금계 6.2km · 동강 4.8km요,

하나가 사라진 지리산 둘레길 전설탐방로는 용유담 2.4km이며, 

마적도사 전설탐방로는 용유담 2.25km · 용유담 5.8km를 가리키고,

세동마을은 전형적인 지리산 산촌마을이자

한때는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닥종이 생산지로 이름을 떨쳤다는데,

효자증조봉대부동몽교관평산신영언지려(孝子贈朝奉大夫童蒙敎官平山申永彦之閭)란

정려각(旌閭閣)이 자리 잡고 있고(14:29 - 14:32)


동강마을 5.3km라는 건 어디로 갔을까?






세동마을회관






마암비(磨巖碑, 군수이봉화애민어재비),

세동마을회관에서 60m쯤 떨어진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233 - 2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내용을 보면,

     郡守 李鳳和 愛民御灾碑(군수 이봉화 애민어재비) : 함양군수 이봉화가 백성을 사랑하고 재앙을 막은 비

警察署長 道警部 上木屋喜 左衡門 恤灾碑(경찰서장 도경부 상목옥희 좌형문 휼재비)

                                                                        : 함양경찰서장 상목옥희가 재앙을 막은 비

面長 許南 布德捄灾碑(면장 허남 포덕구재비) : 휴천면장 허남이 덕을 베풀고 재앙에서 구한 비

議官 姜渭秀 施惠賑灾碑(의관 강위수 시혜진재비) : 의관 강위수가 은혜를 베풀고 재앙에서 구한 비

大正 拾五年 咸陽郡 休川面 細洞 監役 申鶴均(대정 십오년 함양군 휴천면 세동 감역 신학균)

                                                                       : 1925년 휴천면 세동에서 신학균이 새김


통천교시성(通川橋始成) 유경환(劉景煥) 갑인 칠월 일(甲寅 七月 日),

처음 통천교를 만든 유경환을 기리기 위해 1914년에 새긴 마애비라고





외암대(巍巖臺),

명승지가 아니라 묘비석이라고(14:35)





문수사 갈림길,

함양 독바위 아래 자리 잡은 절이고(14:36)





송전가든



용유담 3.4km · 동강마을 4.3km를 가리키는데,

지리산 둘레길 전설탐방로란 안내판이 서 있고(14:44)


지리산 둘레길 전설탐방로,

옛날 용유담에 아홉 마리 용과 마적도사가 살고 있었다.
마적도사가 쇠도장을 찍어 나귀에게 보내면 나귀가 생필품을 싣고 와

용유담가에 와서  크게 울면 마적도사사 다리를 놓아 나귀를 건너오게 했다.

어느 날 장기삼매경에 빠져있던 마적도사는 용들이 싸우는 소리에  
나귀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했고 결국 나귀는 울다 지쳐 죽고 말았다.
화가 난 마적도사는 자신을 질책하여 장기판을 던져버리고 용들을 쫓아버렸다.
그때 던진 장기판 조각들이 용유담에 있는 바위들이다.

용유담과 세동마을을 잇는 옛길로 용유담의 전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길이다.


송문교,

여태까지 주운 쓰레기를 처분하고 쉬었다 가기로,

아껴둔 명석 막걸리를 마저 비우기도 하면서,

금계 7.9km · 동강 3.1km를 가리키고(14:56 - 15:06)


























자연의향기펜션  









운서제1교,

금계 9.1km · 동강 1.9km를 가리키고(15:26)





운서쉼터,

적조암과 함양 독바위 갈림길이기도 하며,

남은 술과 음식을 탈탈 털어 나눠 먹으며 쉬었다 가기로,

금계 9.2km · 동강 1.8km를 가리키고(15:28 - 15:43)











금계 - 동강 운서마을(쉼터),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금계마을, 의평마을, 의중마을,

모전마을, 세동마을과 휴천면 동강마을을 잇는 11km의 지리산 둘레길,

이 구간은 지리산 자락 깊숙이 들어온

산촌마을과 사찰을 지나 엄천강을 만나는 길이다.

사찰로 가는 숲길과 등구재, 법화산 자락을 바라보며

                             엄천강을 따라 걷는 옛길과 임도를 걷는다.                        


구시락재에선 왕산이 들어오기도 하고












운서마을,

휴천면에서도 사람이 살 수 있는 가장 좁은 마을로,

전체면적의 3/1 이상이 지리산국립공원 구역 내에 들어 있고,

그 외도 산악지역이라 농경지가 별로 없는 마을이며,

금계 9.6km · 동강 1.4km를 가리키고(15:49)





이름 없는 다리(15:55)



금계 10.3km · 동강 0.7km를 가리키고(15:58)



구시락재,

순하디순한 복실이가 꼬리를 흔들면서 반기는데,

 저러고서 밥이나 제대로 얻어 먹을 수 잇을는지?

금계 10.4km · 동강 0.6km를 가리키고(16:00)





구시락재에선 동강마을이 내려다보이고





















동강교가 보이고






동강마을 당산 쉼터,

금계 10.8km · 동강 0.2km를 가리키고(16:10)


동강마을 당산 쉼터,

김종직의 유두류록(遊頭流錄)은

1472년(성종 3) 8월 14일부터 8월 18일까지 지리산 산행을 한 기록문이며,

유두류록에 동강마을 당산 쉼터를 화암(花巖)이라 기록하여 놓았는데 바로 이곳이다.

이 당산 쉼터 뒷산의 산봉우리 모양이 연꽃 봉오리 모양이고,

옛날부터 꽃봉산이라 불리어졌으며,

꽃 화(花), 바위 암(巖)에 연유되어 이곳을 화암(花巖)이라 기록하였으리라 여겨지고,

이 화암의 위치를 지리99 유두류록 탐구산행팀이 여러 고증을 거쳐 찾아낸 곳이다.


함양 관아에서 출발한 김종직 선생의 일행은

엄천을 지나 이곳(화암)에서 쉬고 지리산 둘레길인 구시락재를 넘어

함양 독바위를 거쳐 지리산 산행을 하였는데, 

당시에 유호인, 임정숙, 한백원, 조태허, 승려 해공도

이곳에서 함께 쉬어 간 선인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중요 지점이며,

1970년대 중반까지 음력 섣달 그믐날 저녁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이곳에서 지냈던 곳이고,

오랫동안 지역민들의 쉼터 역할을 한 곳이다. 

















동강마을,

금계와 동강을 잇는 제4구간이 끝나는 곳이요,

동강과 수철을 잇는 제5구간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한데,

제5구간인 산청 · 함양사건추모공원이 자리 잡은 방곡마을까지 이어가기로,

금계에서 운리까진 4구간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3구간으로 줄여 진행하자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나 할까?

동강마을은 조선 고종 때는 엄천면 사무소가 있었다고 하며,

금계 11.0km · 수철 12.1km를 가리키고(16:14 - 16:17)





엄천교






왕산이 가까이 다가서고









완경대(翫景臺),

경치를 보면서 즐기는 곳이라는 뜻이요,

그 주인공은 나주 임공이라는 걸(16:24)

















수석대(水石臺, 신틀바위),

임천강으로 흘러드는 오봉천에 걸친 자혜교 부근에 자리 잡고 있으며,

미투리나 짚신을 삼을 때 신날을 걸어 놓은 틀과 그 모습이 닮아 신틀바위라 부르며,

동강 1.3km · 수철 10.8km를 가리키고(16:31)


방곡마을 표지석 뒤로 자혜교가 보이고







































산청· 함양사건 희생자 합동묘역,

이곳은 산청·함양사건 희생자 합동묘역으로

6.25 전란 중이던 1951년 2월 7일 육군 11사단 9연대 3대대에 의해 

견벽청야라는 작전명에 따라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이 전개되면서

 산청군 금서면 가현, 방곡마을과 함양군 휴천면 점촌마을,

유림면 서주마을 등에서 양민 705명이 희생되었던 바, 

때 억울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모신 묘역입니다.


합동묘역 조성과 위령탑 건립은 1996년 1월 5일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 공포와 1998년 2월 17일 거창사건 등

관련자 명예회복심의위원회의 사망자 및 유족 결정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2001년 12월 13일 합동묘역 조성사업 착공 이후

4년에 걸친 공사 진행으로 준공에 이른 것입니다.


이 묘역에서는 모두가 경건한 마음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국민은 하늘과 같고, 역사는 정의의 편에 있으며,

인명은 절대의 가치로 있음을 확인하면서

희생된 영령들이 우리 후손에게 남겨주고 있는 진정한 자유와

번영의 소중한 가치를 되새기는 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산청군 금서면 방곡리 방곡마을(산청 · 함양사건추모공원).

제4차 지리산 둘레길은 여기서 이제 그만,

제5차 지리산 둘레길은 3월 9일(금요일)에 있을 예정이요,

동강 2.8km · 수철 9.3km를 가리키고(16:51)